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최고 인기 드라마 대장금이 종영되자 심심해 못살겠다, 빨리 속편을 만들어라, 너무 허전하다 등 난리가 났다. 어제 미국 NBC TV의 10년간 최고 인기 시트콤 ‘프렌즈(Friends)’가 끝나자 심지어 한 언론에선 ‘국가적 애도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상실감이 큰 것 같다. 한 아파트에 사는 6명의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한 삶을 가볍게 그린 내용에 대해 그렇게까지 열광하는 충분한 까닭이 있었다.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늘 뭉쳐서 서로 보살펴 준다는 따스한 설정이 가족해체시대에 사는 미국인들의 불안감을 매워 주는 심리적 위안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손 가정이 늘고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는 끊기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듯이 개인의 자유를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이 이 시대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윤리관이다. 개인 주의란 면에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내용도 많았었다. 그럼에도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에 금이 갈만한 사건이 생기면 그들은 친구를 먼저 택했다. 우정이 얼마든지 개인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스토리 전개상의 재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시청자가 주인공에 자신을 투사(投射)해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대장금과 미국의 프렌즈 둘 다 이 시대에 도저히 찾기 힘들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믿는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한 마디로 이웃을 향한 참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자다. 그 사랑은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다. 프렌즈의 주제가 가사처럼 “네가 힘들 때에 바로 그곳에 내가 함께 있어 주면”된다.
프렌즈의 퇴장이 심지어 클린턴 시대의 낙관주의도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 분석될 만큼 세상은 갈수록 더욱 메마르고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 사랑은 더 절실해지는데 사랑할 여건은 더 안 된다. 프렌즈의 종영은 국가적 애도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조차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일한 희망은 있다. 사람끼리는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같이 있어줄 친구를 둘 수 없지만 우리의 친구 되시는 주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같은 성도나 불신자가 힘들어 할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하면 이 국가적 위기는 절대 끝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5/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