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첫째가는 권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8,9)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신자로 전도에 열중케 하는 역할만 하거나, 그것이 주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구약시대의 이적을 일으켰던 권능은 사라졌다고까지 오해합니다. 잘 봐주어서 방언, 신유 같은 외적 은사의 표출로 한정시키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보여 주는 매개체나 보조 수단이 절대 아닙니다. 신자 또한 하나님의 권능만 따로 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신자의 영에 직접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능은 신자 안에서 자연히 또 충만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성령은 천사나 수호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가 이적을 일으킬 때에 천사의 힘을 빌렸거나 그들을 통해야만 했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엘리사는 아람이 침공할 때에 불말과 불병거를 이스라엘을 돕는 종으로 산에 가득하게 동원했지 않습니까?(왕하6:17) 그 때도 여호와께 바로 기도했고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그에 응답하여 그런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것들은 이미 와있었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시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주고 아람 병사의 눈을 감기게 했을 뿐입니다.)
로마서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자를 위하여 간구한다(8:26)는 표현도 어디까지나 삼위 하나님이 성도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구절에 “대신”이라는 표현이 없고 “친히” 간구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중간 매개체도 없고 또 빌어야 할 대상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신자의 범사에, 영적으로는 더더욱, 간섭하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은 온전한 절대자 하나님으로 인격적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시대와 장소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달라지거나 없던 것이 새로이 추가될 리는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갖고 계신 권능(power)은 영원토록 동일할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첫째가는 권능이 무엇입니까? 그야 물론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세상의 주인 되심을 분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성령이 신자가 하나님께 더 쉽고 편하게 빨리 나아가도록 만드는 도우미나 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 그분이 신자를 통해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이뤄내는 궁극적 결과 또한 당신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통치가 범사에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보기는커녕 듣지도 못했던 출애굽과 홍해의 이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까닭도 상천하지에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보이려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세상의 주인이자 통치자는 삼위 하나님 외에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던 마지막 날 밤의 약속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당신과 모든 면에서, 당연히 권능도 포함하여, 동일하되 그 위격만 다른 하나님이 곧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님을 대신할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이 땅의 통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성령의 가장 큰 권능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자로 계셨을 때의 통치는 극히 제한되었습니다. 일부 이방인이 포함되었지만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상대하여, 갈릴리와 유대 땅이라는 한정된 지역 안에서,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뤄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어 성령을 천하 만민에게 부어주심으로써 비로소 그분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주인이자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다시 잘 살펴봅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받은 것은 성령과 그에 당연히 따라오는 권능입니다. 단순히 전도 잘하는 능력이나 은사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 권능을 받으면 증인이 “되리라”는 수동태 표현대로 자연히 전도자가 된다고 합니다. 나아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전하라는 것을 넘어서는 차원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는 모습으로 전도와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이 또한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가야만 한다는 지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내용입니다.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전혀 다른 곳에 가서 살더라도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아야 하고 또 그런 모습을 이방인들이 보고 확연히 알 수 있게 하라는, 아니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라는 유명한 바이오리니스트가 여행 중에 아주 훌륭한 바이올린을 발견했지만 마침 돈이 모자라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다시 그 가게로 찾아갔지만 이미 팔려나간 뒤였습니다. 그 주인을 찾아가 자기에게 팔라고 요구했지만 가장 아끼는 소장품인지라 팔 수 없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크라이슬러는 너무나 실망하여 떠나려다가 마지막으로 “이 악기가 침묵 속에 갇히기 전에 제가 한 번만 연주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허락을 받고 연주를 시작하자 주인은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악기를 소유할 권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흔쾌히 되팔았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여기서 명품 바이올린은 성령님입니다. 크라이슬러는 성령의 권능 즉, 신자를 거룩하게 통치하는 능력입니다. 그가 그 바이올린을 소유하고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변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신자를 거룩하게 통치하게 되면 주위 사람은 자연히 감동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절대 고이 모셔놓을 소장품이 아닙니다. 갈고 닦아서 실력을 쌓아야만 그 권능이 발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성령이 임하면 그 권능도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 교인이 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 무슨 일을 만나도 실제로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를 잘해야만 성령의 권능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라면 누구나 이미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권능 중에, 그것도 그 권능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의 극히 일부로 전도의 특별한 은사도 포함될 뿐입니다. 모든 은사의 가장 신령하고 첫째가는 기능도 바로 “예수를 주(主)라 시인케 하는 것”(고전12:3)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나에게 전도의 은사가 없으니 성령의 권능을 안 받았거나 모자란다는 생각, 또 지금 전도를 게을리 하고 있으니 성령의 권능이 약해졌나보다 여기는 추측, 혹은 전도를 열심히 하면 성령의 권능이 더 많이 임할 것이라는 기대, 나아가 성령의 권능을 더 많이 받아서 전도에 더 힘을 보태어야겠다는 열심, 모두가 틀린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신자에게 이미 온전히 내주해 있습니다. 신자가 받은 그분의 권능도 전혀 변화, 수정, 가감이 없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모르거나, 잊고 있거나,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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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1:15,16)
천사들도 예수님이 만드셨고 주관하고 계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엘리사에게나 신약의 신자에게나 예수님 바로 그분이 동일한 권능으로 함께 하시어 거룩하게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이 신자가 예수 믿어 천국 가게 되었다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 수는 있어도 권능은 아닙니다. 권능은 훨씬 더 풍성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우선 신자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배로 소유하고 있기에 어떤 일을 만나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또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무엇이든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권세를 이미 받았습니다. 사단의 농간과 시험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신자의 발아래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물(萬物)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바로 신자와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엡1:22,23)
신자에게 그 권능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는, 신자가 권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님, 까닭은 자신의 정욕과 죄, 또는 사단의 방해로 그분의 온전한 통치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성령의 권능은 신자가 무엇보다 오직 예수님을 온전한 주로 모실 때에 드러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서 예수님을 정말로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그분께 자신의 전부를 바치며 실제로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가난함을 애통해 하며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순전하고도 열정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깨트리고 부셔서 온전히 낮아진 모습으로 그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천하의 주관자께서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온전한 권능과 함께 반드시 우리를 살리시고 삶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아름답고도 의로운 당신의 통치 아래로 이끄십니다.
그것도 주위 사람이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실제로 받고 있는데 어찌 주위 사람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또 그 거룩한 통치의 권세와 은총을 맛본 자가 어찌 그것을 소장품으로만 숨겨둘 수가 있겠습니까? 나아가 삼위 하나님이 신자를 당신들의 성품에 참예케 하여 거룩하게 세우고 있는 중인데 주위에 선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성령의 권능이 구약 시대에는 이적으로, 신약 시대에는 전도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오직 죄인을 구원하려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당신의 큰 능력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계속 일으켜 달라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주님은 아예 도망 가버렸지 않습니까? 태초부터 영원토록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이 바로 그분의 권능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권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신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는 모습으로만 작동됩니다. 신자도 땅 끝까지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당당히 이겨내는 모습으로 당신을 증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8/11/2010
온전히 내 마음을 주장하도록, 통치하도록 내어 놓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