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인가? 요단인가?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지파에 한 사람씩 십이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3:11-13)
애굽의 400년 종살이에서 동족을 구출해낸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인솔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입니다. 이전에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았고, 성전(聖戰)을 개시하는 지금은 급류가 흐르는 요단강이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임자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맨 땅으로 그 백성을 걷게 했듯이, 후임자 여호수아도 강물을 가르고 맨 땅으로 백성을 건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께 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동일한 이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세워줄 뿐 아니라, 출애굽 때와 동일한 권세로 당신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단순히 지도자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의미를 지닌 기적이 반복되었다고 간주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을, 이왕이면 강보다 바다를 가른 홍해 같은 기적을 베풀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더 큰 권세를 소망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두 기적은 그 성격이 다릅니다. 거기다 홍해가 호수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해서 기적의 스케일이 출애굽 쪽이 더 컸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출애굽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만 의롭다 칭함을 얻는 구원의 첫 단계 칭의(稱義)를 상징합니다. 아무리 백성의 수효가 창성했어도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 앞에선 오합지졸이라 도무지 자기들 힘으로는 해방을 쟁취할 수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바로의 노예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 자격과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미 열어놓은 바닷길을 그냥 걸어서 건너면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정복은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스스로 싸워 이겨야 하는 싸움입니다. 구원의 둘째 단계 성화(聖化)를 뜻합니다. 반드시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요단의 급류에 먼저 발을 담가야 했습니다. 본문이 얼마나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이라고 합니다. 발을 살짝 담가보는 정도가 아니라 발바닥이 완전히 강바닥에 닿아 서야만 비로소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백성들이 물이 끊어진 후 건넜으니 아무 하는 일이 없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표”했기에 실은 모두가 참여한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열두 지파 대표들이 강바닥에서 기적을 기념하는 돌을 주우려고 제사장들과 함께 급류 속으로 먼저 들어갔습니다. 출애굽 때 혼자서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자는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악과 싸우며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기적에서 결정적이 차이는 따로 있습니다. 먼저 홍해 때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뒤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자 물을 돌이켜 추격해오던 바로 군대를 수장(水葬)시켜 다시는 쫓아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단의 노예로 묶여 있던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권세로 그 사슬을 끊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대적 사단은 우리 뒤에 쳐졌고 간혹 훼방은 놓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두 번 다시는 종으로 부려먹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었기에 그분처럼 거룩하게 자라고 종국에는 영화롭게 변화될 일만 남았습니다.
반면에 요단강의 경우는 싸워야 할 대적이 바로 눈앞에 있고 실질적인 전투는 아직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자기들 선조가 40년 전에 가데스 바네야에서 큰 두려움을 가졌던 그대로 그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피 흘리기까지 싸울 일은 요단강 다음부터입니다. 요단이 분명 크고도 신비한 하나임의 기적임에 틀림없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종의 전쟁 출정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홍해와 요단 중에 어떤 기적이 더 좋습니까? 여전히 홍해입니까? 심정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우리의 본성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하나 없이 하나님이 다 알아서 대적을 물리치시고 다시는 쫓아오지 못하게 해준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주 유감스럽게도(?) 홍해는 신자의 일생에 단 한번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을 받고 또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기에 해마다 드리는 동물 희생제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영적 의미로는 골고다 십자가 아래서 동일하게 주님을 비방 조롱했던 우리가 매번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이전에 또 하나님이 이미 주신 구원을 절대 취소하지도 않습니다. 새로운 구원을 매번 달라는 것은 물론, 자기의 구원여부를 수시로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단은 홍해 때와는 달리 아예 하나님이 모든 지파의 대표를 불러서 기념할 돌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대적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당신께서 그들에게 과연 어떠한 분인지 먼저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구원으로 자기들을 바로에게서 건져 내셨고, 지금도 얼마나 큰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지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담대하게 한발자국이라도 내딛고 발바닥을 강바닥에 밟고 서기만 했어도 요단의 급류가 멈춰 섰듯이, 앞으로 만날 어떤 강력한 대적도 믿음으로 맞서기만 하면 동일한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홍해 때는 하나님을 대행하는 모세가 언덕 위에서 지팡이를 물 위로 뻗쳐 그분의 말씀만 대언하자 물은 갈라지고. 백성은 그 물 사이로 지났습니다. 첫 구원은 영적인 차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 모든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요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강 한가운데에서 백성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 버티고 서있습니다.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이 강림하여 우리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신자는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를 구하여 그분의 인도에 따를 때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에서 그랬듯이 연전연승을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신자가 된 이후에 구해야할 기적은 홍해가 아니라 요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렇게까지 설명을 드렸는데도 아직도 요단처럼 급류가 갈라지는 초자연적인 엄청난 권능만 소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가나안 정복전쟁 즉, 성화의 과정 중에도 요단 같은 기적은 한번 뿐이었습니다. 그 후에 해가 중천에 걸리는 기적(수10:13)이 한 번 더 있었지만, 정말 그 때야말로 피가 튀는 엄청난 전쟁을 치르는 와중이었습니다. 손 하나 꼼작 않아도 전쟁을 승리토록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동안 싸우게 한 기적입니다.
또 혹시라도 신자가 된 후 대박 같은 은혜를 한 번이라도 받으면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평생토록 잘 섬길 것 같습니까? 이 또한 잘못된 기대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요단은 전투를 앞둔 출정식이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모세 때의 홍해와 동일한 권능으로 너희 진중(陣中)에 함께 거하고 행하니 특별히 지도자들부터 앞장서서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매번 믿음을 견고케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볼 수 있도록 열두 돌을 취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오늘 날의 우리도 요단의 기적을 매일 아침 맛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성경 보며 기도하는 나만의 경건의 시간이 바로 요단 급류가 갈라지며 맨 땅을 건널 수 있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오늘 하루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의 대적은 눈앞에 강력히 버티고 있을지라도, 그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위대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아침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큰 은혜로 즉, 내가 당신과 원수 상태였음에도 당신의 독생자를 내 대신 죽이셨던 그 사랑으로 구원하셨는지 상기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힘이 빠지려 할 때마다 성경을 읽고 또 눈물로 엎드리는 골방이 바로 나를 더 새롭고도 힘차게 소생시킬 권세를 받을 수 있는 골고다 언덕입니다.
본문에서 언약궤 앞에 붙은 수식어를 보십시오. “온 땅의 주의” 언약궤라고 합니다. 요단 같은 급류든, 홍해의 깊고 시퍼런 파도든, 이제 앞으로 전쟁을 치르며 차지해야 할 가나안이든, 그 온 땅에 속한 것이며 또 그 온 땅은 당신의 것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이미 사백 년 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당신의 약속이 그 온 땅의 주인이 어길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 그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먼저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바로의 노예에서 홍해를 가르며 구원해 내시고, 지금도 동일하게 요단강도 가르며 앞서서 먼저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럴진대 너희가 대적과 싸우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처럼 네가 좌로 행하든 우로 행하든 보이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온 땅의 주인께서 우리 믿음의 선조에게 하신 약속은 그 후손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아침마다 홍해나 요단 같은 초자연적 대박만 기대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자신만의 요단의 돌을 말씀과 기도 속에 그리면서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묶임과 눌림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맞서 싸우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더럽고 추했던 나 같은 죄인을 십자가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주신 하나님 그분을 회상하셔야 합니다. 아침마다 요단의 급류가 멈춰서는 기적을 맛보면서 하루를 여셔야 합니다. 그 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철옹성 같았던 여리고 성마저 폭삭 주저앉아 버리는 승리뿐입니다.
7/29/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