이곳 LA에서 방영되는 일본 NHK TV의 아침 드라마에서 마침 오늘 추수감사절에 나온 이야기다. 젊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사연인즉, 그 남자의 한 절친한 친구가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려 했다. 여자는 한 해만 지나면 나이 30이 되므로 더 늦기 전에 결혼하여 안정된 가정을 갖기를 원했다. 반면에 결손 가정에서 자란 남자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자신이 도무지 없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여자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그 사실을 남자 친구에게 아직 밝히지 않았다.
주인공 카플이 이 친구 카플을 다시 화해시키려 만난 장소에서 문제의 임신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도 그 남자는 “낳든 지우든 마음대로 하라. 수술비나 양육비는 자기가 다 대겠다. 나는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다”면서 계속 헤어지자고 고집을 부렸다.
보다 못한 여자 주인공이 그 남자에게 이렇게 다그쳤다. “지금 배 속의 아이가 듣고 있다. 명색이 나중에 아빠가 될 사람이 아빠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해선 안 된다. 아이가 듣고 얼마나 슬프겠느냐? 나는 정원을 꾸며주는 일을 하는 데 내가 꾸민 정원을 보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우리 인생은 남의 행복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데 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심지어 자기 아이의 행복마저 짓밟으려 드느냐?”
그럼에도 그 남자는 기어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결국은 그 충고에 마음이 찔려서 여자 친구랑 화해하고 또 결혼하기로 했다. 그 반가운 소식을 전화로 듣게 된 여자 주인공은 너무나 감사해 눈물을 흘렸고 마침 같이 있던 남자 주인공이 그 모습을 본 것이다.
여자 주인공은 자기가 어려운 일을 겪은 것도 또 어려운 일에서 헤어 나온 것도 하나 없었다. 단지 자기 남자 친구의 친구들이 힘들어하자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충고해 준 것 뿐이었다. 그녀는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고 또 남의 기쁨도 함께 기뻐한 것이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와까바(若葉 연한 순)였다.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은”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사53:2,4) 우리가 슬플 때 예수님은 더 슬퍼하시고 우리가 기쁠 때 그분은 더 기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힘들 때의 한숨어린 절규나 즐거울 때의 탄성 섞인 고함을 놓치는 법이 결코 없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추수감사절이라면 그저 하나님이 올 한 해도 무사무탈(無事無脫) 하게 해 주신 것, 즉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 것만을 감사한다. 또 그 표시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오직 풍요와 안락함에 대한 감사와 내년에도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때운다.
신자가 정작 감사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우리와 함께 울어 주시고 웃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울고 웃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분만이 절대로 어떤 이해타산, 시기질투, 위계조종이 없이 함께 웃고 울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주님이 나 자신을 위해 울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감사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쳐선 안 된다. 신자는 주님을 닮아 남을 위해 정말 진심으로 함께 울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올 한해 내가 얼마나 그런 울음을 울었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내가 남들과 함께 웃고 울어줌으로써 그들이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린 적이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추수감사절에 주님 앞에 드릴 진정한 감사의 열매는 바로 이것이다.
11/23/2006
흔히들 욥기의 주제가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이 더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에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 살짝 숨겨져 있습니다.
"Have pity on me, my friends."(욥19:21)
설득하는 친구들에게 기대했던 욥의 바람은 단지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도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다면
이미 주님 가까이 많이 다가간 것일 것입니다.
정확히 깨우쳐 주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갑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