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사는 한국, 내일을 사는 일본
미국 TV가 전면 디지털화 되면서 일본 공영방송인 NHK 국제방송도 이곳 LA에서 시청이 가능해졌다. 일본 각지의 고유 풍물이나 일본기업들의 최신정보를 소개하는 프로를 가끔 보는 편이다. 금주에 우연히 눈길을 끄는 소식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땅에 묻어도 용해가 되며 비료효능까지 내는 플라스틱을 개발 실용화한 회사였다. 슈퍼마켓 봉투에서부터 일부 전자제품 외장재와 자동차 부품에까지 서서히 사용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혹카이도 현에서 겨울 내내 8미터나 내린 눈을 여름에 에어컨디션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양로원, 관공서 같은 건물에 큰 냉장창고를 부착해 겨울에 내린 눈을 트랙터로 쓸어 넣어 보관했다가 환풍기로 창고안의 서늘해진 공기를 건물에 불어넣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도 전체 비용은 오히려 40% 이상 절감된다고 했다.
세계적 불경기로 미국의 GM과 Chrysler 자동차 회사마저 부도를 맞았다. 그런 틈새를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신선한 마케팅 전략을 앞세워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이뤄냈다. 신차를 구입 후 일 년 안에 실직하면 아무 벌금 없이 회사가 차를 회수해 주겠다는 것이며 최근에는 몇 달치 할부금마저 회사가 대신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급기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 회사가 그 판매방식을 그대로 베끼기까지 했다. 당연히 미국 TV의 그 현대차 세일즈 광고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보고 있는 저도 덩달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는 중에 일본 Toyota 자동차의 신형소형차 Prius의 광고는 색다른, 어쩌면 더 큰,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인간과 자연과 기계의 조화”(harmony between man, nature and machine)라는 구호를 앞세워 자동차가 더 이상 공해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처럼 선전한 것이다.
실상은 선루프와 환풍시스템 정도를 태양에너지로 작동하게끔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사막에서 나무가 솟게 해서 자연이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광고 Concept은 마치 공해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획기적인 신제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금껏 미국시장에 형성된 브랜드 이미지대로 현대는 값이 싸지만 비교적 좋은 차, Toyota는 획기적이면서 최고급 차라는 차이가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난 것 같아 한껏 좋았던 기분이 쪼끔은 사그라졌다.
일본 기업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신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열의는 아마 세계 최고인 것 같다. 예의 Toyota 사의 로고 옆에 붙은 모토도 “앞으로 전진하는”(Moving Forward) 회사이며, 전사적인 목표마저 "타도 Toyota!"(세계 1위에 안주하지 말고 더 앞장서자는 뜻)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NHK에서 관민 합동으로 장래를 내다보고 꾸준히 땀 흘리는 일본 소식을 접하고 나자 같은 시간에 방송하는 한국 TV 뉴스는 솔직히 전혀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정치, 사회, 경제, 노동, 교육,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아직도 좌우 이념 논쟁에 도끼 자루 썩는지 모르고 있으니 외국에 나와 있는 한국교민으로서 너무나 착잡하고 심지어 초조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물론 한국에도 이름 없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서서 미래를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는 개인과 기업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으로 보도되는 부분만 갖고 판단하면 일본은 내일을, 한국은 어제를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말이다. 분명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다. 그 진리를 믿고 실천해야 할 기독교계마저 내일의 소망은 뒷전인 채 서로 간에 어제의 탓을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이제는 짜증을 넘어서 자꾸 화만 치밀어 오른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교회에 부탁한 말씀을 들어보라.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그 하나 되게 하신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아닌가?
또 그것을 실천하는 방안이 무엇인가? 신자 각자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한 알의 밀알로서 썩어 없어지는 것 아닌가? 격변하는 세상의 미래를 대비하여 자연과 인간을, 인간과 기계를, 무엇보다 인간끼리,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아주 적은 일에서부터 하나씩 묵묵히 실천하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교회에서 십자가는 실종되고 신자들마저 거꾸로 어제를 살고 있으니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수밖에는 .... 또 오셔서 알곡과 가라지부터 구분할 수밖에는 ....
6/19/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