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많은 신자들이 에베소서를 간단히 교회론을 강론한 책이라고만 이해합니다. 이 짧은 서신에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35회나 나오듯이 사실은 기독론, 정확히 말해선 기독론에 바탕을 둔 교회론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져야만 할,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단지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여 예배, 말씀, 기도, 전도, 교제에 열심을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안”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 안”이라고는 장담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실제로 삶에서 현재 동행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예배, 말씀, 기도에 능해도 그분과 동행은커녕 교제도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분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따져 보십시오. 그분이 어떤 사람과 동행하겠습니까? 오직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시킨 일만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세상에 최종 목적을 두지 않고 천국 소망을 품고서 아무리 머리 둘 곳이 없어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협착한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며 따르는 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이 땅에 썩어 없어짐으로써 다른 이에게 그분의 생명을 나눠주는 자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 한 아무리 기도와 말씀에 능하고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아도, 설령 담임목사로 봉직해도 그분과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걸으신 삶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셨고 시키지 않은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자도 똑 같이 그래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제한된 신분과 자격으로선 그분의 탄생과 부활과 승천은 도무지 따라할 수 없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또한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사건으로 모든 세대의 어느 인간에게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신다면 순교까지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순교를 시키려는데 순교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순교시킬 리는 없지만 어쨌든 그 답은 그리스도 밖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어도,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간에, 그분 밖에 있을 확률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중 대부분은 솔직히 말해 요나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여 도망갔다고 그의 믿음을 조금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우리라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어떡하든 당장 도망치기 바빴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동 회교국 수도 한복판 광장에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은 것인데 과연 그대로 순종할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요나는 최소한 하나님의 공의만은 철저히 소망했었습니다. 그 명령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두려웠다면 다시스로 가는 배도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라면 아마 제발 그 명령을 취소시켜 주시고 다른 이를 보내 달라고 온갖 핑계를 대며 사정사정 했을 것입니다. 또 성격적으로 소심했던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으니 물에 빠트려 죽여 달라는 말도 못 꺼냈을 것 아닙니까? 흉흉한 바닷물에 과감히 몸을 던졌던 자입니다.
대신에 그는 일종의 거룩한 시기심으로 충만했었습니다. “악인이 벌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 그들이 더 형통합니까? 제발 그들을 심판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하나님과 시쳇말로 맞짱을 떴습니다. 제발 이 땅의 통치에 당신의 공의가 드러나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그것도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것입니다.
우리는 니느웨에 가라면 두려워서, 아니 귀찮아서라도 가지 않습니다. 대신에 새벽 기도에는 열심히 나옵니다. 그것도 자기 코가 석자인 문제만 안고서 말입니다. 과연 그러고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지적대로 이방인이 믿는 정도의 신앙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셔도 누구나 조금만 신심(信心)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했던 우리의 할머니들이 새벽마다 자식들의 형통을 위해 비셨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정도의 신앙을 심어주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교회(신자)가 가장 교회(신자)다운 모습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나머지 모두는 그분의 지체가 되는 모습입니다. 지체는 절대로 머리가 이끄는 대로만 따르는 법입니다. 지체가 멋대로 하거나 하지 않는 법은 루게릭병이나 중풍 같은 불치병에 걸려야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지체로 붙어 있기에 그분이 시키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길 리 없습니다. 저절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꺼이 죽으며 상대를 살리기 바쁩니다. 따로 교회론을 거창하고 심오하게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거듭나서,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 땅을 평생 살며, 그분의 십자가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에 분쟁은커녕 잡음 하나라도 나겠습니까?
물론 저부터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는 아직도 거리가 요원함을 자백합니다. 그러나 이 부족한 종이 현 세태의 온갖 양태를 접하면 접할수록, 동시에 개인적으로 나날이 산 체험을 통해 그분의 은총과 권능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길 말고는 인생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음을 철두철미 절감한다고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비록 제가 정답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정답은 단연코 이것이라고, 또 그래서 그 정답대로 살려고 무진장 노력하고 있다고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나아가 내 모습이 너무나 형편없을지라도, 예컨대 내 코가 석자인 문제로만 새벽에 울부짖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이 당신의 품 안으로 받아 주시기에 궁극적 승리를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진 모든 분들과 함께 경배와 감사와 찬양과 능력을 오직 주님께만 올려드립니다. 아멘!
9/14/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