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아기 예수가 구유에서 나신 계절이 돌아 오면 기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성탄절이 기독교 믿음과는 상관 없이 사람들이 서로 선물을 나누고 안부를 묻는 세상적 명절이 된 것 같아서다. 심지어 지난 한해 동안 큰 화액 없이 무사(無事)히 지낸 것에 대해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감사하는 날이 되었다. 아기 예수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망각하거나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근의 보도에 나타난 몇 가지 사건만 보아도 올해 또한 그 예외가 아니다.
사건 1: AFP 통신에 따르면 전 세계 성탄 용품의 2/3가 비기독교 국가인 중국에서 그것도 대부분이 불교 신자의 손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물론 성탄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 싼타크로스, 아이들 선물에 관련된 용품이 대부분이라 누가 만들어도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물건들을 보면 크리스마스부터 먼저 떠 올리기에 이왕이면 기독교 신자가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된 용품을 많이 개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결국 성탄 용품이 성탄 자체를 기념하고 상징하는 물품이 아니라 명절 용품으로 둔갑한지가 벌써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사건 2: 이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이 아니라 현대 로마에 때 아닌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타났다. 22일 교황청에서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을 알현한 푸에르토리코 대표단이 동방박사로 분장하여 교황에게 선물을 증정한 것이다. 그분의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업적과 또 카토릭의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하신 역할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미는 전혀 없다. 또 고령에 파킨슨 병으로 투병 중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에게 카토릭 신자가 존경과 호의의 표시로 선물을 증정한다고 해서 나쁠 것 또한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비신자나 심지어 기독교신자마저 여전히 죄인인 인간에 불과한 교황에다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바로 그분의 죄까지도 구원하시러 오신 메시야 예수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키지 않을까 여간 염려스럽지 않다.
사건 3: 한국의 유수한 일간지 J 일보에 송년특집 ‘2004 한국 사회를 말한다’ 시리즈 첫 순서로 카토릭 L 수녀와 불교 조계종의 H 스님의 대담을 실었다. 두 분다 감동적인 글을 많이 발표하고 또 자기 신앙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여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분들이다. 그 대담에서도 여전히 유익한 말씀들을 많이 나누었다. 또 ‘더 많이 용서하면 365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한 기사의 제목에도 불만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라고 합의를 봤다고 쓴 기사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고 종교 간에도 서로 관용으로 대하라고 한다.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너무나 맞는 말이다. 위에 예를 든 세 사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등 문제 될 것도 없고 오히려 문제 삼는 자가 더 이상한 사람이 되기 쉽다. 기독교 신자는 더욱 타 종교인과 불신자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어야 하고, 연로 한 교황은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며, 불쌍한 이웃들은 크리스마스만 아니라 일년 365일 구제하고 적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첫째 이유가 인간끼리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죄인인 인간더러 가장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잘 아는 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대답하셨다.(마22:35-40)
특별히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이 첫째와 같다고 한다. 예수님도 분명히 이웃 사랑의 계명은 그 내용과 의미와 중요성에 있어서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같다고 하셨다. 요한 사도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라고 말한 대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이웃도 사랑하게 되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 계명이라도 예수님은 그 순서마저 부정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강조하셨다. 순서란 동일한 조건에서만 아주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서로 차이가 나는 조건에선 이미 그 조건 자체로 순서가 자연히 결정된다. 그러나 동일한 두 가지 조건에선 순서 자체가 그 의미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와 동일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자가 하는 사랑은 자칫 좀더 여유 있는 자의 자기 자랑에 흐를 수 있다. 죄인과 원수의 허물을 사해주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버리는 아가페적인 사랑만이 참 다운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도저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용서를 가장 먼저 받아야 한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은 그 실천되는 과정과 결과적인 모습에선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끼리의 사랑만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받아 들여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자가 사랑이 자기의 삶(Life Style)이 되어 있느냐는 그 순서가 전혀 다르다. 즉 동일한 조건 하에서는 순서가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그 다른 점을 기독교가 나서서 차별화 시킬 필요까지는 없어도 신자라면 정확하게 인식은 하고 있고 실제로 말 없이 실천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한 그 사랑이 배제되면 이 세상의 어떤 선하고 위대한 일도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탄을 기념하는 일에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머리에 재를 쓰고 옷을 찢으며 성전에서 지난 한 해 하나님을 멀리한 죄로부터 윤리적인 죄까지 회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 매해 반복되는 행사는 잠시 접어두고 주님을 모르는 세상의 미혹된 영혼들을 위해 정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오심을 성도간에 기념하고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웃끼리 선물을 나누고 불쌍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 한 해 그런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를 늦게나마 회개한다는 뜻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더 늦지 않게 신자만이라도 성탄절에 인간끼리 사랑 하는 것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총에만 모든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크리스마스를 연례적인 명절로 세상사람에게, 인간과 종교끼리 화목 하는 날로 타 종교인들에게 빼앗겨선 안 되지 않겠는가? 이제야말로 성탄절을 선물가게의 아이들로부터 되 찾아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에게 돌려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