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어(俗語) “Jesus Christ!"의 유래
타이거우즈는 골프 시합 중에 플레이가 뜻대로 안 되면 "Jesus Christ!"라는 탄식을 자주 내뱉는다. 섹스 스캔들이 터진 후의 첫 시합에서도 예의 버릇이 나왔다. 그러자 한 아나운서가 “우즈는 아마 (혼외정사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했던 것 같다”고 농담조로 비아냥거렸고 몇몇 식자(識者)들의 비난을 샀다.
반면에 일반 대중들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만큼 그 말은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사람에게는 예상치 않은 흉사를 당하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올 정도의 상투적 속어가 되었다. 물론 좋은 일에도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나쁜 일에 더 그렇다. 한국말로 치면 “어이쿠” “에이!” “썅!” 같은, 물론 더 심한 저주도 포함해서, 뉘앙스를 지닌다.
기독교 신자에겐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며, 그 이름으로 기도를 마쳐야만 하는 큰 권세를 지닌 이름이 과연 언제 어떻게 이런 저주의 탄식이 되었을까? 구체적인 경과는 영어 학자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어쨌든 성경은 그분의 수제자 베드로가 이천년 전 빌라도의 법정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26:74) 아마도 그가 스승을 대놓고 저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녀가 하도 끈질기게 추궁하니까 그녀에게 화 내지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 또 틀림없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연약하고 비겁한 자신에게 분노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말로 “에이 썅! 나는 그 사람 죽어도 모른다니까! 만약 거짓말이면 내 성(姓)을 갈아도 좋아!”라는 정도의 말을 했을 것이다. 영어로 치면 "Jesus Christ! I have never heard him before. I can swear in the name of Jehovah!"(예수 그리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그런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어!) 정도였을 것이다. 생면부지의 이름이라고 맨 먼저 강조하면서 말이다. 순전히 필자의 추측이긴 해도 개연성은 충분하지 않는가?
현명한 독자라면 후대 사람들이 베드로를 흉내 내는 바람에 그 속어가 생겼다는 뜻이 아님을 눈치 챘을 것이다. 기독교 국가였던 영어권 사람들은 옛날부터 예상치 못한 흉사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 왜 이런 환난을 주십니까?” 탄식했을 것이다. 또 환난이 빨리 해결되지 않아도 “예수님! 왜 저의 기도를 외면하십니까?” 원망을 표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힘든 일에만 예수님을 부르다보니까 마치 그분 이름이 흉사를 대변 내지 초래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십계명의 셋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한다. 구약성경의 총 23,213 구절에 하나님의 이름은 총 5,343번 언급되고 있다. 한 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도 많지만 단순 계산으로는 1/4이 넘는 숫자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이름을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정말 순전한 경외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성경을 복사하는 필사자들도 그 이름이 나오면 옷깃을 여미며 붓을 다시 빨아서 쓸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신자는, 아니 불신자들마저 하나님의 이름 자체는 두려워서라도 쉽사리 망령되이 일컫지 못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셋째 가는 계명으로 명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위에서 말한 탄식하는 의미의 속어로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불신자들이 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제 멋대로 하는 기분파, 특별히 신경질을 잘 내는 하나님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성행하고 자신에게도 뜻밖의 흉사가 자꾸 생기도록 방치하는 하나님이라면 절대 안 믿겠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착각과 고집이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신자라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세상 환난은 일차적으로 죄에 찌든 인간들의 책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했다 하더라도 오직 신자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해서다. 나아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당신만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가 예상치 못한 환난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 환난을 하루 빨리 제거할 책임도 그분께 있다고 우긴다. 마찬가지로 이런 착각과 고집이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셈이다.
예상치 못한 흉사에 대한 불평이란 따지고 보면 현재까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원망하는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선으로 바꾸어 주리라는 믿음이 전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반증이다. 현재의 환난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과 때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우기는 습관이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 삶에 모든 것을 건 신앙이다.
그럼 훈련부족과 자기 실수는 문제 삼지 않고 단지 그 작은 골프공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과 거리대로 날아가야만 한다고 우기는 타이거우즈와 하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아니 당신과 아무 관계없는 그가 그런 속어를 하든 말든 사실 하나님이 문제 삼을 리도 없다.
우즈는 단순히 입에 붙은 일종의 감탄사로만 사용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고 우긴다. 우즈는 비록 속어로 예수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부려먹으려 하지는 않았다. 신자는 비록 겉으로 그분의 이름을 아주 경건하게 부르지만 속으로는 그분을 자기 종으로 삼으려 한다. 누가 더 제 삼 계명을 어기고 있는가?
구약성경 구절의 1/4 이상에 하나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자주 부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환난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 이름 다음으로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당신께서 너희와 함께 하기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과 동행 보호하심이 가장 많았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분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겪은 환난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 하나님이 그만큼 자기 백성들과 친밀하고도 아름답고 진실한 교제를 맺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셨다는 뜻이다. 또 그런 교제에는 관심도 없고 자꾸만 현실의 형통과 안일을 위해서 우상 앞으로 달려가는 자기 백성을 보고 목이 터지라고 안타까이 외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신자와의 거룩한 교제를, 신자는 그분께 현실의 형통만 원한다면 처음부터 그 관계는 비끗거릴 수밖에 없다. 아니 서로가 걸어가는 방향이 달라 아예 동행도 되지 않는다. 또 바로 그것이 작금 신자마저 “Jesus Christ"라는 이름을 내용적으로는 비속어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8/17/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