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깊어질수록...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7,38)
많은 신자들이 믿음에 관해 크게 오해하는 측면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이 좋아지면 순종도 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하지만, 그보다는 순종을 해야만 믿음이 좋아지는 법입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순종도 잘하고, 또 역으로 순종을 잘하는 사람도 믿음이 좋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아져서 순종을 이끌기보다는 순종이 믿음을 키우는 효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상대를 온전히 믿기에 그 뜻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관계에서만 해당됩니다. 상대를 믿지 않고 의심하면서 요구대로 응해줄 리는 만무합니다. 또 인간끼리는 상대를 잘 알거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상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분의 자신을 향한 구체적인 계획을 잘 모릅니다. 심지어 기도를 아무리 해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항상 겪는 딜레마는 그분이 지금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때로는 도대체 이해도 안 되며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일으키려는 듯이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하나님 그분은 믿지만 그분이 지금 하시려는 일에 대해선 믿음이 선뜻 생기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니까 믿음이 생길 여지도 사실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자가 선택할 방안은 논리적으로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분이 하는 일도 믿든지, 지금 일어나는 일을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하나님도 안 믿어야 합니다. 물론 그 정답은 전자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으면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는 너무나 간단한 원리인데도 자꾸만 이런 가장 기본적인 믿음조차 약해지거나 실종되는 까닭은 우리가 너무 눈에 보이는 영역에만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도 자꾸 먹고 마시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킵니다. 아니 그 전에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줄기차게 추구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간단한 원리가, 정말 낫을 보면 기억 자를 아는 것 같은, 있습니다. 눈에 보여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을 믿지 못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런 일에는 믿음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본질 자체가 볼 수 없어서 잘 믿기지 않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믿기지 않는 일을 일단 믿고 보면 즉, 순종부터 하면 없거나 약했던 믿음이 생긴다는 것 아닙니까? 순종이 (겉으로 믿음을 가장하거나 혹은 믿음을 키워보려는) 제사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우선 순종부터 하여 한 걸음이라도 믿음의 행보를 하면 도무지 믿지 않고는 안 될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과 은혜를 확실하고도 충만하게 맛보게 해주심으로써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더 나아가 약해지려야 약해질 수 없는 믿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본문의 마리아의 경우가 대표적 예입니다. 천사로부터 성령에 의해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는 고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도 안 되었고, 아니 꿈이나 상상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로선 처녀가 결혼 전에 즉, 약혼자 요셉과 성관계를 전혀 갖지 않고 임신하는 것은 바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습니다. 마리아가 그런 율법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녀가 믿음이 아주 대단해서 온전히 믿었기에 순종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자신의 믿음으로만 순종하겠다면 천사의 말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제가 주를 믿으니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자기가 순종하는 행동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표현입니다. 대신에 자기를 “주의 계집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종이란, 그것도 계집종이라면 주인이 시키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겸손히 낮추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일단 순종하고 보겠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그 전에 전해준 말이 무엇입니까?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단순히 수태 고지로 그치지 않고 태아의 성별이 아들이며 이름도 예수라고 정해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처녀 임신에 대한 극형을 면하고 어쨌든 무사하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웃음으로 대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도 출산 기한과 아들이라는 성별과 그 이름 이삭까지 정해준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물론 마리아가 여호와의 사자와 맞대면하고 있는 이 놀랍고도 황당한 초미의 와중에 거기까지 논리적인 사고가 미쳤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그 일에 대해 순응 즉, 거부하지 않는 자세는 보였습니다.
어쩌면 천사와 이야기하는 중에 복중에 성령이 임하는 징조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최소한 천사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성령의 권능 아래에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배와 소망이 자기 내면에 충만해지면서 자연히 순종의 태도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태로 응답한 것입니다. “제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이 큰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뜻이라면 저는 따를 뿐입니다. 이루시는 주체는 당연히 주인이며 또 그 모든 과정과 결과에 대한 보장과 책임도 주인에게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이 사태에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그냥 저를 주님 뜻대로 쓰시도록 내어드릴 뿐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차츰 배가 불러오면서 마리아의 심경은, 아니 그 믿음은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전 인류 역사를 통 털어서 어느 누구도 체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매일매일 조금씩 몸의 상태가 바뀌니까 즉, 배가 불러오는 만큼 믿음이 더 굳어졌을 것 아닙니까? 대체 이런 권능과 은총이 한 미천한 계집종에게 일어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실체가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지 않습니까? 마리아로선 이후로는 절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흔들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출생 후 할례 받으러 성전에 들렀을 때에 선지자 시므온이 아기 예수가 앞으로 “사람들의 비방의 표적이”되어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예언했어도 그녀는 담담하게 대했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처음부터 순종하여 믿음의 여종이 되었고 또 평생을 두고 그 믿음은 오직 순종으로만 나타났습니다. 죄에서 구원 받아 믿게 되는 일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이 선행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구원 후 신자의 믿음은 순종을 먹고 자랍니다. 존 비비어가 말한 대로 “순종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우리 믿음도 커집니다.” 당장 믿음을 키우기보다는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하십시오. 평생을 두고 믿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만한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분명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느 샌가 훌쩍 커진 자신의 믿음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29/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