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 같아지는 교회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대부분의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정말 하나님을 위해 남은여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그 결심이 퇴색되며 제대로 실천 한 번 못하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생활로 그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해졌다고 실망하는데 과연 그런 것일까요? 그럼 그렇게 오랜 교회생활을 통해 듣고 배우고 훈련 받은 것들은 전부 허사라는 뜻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개도 서당에서 삼년을 지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따져도 믿음은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 리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주님에 대한 열정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현실의 어려움에 부대끼느라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현실 문제를, 따지고 보면 개인적 문제에 해당됨, 해결하는 데에 전용 혹은 우선 적용해야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데서 기인합니다. 교회가 주를 위해 살지 말라고 가르쳤을 리 만무하니까 그분의 뜻을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 예수 믿어 그분을 향한 열정에 가득 차 교회 나왔는데 교회가 오히려 그 열정을 식게 만든 꼴입니다.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사실은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아주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가르친 측면은 바로 앞 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열매를 드릴까.”(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많이 바쳐야 복을 받거나, 최소한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허물과 영혼의 죄를 위해 바친다는 구절도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환난은 허물이나 죄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니까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더 많이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제사장이 노골적으로 제물만 요구하기에는 괜스레 손이 부끄러워져 속죄제의 핑계를 댄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헌금을 많이 해야 현실의 복을, 다른 말로 수십 배의 재물을 되돌려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만 모아 두려 듭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를 교회 간부화로 만드는 것이 전 교회적인 사역목표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오직 교회의 양적 성장만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면 환난에서 구원해 주고 현실의 형통도 따라온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개인의 상처를 치유해주거나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영성을 훈련하는 법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들조차 사실은 신자 개인의 영적 욕구를 채워주려는 목적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감성적 도덕적 종교적 훈련을 쌓아 교회 안의 직분자로서 영적 권위를 높이는 데만 초점이 모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지금 세 가지로 간략하게 줄여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비교해 보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이 신자에게 구하시는 것을 “오직”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7절의 내용은 완전히 부인되고 8절밖에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선 공의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와 사회활동에서 거짓, 사기, 부정, 부패를 척결하며 정의를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또 인자(仁慈)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자를 사랑해야 하므로 인자를 행하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합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므로 천국 소망을 키우며 죄악과 흑암의 세력에 당당히 맞서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환난 가운데도 온전한 믿음을 붙들고 요동치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넓고 편안한 길 대신에 좁고 협착하지만 거룩한 길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요구에 대한 전제와 공통점이 각각 하나 있습니다. 먼저 전제는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고 합니다. 이미 율법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의 기준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진중에서 함께 거하며 역사에 직접 개입하여서 당신의 선을 실행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이 어떤 분이며 자신들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지금도 어디로 인도하는지 안다면 당연히 그분의 선을 본받아 삶에서 행해야 하고 또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했듯이 셋 다 실천적 행동을 요구합니다. 단순히 사고나 개념상의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종교적 활동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의 신자의 현실적 삶과 자기 주변을 섬기는 활동에 속한 문제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요구는 전혀 없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태여 별도 계명으로 명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자신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만 사랑하려는 습성이 더 문제이자 죄가 됩니다. 원죄가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모든 신앙 훈련과 활동이 직접적으로 돈을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구원, 치유, 성장 시키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해 죄악과 흑암이 농간 조종하고 있는 영적전투 현장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로는 교회에서 기도하며 영적 전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적 전투를 위한 준비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삶에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며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사단과 싸워야 합니다. 바로 공의를 세우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로선 선한 의도로 교인의 치유와 성장을 강조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인성장보다 교회성장이라는 목표가 배후에 있거나 자연히 연결됩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하거나 십자가 복음의 유일한 진리성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기에 양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간주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 촉구가 사라지는 대신에 개인의 치유와 성장만 강조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경의 절대적 진리보다는 교인의 입맛에 맞는 가르침만 번성하게 됩니다.
양적성장을 목표로 해도 결국 전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됩니다. 양적성장만 목표로 하는 것과 참 복음을 전하다보니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선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전자는 돈만 밝히는 수전노의 전당포 같고 후자는 독지가의 후원금으로만 유지하는 자선단체 같은 정도의 차이입니다. 너무 심한 비유 같습니까? 아닙니다. 양적성장만 목표로 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교회재정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교회 건물의 대형화와 치장으로, 또 비대해진 교회조직으로 인한 내부적 권력 다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도 온갖 부작용과 폐해가 발생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한절에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어떤 직업을 통해 어떤 일을 할까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정상적 직업 가운데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단 그 일을 통해 성경으로 이미 배워 아는 하나님의 선을 행하면 됩니다. 그분께 겸손히 의탁하여 공의와 인자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자들이 이미 잘 아는 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는 것은 그렇게 살기 싫거나, 잘 믿어 형통하려는 속내가 들키지 않으려는 핑계가 아닐까요?
9/28/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