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자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36-39)
한국교회에서는 여전도회가 맡을 역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담임 목사나 당회부터 선입관과 편견으로 대합니다. 자연히 그 운영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한마디로 여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역할은 물론 여전도회의 임무를 교회행사나 주일예배 후 성도들의 식사교제를 책임지는 것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아무 말도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앞뒤 문맥과 당시의 관습과 문화를 자세히 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한 절의 일부분만 인용했는데도 그런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는 전제가 달렸습니다. 여자만 잠잠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그래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이런 잘못된 성경 해석에다 유교의 가부장적이고도 남성 우위적 편견이 보태져 여자들에게 아예 교회 사역을 맡기는 것을 금하는 교회마저 간혹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대체적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막상 여전도회에 속한 회원들 스스로도 자기들의 위치와 역할을 봉사와 구제에만 제한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전도회란 말 그대로 여자가 전도하는 모임이지 식사를 조달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도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훈련 받는 곳입니다. 또 그렇게 자라고 있는 제자들이 불신자들을 십자가 복음 안으로 초대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들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끔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미국남침례교단에선 여전도회(Women's Mission Union: WMU)의 역할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전도회란 18세 이상의 여인들이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며, 실제로 선교사역을 하고, 선교를 배우며, 선교가 삶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도록 영적 성장을 도모하면서 교회와 교단의 사역을 돕는 선교기관이다.” 또 그런 여성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로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만드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었던 다비다라는 여자 성도가 안타깝게도 병들어 죽었습니다. 마침 성령의 권능을 입은 사도 베드로가 근처에 있음을 알게 된 그녀의 친구들이 그를 간청해 기도를 받았더니 그녀가 되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추모하러 모인 과부들이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을 정도로,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36절) 따라서 다비다(히브리 이름 도르가의 헬라식 표기)는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었던 대표적 인물로 자주 인용 설교되어집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저 섬기는 일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녀를 분명히 ‘여제자’(36절)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복음 전하는데 동원한 것이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섬기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 가장 궁핍했던 소외계층인 과부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아 제자로 훈련시키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섬겼다는 뜻입니다. 38절에선 그녀를 따르던 과부들 또한 "(다비다의)제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봉제공장을 차려 놓고 과부들을 직공으로 훈련시켰다는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비다에게 배움을 받은 제자들도 그녀가 죽은 것을 알고도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였습니다.”(37절) 아름답고 고급한 수의(壽衣)를 만들어 입힐 요량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여 베드로를 급히 불러오려 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확신에 찬 행동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권능을 모르는 자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신자라면 다비다가 죽자마자 장례절차를 밟기 바빴을 것입니다. 자신의 제자들의 믿음이 이럴진대 다비다는 구제를 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한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여전도회가 계속해서 단순 구제봉사만 할 것 같으면 그 명칭을 구제봉사부로 고쳐야 합니다. 여전도회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려면 정말로 여전도회 고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과 조직과 지도자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비다에게서 어떻게 전도를 잘할 수 있었던가를 배워야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선행과 구제를 하고 싶고 도 그러면 전도가 잘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경험하듯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도를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구제만 하다가 그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바꿔 말해 전도에서 문제는 구제와 선행이라는 방법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다비다가 행한 구제와 선행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구제와 선행을 배우기 이전에 그렇게 행한 그녀의 인격과 신앙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이에 관해선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만 한 가지 힌트는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이름이 뜻하는 바입니다.
다비다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영양(羚羊)”이라는 뜻입니다. 미인대회에서 일등 할 만큼 크고 쌍까풀이 지며 속눈썹이 긴 신비한 매력을 지닌 즉, 외형적 아름다운 눈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항상 사랑과 인자가 넘치며, 주위의 세밀한 부분까지 볼 수 있으며, 남들이 지나치는 불쌍한 사람들과 원수들까지 돌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과부는 당시는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계층입니다. 하나님도 특별히 과부와 고아를 감찰 신원하십니다. 과부 구제에 대한 성경 규정도 있습니다(딤전5:3-16). 다비다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과부들을 섬겼습니다.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먹는 것이 입는 것보다 더 시급합니다. 과부들이 먹을 것을 보태주어서 고마웠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선 이미 필요한 만큼 다 도움을 받았고 의복과 주거문제까지도 섬세하게 돌봐주었다는 뜻입니다.
과부들이 패션쇼에 나가거나 젊은 남자를 유혹하러 다닐 것도 아니라서 옷이 그렇게 필요 없습니다. 당시의 겉옷은 지금으로 치면 침구(寢具)에 해당됩니다. 율법에도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출22:26,27)"라고 했습니다. 과부들이 겉옷과 속옷을 내어보였다는 것은 그 불쌍한 여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성경은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행9:39)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비다 혼자가 아니라 과부들과 함께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과부들을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켰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제자훈련반을 만들어서 일종의 여자목사로 과부들을 믿음의 여종들로 양육시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과부란, 특별히 재혼하지 못하는 늙은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천대받아 거지나 되어 인생을 포기하기 일쑤였습니다. 다비다는 그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든 것입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딤전5:5)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오직 "아름다운 눈"을 가진 예수의 참 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여전도회원들은, 모든 신자가 그래야 하지만,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아름다운 눈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의 눈으로 자기들의 인생을 바꾸는 눈입니다. 또 이 땅에서는 완전 절망적인 처지로 전락한 이들의 인생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바꾸어 주는 눈입니다. 남들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해 내는데 빠른 눈이 아닙니다. 힘들고 고달픈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눈이요, 어떤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도 자기 생각과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자비와 권능만 바라볼 수 있는 눈입니다.
여성은 감정적으로 섬세하기에 다른 이의 어려움을 더 구체적으로 정확히 볼 줄 압니다. 전도에서 여자만이 맡을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의 슬픔과 한숨에 같이 울어주고 탄식해 줄 수 있는 특성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을 싸매줄 줄 알며 함께 겉옷을 지어야만 할 것입니다.
요컨대 여전도회가 지금처럼 교회 안의 루머나 스캔들을 전하는데 제일 빨라선 차라리 없애는 것이 옳습니다. 구제와 선행만 해서도 많이 부족합니다. 여전도회원들 모두가 다비다와 같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마5:40)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아”(딤전5:10) 행할 때에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전에 행한 사역을 기쁘게 받으신 예수님이 죽었던 다비다를 부활시킴으로써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는”(42절)것 같은 놀라운 역사가 지금도 여전도회를 통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2/12/2013
눈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라 함의 의미는 외모가 아닌 맘의 눈이 구석 구석을 살피며 아픈자와 함께 아파하고 추워 떠는 자와 함께 시려할 줄 아는, 사슴을 닮아 맑은 맘의 눈을 가진 그런 여인이 되어야함을 배웁니다.
항상 머리 한켠에 슬쩍 밀어놓았던 것들을 이렇게 끄집어 내어 무엇이 틀렸는지, 성경 말씀은 이러 저러한 의미였음을 너무도 이해가 쉽게 설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기에 맘 속에서 내키지 않으면 가차이 감이 싫어 멀찌감치 서 있고 싶고, 자주 나완 상관없는 일이니깐 슬며시 지나칠께요~~하며 하나님께 기도아닌 투정을 부리고..
귀한 말씀으로 선교와 더불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눈을 갖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여전도회원이 되어지길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