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쓰나미의 천벌론(天罰論)에 대해
이번 일본의 대지진이 과연 하나님의 벌인가 아닌가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칼럼에도 김성진님이 조용기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 아주 좋은 의견을 달아주셨습니다. 또 쌀로별님은 시대의 흐름이 불안해서 개인적 문제에 붙잡혀 있는 것이 옳은지 혼란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제 의견을 조금 더 자세히 개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어저께 한 교회의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때가 때인 만큼 이번 쓰나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 칼럼에 썼던 대로 요나처럼 왜곡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혔던 신자들의 심술궂은 마음보부터 회개하여 뜯어고치고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미국도 일본과 비교도 안 되는 큰 쓰나미를 이미 당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일본은 집이 몇 만 채만 파도에 떠내려갔지만 미국은 지금 수백 만 채가 은행 빚에 떠내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실은 금융사태가 오기 오래 전에 제가 어떤 설교 중에 그렇게 되리라 예언(?)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죄가 많고 완악한 미국의 세태를 성경의 진리와 비교해보니까 언젠가 하나님의 벌을 받긴 받을 텐데, 아마도 대공황 같은 불경기의 형태가 될 것이라고 어림짐작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항상 있어 왔다.
먼저 아실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종족들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죄를, 개인별로 사회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항상 넘치도록 범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모든 잘못에 대해 일일이 상응되는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내포하는 부정적 영향 때문에 죄 중에 있으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죄를 다루는 모습이 인간이 바라볼 때는 비교적, 아니 아주 관대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인 두 주제, 1)왜 악인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2)의인은 왜 악인의 핍박을 받아야 하느냐가 뜻하는 그대로입니다.
하박국이 갈등했던 이 문제는 십자가 복음을 모르면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에서 절대 깨끗해질 수 없고 또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겨진 데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성령을 내주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어리석은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죄지을 때마다 일일이 벌을 준다면 이 복음의 원리와 상충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폭군 하나님이 되며, 모든 이가 겁에 질려서라도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을 것입니다. 이는 온전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에 애초부터 당신께서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지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벌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또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약에서도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대하는 동일한 원리였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에 죄를 죄라고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으로서도 심판을 보류하고 기다려줄 여지가 있습니다. 최소한 그분 앞에 회개할 거리가 있음을, 실제로 회개하여 선해지려 노력하든 안 하든 간에,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신다고 무작정 무한대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차면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신자든 불신자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자주는 몰라도 가끔은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하나님은 없고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사정은 여실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에 당신께서 더 이상 기다려 줄 여지가 없습니다. 금융위기 오래 전부터 미국에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라고 제가 감히 예언할 수 있었던 근거도, 미국 사람이 윤리적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 보다는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의 복음의 공로가 부인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치 않는 우상숭배는 가장 큰 죄이자 하나님의 벌을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분명한 원리는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신자에게 한꺼번에 큰 벌을 내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어떤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징벌을 내리실지는 오직 당신의 주권에 달렸을 뿐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나 윤리적 죄에 대한 인내에 한계가 차서 벌을 내리든, 우상숭배에 대한 징벌이든 간에 그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으로 회개토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엄청난 규모의 징벌이 닥쳐도 아직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종말의 시기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에 내일 당장에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의 양 즉, 사탄에 미혹되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아끼시는 그 긍휼의 크기는 우리 추측을 훨씬 넘어섭니다.
또 징벌의 최종 목적이 구원이기에 하나님의 벌주는 방식도 회개로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모습으로 이뤄집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벌임에 틀림없다고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고 이번 쓰나미처럼 가공할 위력 즉,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만 드러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실존성에 대한 인식 밖에 못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를 범한 당사자들이 자기 잘못의 정확한 실상과 그 원인까지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금융 쓰나미를 봅시다.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회라도 기본적 인권은 물론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해 일하면 그 보상이 돌아와야 합니다. 이는 저울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형통의 지름길이라고 잠언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입니다. 미국의 모든 법률, 제도, 관습은 합리적이었고 탈세와 부정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신용사회였습니다. 또 기독교가 가치 판단의 척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기독교가 변질 부인 되면서 사람들의 도덕도 함께 타락했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버는 것만이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바뀌었고 월스트리트의 아이비리그 나온 수재들이 그 선봉에서 주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아메리칸 드림이 맘몬 신의 꿈으로 대체되어 타락해버렸습니다. 당연히 그 벌도 미국이 자랑하는 아메리칸드림을 무너트리는 불경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컨대 돈만 밝히기에 돈으로 벌을 준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진과 핵입니다. 그 대비책 또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밀성, 안전성은 자연(하나님)의 위력 앞에는 무용지물입니다. 쓰나미로 일본이 교만하게 자랑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깨트리셨던 것입니다.
또 일본의 우상숭배에 제한된 직접적 징벌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세계 인간들이 갈수록 하나님을 부인하고 과학문명이 만능통치약인줄 착각하는 그 교만과 완악성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정밀도와 안전성을 자랑하는 일본을 택하여 모두가 실황중계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벌을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을 크게 혼내려고 하나님이 별도로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이미 조성되어 있는 자연환경을 사용해서 벌준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일본인들이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돈이 최고로 많이 몰려 있던 미국에는 돈을 사용해 벌을 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하나님은 필요 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빳빳이 목을 쳐들고 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두 쓰나미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진짜 심판을 하시려면 일본열도를 침몰시키든지, 또 전세계에 노아 홍수같은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비록 그 규모가 엄청나긴 해도 아직은 전지구적인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두 쓰나미 모두 잘 살펴보면 분명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인내, 구원, 사랑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더러 죄에서 회개하라는, 최소한 교만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재앙을 당한 당사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고 들은 전지구인더러 말입니다.
욥기와 재앙
문제는 욥기에 따르면 죄와는 무관한 원인 모를 재앙도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가만히 따져 보면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쓰나미를 하나님의 벌로 여기는 것은 욥기를 제대로 이해 못한 비성경적인 오류인 것처럼 일부에선 주장합니다. 예수님도 나면서 소경인 까닭이 아비나 본인의 죄가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원론적인 측면에선 옳은 반론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욥의 믿음을 테스트할 양으로 사단이 요구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그런 재앙이 일어날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이나 재앙을 적극적으로 주도 조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락 묵인할 때는 많습니다. 이처럼 범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에 궁극적으로 일본의 쓰나미도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하는 진술은 기독교적입니다.
그 다음으로 따져볼 것은 욥이 겪은 환난이 과연 죄에 대한 벌인지 여부입니다. 우선 그 환난들이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관 아래 일어났기에 그 자체로 이미 징벌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결과로만 드러난 모습 자체로도 어쨌든 벌은 벌이라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일본 쓰나미도 생명은 살려주되 다이아몬드가 파도에 함께 밀려오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에 불신자들도 이런 엄청난 재앙을 보고는 어렴풋이 천벌일 수 있겠다는 인식도 합니다. 이번에도 이시하라 도쿄지사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진 일본인들이 천벌 받았다고 대놓고, 나중에 사과하긴 했지만, 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태여 기독교계가 나서서 그것마저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사자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문제이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또 그럴수록 따뜻하게 위로해주면서 사랑으로 도우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적 원리는 신구약을 합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구약에선 점진적으로 드러나다가 신약에 이르러 완전히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내용도 아무리 자체적인 문맥과 책의 주제에 맞추어 정확히 해석했다 하더라도 신약성경과 연결해서 검토 적용하지 않으면 자칫 또 다른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행동으로 저지르는 죄만이 아니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예리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죄책감으로 얽매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당신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을 얻는 길임을 밝히고자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욥이 아무리 죄가 없었어도 십자가 복음에 비추면 그도 수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별적 죄에 대응하는 벌을 주지 않으니까 인간이 실제로 느끼기에는 환난과 죄가 상관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욥의 환난도 지은 죄에 일대일 상응한 벌이 아닌 것은 틀림없지만 전혀 죄가 없는데 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한 결과로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로선 꿈에도 짐작 못했습니다. 더더욱 아무 이유 없는 억울한 벌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께 무례하다시피 끈질기게 따진 까닭입니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큰 잘못이 분명 있었습니다. 자기가 벌 받을 이유가 없다고 우기면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경우가 되어도 욥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나는 벌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대드는, 다른 말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만은 의롭다는 교만입니다. 앞에서 구약 시대 인물인 욥의 구원도 십자가 복음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또 그가 죄 없이 벌 받았다는 주장도 궁극적으로 틀린 진술이 됩니다.
욥기의 마지막에 가선 도리어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따집니다. 과연 네가 나에게 고난의 이유를 대라고 따지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이냐고 말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던진 그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라도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그가 당한 고난의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사탄과 내기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욥과 직접 내기를 하러 땅으로 내려온 셈입니다.
결국 어리석고 불완전한 욥으로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고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과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다”(42:3)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32:1) 바람에 잘못된 기복신앙관을 가진 친구들마저 할 말을 잃게 만든 그가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골고다 이전이었지만 십자가 앞에 완전히 엎드려 "저야말로 죄인입니다. 저는 어떤 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한 셈입니다. 당대에 그렇게 의롭다고 칭송받던, 그래서 후대 신학자들이 그가 죄 때문에 벌 받은 것이 아니라고 오해하게끔 만들었던 그 욥이 말입니다.
해명의 기회조차 상실된 기독교
조 목사님의 발언이 함의하는 내용 자체는 기독교 원리로 따져 틀린 것은 없습니다. 부분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긴 해도 말입니다. 욥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비평도 나올 만합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욥기를 더 깊이 읽으면 조 목사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반발을 한 것은 그분의 말씀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불신자나 타종교인은 아무리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예수를 믿지 않기에 지옥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놓고 지옥 간다고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가 단지 국가적인 공인이기에 그렇게 포장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운영자님도 분명히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역시 조용기 목사님이 그렇게 말을 했다면 거의 유사한 반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이든, 경고이든, 눈물이든 그 어떠한 것도 우리는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천국 가서 한번 여쭤볼 수밖에요."
상기에 인용한 김성진님의 댓글도 정확하고 온당합니다. 조목사님의 사회적 위상 때문에 어떤 표현을 했든 간에, 저처럼 하나님의 눈물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벌 준 것으로 해석되기에 세간의 비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조 목사님과 같은 말이 된다는 것도 사실은 이미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조 목사님은 당신의 그런 위치 때문에라도 조금 더 신중한 표현법을 사용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무리 신중해도 또 다른 반발은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입시에 떨어진 이웃집 아이의 비유를 들면서 자기 아들은 야단쳐도 된다고 했고 또 요나의 잘못에 비춘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수록 한국교회와 교인들더러 더욱 겸손히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기에 일본을 돕는 일에 신자들부터 앞장서자"라고 말했다면 그 후의 상황전개는 지금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로서도 조목사님의 그런 발언이 없었다면 칼럼의 내용을 요나의 회개에만 초점을 맞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에 그런 발언이 나와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으니, 원칙적인 면에선 옳은 말이지만, 일본과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잘못된 방식이었다는 경종은 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한국 교회가 교인들을 어떻게 오도하고 있습니까? 일본의 방사능이 한국에 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바람이 동쪽으로만 불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미국 서해안에 있는 이민 교회들은 또 미국을 방사능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또 바람이 서쪽으로 불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왕이면 바람이 일본에서 맴돌아 일본사람만 죽게 해달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대체 어느 쪽 기도를 들어주어야 합니까? 더 뜨겁고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이 기도한 쪽을 응답해주어야 합니까? 물론 바람이 북쪽이나 남쪽으로 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사람이 사는 곳은 있게 마련입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니 나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꼴입니다.
약간은 극단적 예이긴 하지만 한국 교회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실제로 이와 비슷하고 또 그런 내용을 외부에서 누가 봐도 빤히 알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외부에서 조목사님의 발언의 진의를 알아보거나 들어볼 생각도 않고 무조건 개독교란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작금 세상은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게 되었고, 기독교는 해명의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경고, 눈물은 같은 것이다.
"지구 반대편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로 사투 중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도 내려놓기가 힘이 듭니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 적합하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다는 것에 한계가 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쌀로별님의 참으로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런 엄청난 재앙 앞에서, 어쩌면 종말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과연 이런 때에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제대로 감조차 잡히지 않는 우리 모두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선 김성진님의 말씀부터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이든, 경고이든, 눈물이든 그 어떠한 것도 우리는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천국 가서 한번 여쭤볼 수밖에요."
자연적 재앙이나 개인적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선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령한 자라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 이유는 누차 말씀드린 대로 죄마다 일일이 벌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경우 같이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경우는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거나 그분이 징벌하시는 원리까지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십자가 복음과 연계시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현실 사건과 상황에 일일이 적용해서 하나님의 징계, 경고, 눈물 중에 무엇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 가서야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오히려 구체적인 의미는 알려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욥기가 말하는 바입니다. 또 다시 이 부분에서 주의할 것은 신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 것도 아닌 양 무심하게 넘기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성경에 비추어 기도하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각성과 회개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징계가 바로 그분의 경고이자 눈물입니다. 이 셋을 구분해서 이해, 적용할 이유가 사실상 없습니다. 비유컨대 잘못한 자식을 초달할 때에, 분명히 그 안에는 아비의 징계와 경고와 눈물의 뜻이 다 포함된 것이지 않습니까? 또 그 전체를 아우르는 자식을 향한 아비의 본심도 재앙이 아닌 구원 즉, 사랑입니다.
반면에 그 징계를 실제로 당하는 자의 입장에선 어느 한 쪽을 더 강하게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때로는 한 쪽이 더 강조되어지는 모습으로 벌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을 두고 셋 중에 하나가 더 강조되었다고 정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징계, 경고, 눈물은 사실상 동일한 하나의 벌에 포함되는 세 가지 측면일 뿐 아니라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로 발전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재앙과 개인적 환난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벌이라고 보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대외적으로 꼭 그런 뜻을 표명해야 한다면 가장 긍정적 표현인 그분의 눈물 내지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를 구분하라.
신자가 정작 주목해야할 구분은 심판과 징계의 관계입니다. 심판은 영원한 운명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징계는 이 땅에서 사람의 생명이 붙어 있는 중에 받는 벌입니다. 다른 말로 심판에는 "영원한", 징계에는 "일시적"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가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였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불신자가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이미 영원한 심판은 면제되고 이 땅에서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확보한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닥치는 죽음 외의 환난과 재앙은 여전히 회개에의 촉구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징계입니다.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이미 믿은 신자로선 구원 여부는 전혀 걱정할 것 없으니 더 거룩해지고 더 주님께 순종하라는, 다른 말로 훈련과 교육의 의미입니다. 바꿔 말해 징계란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쓰나미에도 이런 세부적 구분 없이 "우상숭배 때문에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단순히 말하니 교회 안팎에서 온갖 잡음과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천벌이 심판과 징계를 다 포함해버렸습니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리 지금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 가운데 있기에 이런 징계를 통해서라도 구원으로 초대 받고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수만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그 가운데 누가 구원 받고 심판 받았는지는 정말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이 숫자적으로 아주 적어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모두는 이미 영원한 피안으로 옮겨졌기에 아직 살아있는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겐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이미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이 좌우는커녕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적으로도 고려할 세부적인 사항들이 있음에도 한마디로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일본인 전체가 영원한 심판 받은 것처럼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로선 마치 자기들은 지옥의 벌을 받아 마땅하며, 기독교인들은 천국의 상을 받을 자격이 넘치는 것 같은 너무나 큰 교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오해를 예방하고자 일일이 구분해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기독교 신학강의가 되어버립니다. 또 그런다고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징계이더라도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종교적 판단을 내려선 안 되며 진정어린 위로와 도움만 전해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그것만 절실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나중에 그들에게 전도할 때에 그 마음 문을 쉽게 열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의 구분을 정확히 하라는 것은 신자에겐 이 땅에선 더 이상 심판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없습니다. 비록 징계는 있을지언정, 그것도 사랑의 매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내일 심판이 이른다면 모든 일을 뒷전으로 한 채 전도부터 해야겠지만 문제는 당장 내일 심판이 이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깨어서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일과 처하게 한 그 환경에서 작은 일과 작은 자에게 충성하면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부터 열심히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되었던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만 드러내면 됩니다. 신자답게 살면서 자신의 바뀐 존재와 삶의 모습으로, 또 기회가 닿는 대로 말로서 복음을 증거하면 됩니다.
이번의 재앙의 규모가 엄청나도 아직은 종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의 크기는 이번 재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합니다. 종말은 배도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환난을 겪은 후에 마귀를 결박하여 영원히 심판하러 예수님이 오셔야만 이뤄집니다.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도 마지막 때가 아니라 그 징조일 뿐입니다.
이런 때에 세상 사람은 불안에 떨어도 신자는 결코 흔들려선 안 됩니다. 또 종말이 막상 오늘 닥쳐도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자는 벌써 심판에서 완전히 면제되었고 영원한 영광으로 구원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보다 더한 쓰나미가 닥쳐도 일상적인 여건에서 감사, 기쁨, 의미가 더 넘치는 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하면서 불신자들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3/17/2011
범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한다고 해서
혹시라도 모든 환난과 재앙이 마치 하나님의 책임인양 탓하면 안 됩니다.
징계란 경고와 눈물이 담긴 사랑이므로 오히려 우리를 잘 되게 하려는 것이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해서 부모에게 야단맞으면서 부모 탓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더라도
인간에게 100% 책임이 돌아가는 환난이나 재앙도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관리를 못했다, 사업 계획에 정보 부족과 욕심이 앞서 망했다,
이번에도 일본 정부와 도꾜전력이 돈을 아끼고 자존심 세우려다
원전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운 것 등은 순전히 100% 인재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묵인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접적 징벌로 직접적 경계의 뜻이 아니라
간접적 징벌로 간접적 경계의 뜻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전에 인간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높은 지성으로 인해
인간은 믿음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잘못인줄 깨닫게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겸손해지고 감사해야 함에도
인간은 자기가 잘난 줄 착각하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더러 무조건 모든 환난을, 즉 인간이 100% 잘못한 일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대신에 모든 일을, 특별히 힘들고 어수선한 일일수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더욱 겸손해지며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가며
불신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