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축도를 하고 있는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사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민6:23-26)
기독교 밖에선, 일부 교회 내에서도 그러하지만, 구약성경의 여호와는 백성이 잘못하면 벌만 주는 엄격한 하나님이라고 오해합니다. 심지어 이방인을 말살하는 잔인한 신이라고까지 비방합니다. 말하자면 구약에는 십자가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약의 곳곳에 복음이 보석같이 숨겨져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도 성경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용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뿐이지 직, 간접적으로 그 사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둘을 동시에 입증하는 좋은 예입니다. 삼위일체가 드러나면 예수님의 복음도 당연히 포함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특별한 계명을 주었습니다. 제사장으로 백성들을 위해 여호와께 복을 빌어 주라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오늘날 예배 마칠 때에 목사님들의 축도(祝禱)로 인용되는 고후13:13과 일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먼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사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는 성부 하나님에게 해당됩니다. 그분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당신의 사랑으로 운행 주도하십니다. 신자의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그 일생 동안 함께 하시어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는 성자 예수님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은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아무 자격과 공로 없이 오직 믿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린 신자에게 베푸시는 영생의 선물이 신자가 얻을 궁극적 은혜입니다.
셋째,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성령님의 몫입니다. 사람은 독생자 십자가의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선 결코 평강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죄인의 부패한 영혼을 새롭게 하여 그 은혜를 깨닫게 하고 또 복음 안에서 주님과 항상 교제 동행토록 해주시기에 신자는 어떤 일을 만나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축도의 차이는 두 가지뿐입니다. 먼저 구약의 하나님 명칭은 “여호와” 하나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신약은 예수님의 은혜가 성부 하나님보다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환난 없이 잘 지내는 것만이 인간이 받을 복의 전부도, 첫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에서 구원 받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참 인간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과 성령님의 명칭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복음과 삼위일체와 무관하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은 신약시대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택한 사람에게 성령으로 간섭하셔서 자신의 무능, 연약, 무지함은 물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겸손히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자만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성령이 특수한 사람과 장소와 시기에 일시적으로 간섭하셨다는 것뿐입니다.
결국 구약의 축도나 신약의 축도가 강조하는 요체는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모든 서신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성령님이 그 은혜 안에서 평강을 누리도록 해주시는 것만이 신자가 누릴 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이 은혜이고 또 그래서 평강을 얻는다고 단순히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신구약 시대 공(共)히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자에게만 그런 복을 허락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6,58)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본문을 신약시대에 적용하면 모세는 예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이며,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계시에 순종하여 신자들에게 축도해주어야 할 목사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목사는 가장 먼저 십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료하고도 정확하게 전해야 합니다. 죄인들의 죽을 영혼을 건져내어 주님의 은혜 안으로 인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물론 성령님이 이루지만 목사는 설교와 가르침과 섬김을 통해서, 단순히 축도 때에만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의 은혜가 살아 역사하는 데만 사역의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깨닫게 하고 그에 반한 인간 타락의 비참한 실상을 세밀히 가르쳐야 합니다. 성령님의 거룩한 간섭을 간구하여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구원 밖에 있는 불신자에겐 십자가 복음에로 초대하고. 신자에겐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십자가 은혜 안에 항상 거하게 해서 평강을 잃지 않도록 권면하고 빌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의 인사대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의 평강”만이 신자가 누릴 복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약시대 이후로는 만인이 이미 제사장 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구약시대에도 사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라도 신자라면 누구나 이런 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배의 공적 순서에 아무나 나와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끼리, 또 불신자를 향해서 본문의 내용대로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 미국교회가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예배 마칠 때에 성도끼리 축복해주는 순서를 가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담임목사 혼자 단상에서 거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축도를 하기보다는 성도끼리 두 사람씩 마주보게 해서 손을 잡고 이런 기도를 해주는 것이 더 은혜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여호와께서 복의 근원으로 삼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두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도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었던 자였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온전한 십자가 은혜 가운데서 평강을 누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비유컨대 병에 걸려 골골하는 의사에게는 아무도 진단 받으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은혜 안에서 어떤 일에서나 평강을 잃지 않는 신자라야 그 평강을 남에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위급하고 고통스런 환난에도 돌부처처럼 처연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도 중병이 들고 돈이 떨어지면 고통스럽고 세상의 박해에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평강은 현실의 안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는 확신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죽기까지 나를 택해 사랑해주신 십자가 은혜 안에 잠겨 있기에 평강한 것입니다.
신자의 바로 그런 평강함을 주위 성도는 물론 불신자들이 아무 말하지 않아도 쉽게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축도를 베풀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축도를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요?
8/10/2010
저도 목사님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그예다의 모든 식구들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