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가 썩지 않는 신비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9,20)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물과 양식이 갈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일부러 고생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속히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출13:17)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또 광야에서 믿음을 성장시켜 가나안 성전에 임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물은 반석에서, 양식은 만나로, 고기는 메추라기로 당신께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더러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염려할 것 없는 대신에 그런 믿음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부터 수행하라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만나를 주신 첫주부터 그 믿음의 훈련에서 여지없이 실패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한 날에 거둔 만나를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다음날 만나가 내리지 않거나 적게 내리면 어쩌나 걱정한 것입니다.
이미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18절) 거둔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양을 거두었다기보다는 각 가정의 사람 숫자에 딱 맞아떨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각 가정에 필요한 양식의 양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건조한 광야에서 겨우 하루를 묵혔다고 당장 벌레가 생기고 썩어 냄새가 났습니다. 백성들더러 당신의 계명을 어겼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결코 자연 현상으로 인한 부패가 아니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를 거두어 안식일 분량을 하루 묵혔어도 전혀 썩지 않았지 않습니까?(24절) 벌레마저, 아니 부패를 유발하는 박테리아마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더 놀라운 사실은 만나를 오멜에 채워 대대 후손을 위해 간수했음에도 썩지 아니했습니다. 언약궤가 최신 냉동시설을 갖추었을 리 만무한 데도 말입니다.
만나의 신비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16:35) 사람이 정상적 방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무려 사십 년 간이나 먹여 살리셨습니다.
말하자면 그 기간 내내 만나를 욕심내어 다음날까지 두면 썩고, 안식일치 여분은 남겨도 썩지 않고, 언약궤 안의 만나는 40년이 넘도록 썩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결 같이 목도한 너무나 신기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이자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만나를 통해 하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수시로 터져 나오는 불평은 대체 어떤 연유입니까? 또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춘 것은 더더욱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생활이 싫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놀랍고 신기해도 동일한 날이 계속되면 짜증만 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보관하시는 방식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인간의 반응이 더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금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안락과 형통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에게까지 곧바로 터트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누린 자라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그러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은혜에 대한 불평도 당연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불평을 반복하여 궁극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 후손이 결국 도달한 자리는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이방에 완전히 망하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는 끊겼습니다. 이방 땅에서 날마다 지난날의 그분의 은혜를 회상하는 낙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 않습니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애3:17-20)
그런데 그의 탄식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선지자는 절망의 나락에 마냥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끝자락이 “낙심이 되오니”라는 진행형이 아니고 “되오나”라고 국면의 반전을 예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가 다른 이보다 믿음이 좋아 낙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서기로 굳건하게 결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21-22절) 여호와의 신실했던 이전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악했던 반응을 대조해서 곰곰이 회상해보았더니, 진멸당하지 않고 포로로 잡혀와 있는 것만도 그분의 너무나도 큰 자비와 긍휼임을 절감한 것입니다.
예컨대 광야에서 온갖 불평을 수시로 터트렸는데도 진멸당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아니 만나라도 중지시켰더라면 사람 살지 못하는 땅에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모든 배역에도 하나님은 사십 년을 갈하지도 주리지도 않게 먹여주셨지 않습니까? 오직 당신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왠지 먼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하나 나은 점이 있을까요? 더하면 더한 것 아닐까요? 최소한 그들을 비난할 계제는 전혀 아닌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다가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진멸을 면하게 된 것만도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의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되었고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간구하게 된 권세는 얼마나 큽니까?
그에 반해 나와 내 주위가 조금만 불편해도 당장에 불평을 뱉어내지 않습니까? 그분께 매일 만나를 공급받으면서도 불평을 끊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진멸되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새로운 날을 허락받은 아침마다 어제 행한 죄악과 내뱉은 불평을 당신께서 보고 들으시고도 진멸하지 않은 것에 무한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신자의 간구에 응답하여 만나를 하늘에서 내리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이미 거둔 만나를 하루 만에 벌레가 먹어 썩어서 냄새가 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궤와 항아리에 밀봉되어 광야의 그 뜨거운 기후를 겪어도 40년의 몇 배가 넘도록, 가나안 정복 후 한참 후까지 궤를 보관했으므로, 그것만 따로 구별하여 썩지 않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미 받았음에도 단지 불편하고 무료하다는 이유로 불평하면 당장 그 모든 것을 썩게 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새로운 날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감사와 경배를 그분께만 돌리면 영원토록 그분이 우리의 분깃이 될 것입니다.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결코 그분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15/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