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를 부끄러이 여기는 하나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8:23-25)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굳게 믿고 나아가 보호와 인도를 열심히 간구합니다. 또 그러면 하나님이 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갑자기 광풍을 만나 배에 물이 가득차서 죽게 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당연히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바람과 물을 잠재우며 그 간구에 응답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힐책했습니다. 제자들도 분명 우리처럼 구해달라고 간구했는데도 왜 이런 견책을 받았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바람과 물도 명하여 순종시킬 수 있는 줄 몰라서 그랬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아무리 스승이 일으키는 온갖 기적을 목도했어도 처음 일어나는 기적에 대해선 미처 모르고 또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첨단전자기기의 온갖 기능을 심지어 매뉴얼을 통해 익히 알고 있어도 막상 시행해보면 새삼 놀라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꾸중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제자들이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열심히 물을 퍼내고 있는데 쿨쿨 자고 있는 스승이 얄미워서 빨리 일어나 함께 도우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스승의 큰 능력으로는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라고 무의식중에라도 믿었을 것입니다.
또 그냥 주여 저희들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겸손히 말하면 되지 당장 죽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어 그랬을까요? 그것도 갈릴리 바다는 예수님보다 더 전문가인 어부들이 그랬으니 말입니다. 언뜻 이 이유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믿음이 반드시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만 띄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당장 죽게 되었을 때는 그 구원을 울부짖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설명이 사실은 본문 바로 앞 절에 나와 있습니다.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22절) 예수님은 분명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잠이 드셨고 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할 때까지 자고 계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계획은 호수 저편에 건너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광풍이 몰아쳐도 말입니다. 그래서 물이 넘쳐도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항해는 제자들이 계획해서 자기들 힘으로 노저어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여행이었고 제자들은 그저 편승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람과 물을 잔잔케 하는 일쯤은 예수님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삼위 하나님의 한분이시자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운행하시는 분인데 명하여 잠잠케 못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누워 떡먹기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이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정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당시 제자들은 몰라도 오늘날 신자들이 이런 성경기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됨으로써 교회야유회에 일기를 다스려 달라고 뜨겁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능력의 하나님은 너무 잘 믿어서 탈입니다. 바람이 약간만 세게 불어도 그저 잠재우라고 요구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지금 어부들조차 놀라자빠질 정도의 바람이라면 평소라면 전혀 있을 수 없는 바람입니다. 아무리 공기의 흐름이 항상 유동적이라 해도 배가 침몰할 정도의 바람은 아주 드뭅니다. 만약 일상적 바람이라면 스승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들이 뭔가 대책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초비상사태를 스승께 의탁할 정도의 믿음은 그들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선 그런 정도를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믿음은 구원을 얻고 난 후의 자기 일생은 예수님과 함께 가는 항해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그 일정을 제시한 여행길입니다.
그 여행길에는 어떤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을 때, 아니 전혀 예상치도 못했을 때에 배에 물이 넘쳐 금방 전복될 것 같은 광풍이 수시로 들이닥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의 다급한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마냥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어떤 광풍을 뚫고도 호수 저편까지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확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광풍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에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호수 저편은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에서 완성될 영광스런 구원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종국에는 그분의 자녀답게 변화되어서 그분과 얼굴을 맞대면 하며 세세토록 그분과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일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賞)도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의 위인들의 면면을 전부 살펴보십시오. 이 땅에서 형통하고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선 참으로 굴곡지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도착할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을 인내, 연단하고 천국을 소망했던 자들이었지 않습니까?
광풍은 그야말로 광풍일 뿐입니다. 잠시 잠깐 스쳐지나갑니다. 언젠가는 그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금방 죽게 된 것 같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님은 주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시키려 보낸 광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후4:17a & 히11:16a)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며 살 때에(히11:26),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실 것입니다.(히11:16b)
역으로 말해 신자에게 이런 믿음은 없고 당장 죽게 되었으니 살려내라고만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을 때에 부끄러워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믿기에 무슨 일이든 기도하는 것은 반쪽의 믿음, 아니 시작도 안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란 자신의 삶에 어떤 광풍이 불시에 또 자주 불어 닥쳐도 그 인생 항해 길을 예수님이 계획하셨을 뿐 아니라 직접 선장이 되어서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대신에 오히려 자기가 물이 넘치는 뱃전에서 누워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작금 내 편의만 보태려는 인스턴트 믿음은 성행하지만 절대적 주관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눈 닦고 보기, 또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은 더더욱, 힘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대를 얼마나 부끄러워하실지....
1/12/2011
아멘! 제게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다. 주님의 도전하심이 제 가슴을 울립니다.
목사님, 혹시 이 말씀 제게 주시려고 별도로 쓰신 건 아니겠지요?^^ 그날 1/9일 그 찻집에 앉자마자 나눈 저희의 대화 내용 기억하시지요?
어느 분의 “믿음은 동사이지 형용사가 아니다”라는 선언적 주장에 대해 제가 말을 꺼냈고, 저 같은 경우는 믿음이 깨달음, 나아가 ‘앎’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롬5:3-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의 앎이 믿음의 시발점으로 생각되고, 그러기에 믿음은 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적인 것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 그 일례로 왕하6장에 나오는 아람군대와 맞서는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엘리사는 분명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온 것이고, 그의 사환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있었다가, 실제 불병거의 실체를 나중에 본 이후에야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 아무리 믿으려고 해봐야 믿어지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면 되겠느냐? 따라서 깨달음(앎)이 선행되지 않고는 믿음이 생기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동사(행동)라는 것은 믿음의 열매(Output)이지, 본질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믿음은 오히려 형용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얼핏 저의 윗 주저리에 대한 해설서로 이 글을 쓰신 것 같은 생각이..ㅋㅋ
목사님의 글을 읽은 후 깨달음....
결국, 믿음은 동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닌 전치사(위치)인 것 아닐까요?^^
히11장에 표현된 대로, 나의 현 위치와 ‘본향’을 연결하는 전치사..
전치사(믿음)는 위치적으로 대상(나)의 앞에 놓여지게 되고요.
그것은 속성상 앞에서 방향을 제시해 주지요.
믿음은 전치사다!
믿음은 주님께서 내 앞에 놓아주신, 디딤돌로 된 돌다리다.
그 디딤돌은 약속의 말씀이다.
광풍이 몰아친다 한들 디딤돌이 없어지겠는가?
그 돌다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 나의 믿음의 길이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호수 저편’ 본향을 향하여..
밝은 빛이 제 머리와 가슴에 쫘악~~
허엄,,, 아무래도 올해의 깨달음으로 삼아야 할 듯..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