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암으로 고생하시는 M집사님을 지난 수요일부터 매일 새벽 집으로 찾아가 예배를 보고 있다. 예배 드릴 때도 침대에 누워 모기가 기어들어가는 듯 겨우 찬양을 몇 마디 따라 부를 정도지만 인생 여정의 마지막 길을 주님과 함께 하기를 사모하셔서 갈 때마다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신다. 저 또한 수술 후유증으로 먹고 마시는 데 평생을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분의 현재 겪고 있는 극심한 통증과 얼마 안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할 수 밖에 없는 비통한 마음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정작 감사했던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유타에서 L. A.로 이주하기로 한 후에 그 곳의 한 집사님이 저더러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묻길래 “나도 1001번째의 목사가 되어야겠지요”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던 적이 있다. L. A.에는 교회도 많지만 교역자가 교회 수에 비해 너무 많아 정작 목회 사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목사가 1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또 한 사람의 목사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아직은 몇 가정 되지 않지만 정말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셨다. 또 비록 60-70 명 겨우 들어갈만한 소 예배당이지만 미국 교회를 빌려 교회를 시작할 수 있게 하셨다. 어느 정도 번듯한 위치에 제대로 갖춘 미국교회에는 모두 한국교회가 세 들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빌려주지 않거나 턱없이 비싼 렌트비를 요구하는 것이 이곳의 실정이다. 그 와중에 적지만 아름다운 예배당을 빌려 목회를 시작했으니 어느 노 목사님의 말씀대로 기적이자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이다. 거기다 새벽마다 저희의 심방을 기다리는 한 가정이 있으니 1001번째의 목사가 될 뻔했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리의 감사가 현실이 풍족할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으면 아마 감사보다는 심심하다는 불평부터 먼저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간 자기들이 수고 하나 하지 않았음에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주리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직 불평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다른 이유가 없다. 심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주님께 구하고 있는 것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저 먹고 마실 것에 주리지 않게만 해달라고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지금은 덜 심심한데 더 심심하게 해 달라는 꼴이다. 심심하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 재미가 없으며 자기가 서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뜻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확실한 자는 도무지 불평할 여유가 없고 심심할 까닭이 없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22:13)
11/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