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르 2세의 사후에도 그 분의 생전 업적에 대한 평가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 반드시 한 번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각 종교간의 화해를 주선하고 실천했다(ecumenism)는 부분인 것 같다. 때 마침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David Scott이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한 교황(The Pope we never knew)”이라는 제목으로 그분의 개신교와 협력한 일화를 Christianity Today 5월 호에 게재했다. 그 주요 내용을 간단하게 발췌해 소개하면 이렇다.
빌리 그래함 선교회가 1977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 공산권의 선교 대회를 개최할 때에 개신교가 인구의 1%도 안 되는 완전 카토릭 국가인 폴란드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그 집회 신청이 처음에는 거절되었지만 당시의 폴란드 Wojtyla(후에 바오르 2세 교황) 추기경이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빌리 그래함의 교황에 대한 호의어린 추모와 심지어 그 분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아마 이 때부터 발단되었는가 보다.)
그 기사가 중점적으로 다룬 사건은 교황이 폴란드 내의 Oasis라는 카토릭 청년 부흥 운동이 미국의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와 협력하도록 허락해 준 것이다. 폴란드 출신 미국인 Joe Losiak이 CCC 창시자 Bill Bright 총재의 “학생 신분으로 외국 대학교에 가서 선교를 하라”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고는 1975년 조국으로 돌아가 바로 이 Oasis의 여름 캠프에 참가 했다. 그는 또 이듬해에 CCC의 동구권 책임자의 정식 허락을 받아 동료 10명과 함께 적극 동참했다.
그런데 이때 CCC의 팀 사역과 체계적인 훈련코스에 감동을 받은 Oasis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초보적인 수련회 프로그램의 개정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CCC의 제자훈련 교재인 ‘Ten Basic Steps Toward Christian Maturity’에 기초한 폴란드 카토릭 Oasis판 10단계 기초제자훈련 교재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연히 Oasis 지도자들은 자기들 카토릭 교단 고위층의 반대를 걱정했지만 이 때도 Wojtyla 추기경이 그 교본의 채택을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헌신 같은 카토릭 내용도 포함된 신구교 합작품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78년에는 Oasis의 설립자인 Blachnicki 신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CCC본부 Bright 총재를 방문하게 되었고, Bright 총재는 신부에게 ‘성처녀 마리아’,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 논란 많은 카토릭 교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총재는 “몇 가지 미세한 부분(a few fine points)” 부분만 제외하고 그가 믿는 것과 내가 믿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라고 말하고, 급기야 1994년에는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ECT)”에 서명한 40명의 신구 교계 지도자 중의 하나가 된다.
Oasis의 새 훈련 교본이 1977년 폴란드 교계의 지도층들 사이에서 카토릭 교회에 대한 “침례교의 浸潤(Baptist Infiltration)”이라고 반대가 거세어졌을 때도 Wojtyla 추기경이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교황으로 선출 된 후에도 Oasis를 적극 후원해 주었고 심지어 1990년에는 바티칸에서 개최해주고 직접 참여도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바오르 2세의 신구교 연합을 위해 애쓴 노력에 아무 하자가 없어 보이고 이 기사의 제목대로 정말 우리가 미처 몰랐던 교황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쓴 Scott의 마무리 언급을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폴란드의 자기 교구 내에선 신교와 협력하도록 허락한 바로 그분이 남미에서 활동중인 개신교 선교사들을 두고는 “탐욕스런 이리떼(rapacious wolves)”라고 욕을 한 동일인인데, Ecumenism이란 이중적인 애매모호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바오르 교황은 카토릭 교회가 독점적인 지위를 향유하는 폴란드에선 외국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활동이 아무런 문화적 위협을 주지 못하고 그래서 개신교 활동을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조력자로 적극 환영한 반면에, 남미에선 기존 구교 신자들을 복음화 시키려는 경쟁자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예리한 분석은 참으로 맞다. 종교간의 관용, 신구교 연합, 세계 교회화 운동 어떤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과연 그 운동이 타당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타 종교를 경쟁자로 의식하지 않고 그들도 동일한 십자가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죄인으로 보아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나 종교인 간의 화해를 주장하기에 앞서 죄인 된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먼저 화목 시켜야 한다.
바오르 교황은 카토릭 교세가 침범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종교와 화해를 시도했지 다른 종교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초대한 적이 없다. 역으로 생각해 보라. 만약 천주교 사제가 (그 실제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자기들 교세 확장과는 상관 없이 타종교인들을 십자가 복음으로만 초대한다면 개신교인들이 그들을 탐욕스런 이리떼라고 욕하겠는가, 주 안에서 진정한 동역자로 협력하겠는가? 물론 후자다. 개신교인들의 선교 활동은 개신교 자체의 교세 확장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땅에 주님의 복음 아래 무릎 꿇은 백성들이 모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둔다.
흔히들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어떤 형태로든 서로 협력만 하면 종교계의 연합이 이뤄지고 당장에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기대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구교의 활동이 신교보다 훨씬 선하고 우월해 보이는 것으로 오해하며 개신교는 완고한 배타주의자로 매도 당한다. 최근에는 개신교 지도자마저 이런 조류에 편승하는 형편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인간 구원의 진리는 오직 골고다의 십자가 하나다. 이 진리에선 절대 타협을 해선 안 된다. 반면에 진리 안에 들어 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선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 진리에선 절대적 배타성을, 진리를 수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 관용성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둘의 순서를 혼동하거나 하나로 합쳐서 생각해선 안 된다.
타 종교인들은 진리는 여럿이기에 사람들도 그 여러 진리 안으로 나눈다. 그래서 반드시 종교마다 특유의 교세라는 영역이 생기게 마련이다. 종교 간에 화해 협력하자는 말은 그 나눠진 고유 영역을 서로 존중해주자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바오르 교황이 그랬듯이 각 종교의 교세를 상호 침범 간섭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기 울타리 지키기 싸움으로 이야말로 본질적인 배타주의다. 그들은 진리에선 절대적 관용성을, 진리를 수용할 사람들에게는 절대적 배타성을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자기들이 관용적이라고 자랑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른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지 로마 당시에 그 수많았던 우상 숭배 종교인들 심지어 자기 민족의 유대교 지도자와도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다. 당신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선포하신 그 절대적 진리를 실제로도 그대로 실천했다. 개신교 지도자는 바로 이 예수님의 선포를 그대로 세상에 선포하고 또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자여야 한다. 진정한 예큐메니칼 운동이란 기독교라는 종교를 떠나 모든 죄인을 십자가 진리 아래로 불러 모아 그분의 피로 죄를 씻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오르 2세 교황의 교계 화해 운동은 그분 나름대로의 논리대로라면 틀린 것은 전혀 없다. 이미 카토릭에선 타 종교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구태여 한 진리 아래로 모이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최근의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다. 만약 바오르 교황의 종교간 화해 운동이 맞고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개신교 목사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선포해야 한다. 애매모호한 이중적 성격의 Ecumenism은 성경에는 원래부터 존재 하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성경 진리를 왜곡하고 구원의 길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 생각할 때만 그럴듯해 보일 뿐이다.
5/4/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