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1:1-4) 순교도 이겨내는 믿음의 비결

구원 완성 담화 (5)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1-4)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핍박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모략으로 일어났습니다. 주 후 64년에 로마의 한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시내 전역에 대화재로 번졌습니다. 이재민이 급증하여 식량이 떨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네로 황제가 로마를 더 화려하게 재건할 욕심으로 불을 질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시민들의 원성이 자기에게로 향하자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방화했다고 덮어씌웠습니다. 당시에 체포된 신자들을 나무에 매달아 태우는 불길로 네로 황제의 정원을 훤히 밝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시민들로부터도 죽임을 당할 판이라 로마를 황급히 탈출하기 바빴습니다. 

 

베드로 후서는 네로 황제의 집권 말기에 일어난 이 박해 때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AD 66년경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저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도 함께 도주하다가 예수님이 로마로 걸어 들어가는 환상을 보고 양 떼를 버리고 혼자 살려고 했던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전승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이때 순교한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도 자신에겐 과분하다고 여기고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라고 순교를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서신은 베드로의 유언장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읽을 로마 신자들도 비록 탈출에 성공했어도 언제든 체포되면 순교 될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11)고 신자들에게도 순교 당할 것을 각오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로마는 그 화재로 오히려 더 좋고 크게 정비 재건되었고 네로도 암살당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잠시 진정되었습니다. 약 30년이 지난 후인 90-96년에 통치한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차 핍박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303-311년에 재임한 갈레리우스 황제 때까지 대규모의 핍박이 총 10회나 있었습니다. 이차 박해 때부터 황제와 그리스도 중에 한 사람만 주로 경배하도록 강요받았고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온갖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했습니다. 마지막 갈레리우스 황제 때의 박해가 가장 극심했는데 교회들은 전부 파괴되고 성경이 불태워지고 모든 기독교인의 로마 시민으로서 권리가 완전히 박탈되었으며 이교 신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본서의 주제는 일상적인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굳센 믿음이 아니라 임박한 순교의 핍박을 담대하게 감당해낼 수 있는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같이 하면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고 천국 입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신의 후반부에서도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그날을 소망하며 끝까지 견디라고 권한 것입니다.(3:8-13) 

 

따라서 본 서신은 실제로 종말이 닥쳐서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대환난이 시작될 때 신자들이 참조해야 할 권면과 위로인 셈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성적 타락을 넘어서 LGBTQ로 성적 정체성이 파괴되는 사조를 유발한 오바마 대통령 때문에, 또 온갖 루머가 난무했던 베리칩으로 인해 부끄럽게도 적그리스도 소동이 한바탕 일어났습니다. 최근에는 전 지구적인 기후재앙과 펜데믹으로 종말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불신 세상은 기독교에 대해 반발 비평 비난 배척을 넘어서 이제는 서서히 증오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푸틴의 예에서 보듯이 언제 든 네로 같은 광인이 나타나 핵전쟁이 유발될지도 모릅니다. 현세대야말로 베드로의 권면에 세밀히 귀를 기울일 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믿음. 

 

본문은 서신의 인사말에 해당되나 베드로가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편지를 읽을 신자를 1절에서부터 어떻게 묘사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인 자신과 모든 면에서 똑같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사도가 믿는 하나님이나 신자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로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가졌는데 그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내용과 그것을 받게 된 경로도 같다는 뜻인데 한 분 하나님을 같이 믿기에 그것들이 서로 다를 수는 절대 없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갖게 된 경로의 특성을 두 가지로 강조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며 유대인들도 신자를 핍박한 바울이나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처럼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인간을 대신해 죽으신 의를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구원 얻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자 본인의 성품이 남들보다 더 의로웠거나 영적으로 더 똑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특성으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 심령 속에 심어준 믿음을 받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과 원수 상태였기에 그분을 믿을 의사가 없고 또 죄 중에 있어서 스스로 믿을 능력도 없기에 성령이 역사하여 한 죄인의 존재 전체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교파에서 인간 쪽에서 십자가 복음을 배워서 예수를 스스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본서를 지은 베드로가 그렇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삼 년간 복음을 배웠고, 사역에 동참했고, 전도 여행을 가서 귀신을 물리쳤고 사도가 된 후로는 주님과 방불한 이적도 일으켰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아계신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가장 먼저 고백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그때까지의 믿음이 완전히 허망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전해주는 주님의 부활 소식도 믿지 못하고 혹시라도 유대 당국이 체포하러 올까 봐 제자들끼리 숨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수제자로 매사에 열심과 진심으로 앞장섰듯이 하나님도 자기가 스스로 믿었던 믿음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부터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든 터라 그런 믿음이 결코 온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세 번의 부인 사건으로 인해서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서신은 주님 승천하신 후 약 삼십 년이나 지나 저작했는데 그의 믿음이 오래전에 스스로 믿는 믿음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서신을 읽을 신자들도 자기처럼 믿음을 받은 자라고 칭합니다. 그렇다면 문맥의 흐름 상 그는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라야 순교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 이전의 자기처럼 인간 쪽에서 스스로 믿은 믿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또 그러니까 스스로 믿음을 강건하게 키워서 강력한 의지력과 인내력으로 네로의 핍박을 이겨내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

 

대신에 그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2절)라고 권면했습니다.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으니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특별히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혜와 평강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너희가 주님을 이미 알고 있지만 과거의 자기처럼 스스로 믿는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의 자기처럼 하나님이 선물로 주는 믿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물은 포장 상자를 뜯어봐야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듯이 하나님께 받은 믿음의 내용도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와 어법에 따르면 안다는 ‘야다’라는 말은 부부가 결혼하여 상대의 모든 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지식적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을 체험적 주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의 여정을 보면 그 둘의 구분이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명했는데 그 자리에 베드로도 있었습니다.(요20:22) 개인적으로는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큰 죄는 전혀 추궁하지 않고 대신에 세 번이나 당신의 양 떼를 먹이라고 하면서 당신과의 사랑하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요21:15-23) 특별히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력하고도 충만하게 임하자(행2:1-4) 이전과 전혀 달리 아주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뛰쳐나와 천하 각국의 수많은 유대인이 절기를 지키려 모인 성전으로 한걸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하나 없이 성전 뜰의 중앙 계단에 올라서서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들에 대해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니까 그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랍비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고 그를 경배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유대 종교 당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인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운동의 최고 주동자로 몰려 체포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데도, 실제로 나중에 두 번이나 그런 위험에 내몰렸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담대하게 십자가 복음을 유대교의 심장부에 대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 오르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주님과 함께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시키고 수제자에 걸맞게 새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 것 같으니까 비겁하게 하녀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갈릴리 비천한 어부라 유대 주류층으로부터 괄시받던 신세였기에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선 오순절에 자신이 그렇게 설교하려고 계획 노력 시도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미리 원고를 작성한 것도 아닌데도 구약성경의 계시와 예수님을 연결해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정확하게 풀어서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 자기에게 임하자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알게 된 것입니다.(요16:5-15) 설교하는 중에도 평소의 기질 대로 너무나 신나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다 자기 설교에 청중들이 영적인 찔림을 받고 가슴 깊이 회개하는 모습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나 넘게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역사는 절대로 베드로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본인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누구나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로선 성령의 권능이 자신을 온전히 붙들어서 하나님의 크신 일에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그의 심정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큰 감동과 기쁨에 사로잡혔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 평강, 담력, 용기, 소명 의식으로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의지와 이성과 무관하게 생긴 일이라, 자기가 믿어보려 노력했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부어주신 믿음을 받았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은 물론이고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이제 개인적 체험으로 친밀하고 생생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난 삼 년간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닐 때도 유대교와는 다른 평강과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승천하여 안 계시는데도 주님이 마치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자기와 함께 사신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도 자기 속에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이 계시는 줄 알지만 주님이 약속한 대로 성령이 오시니까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오순절에 성령을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났고 그 이후 지금 순교하기 직전까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니까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도 더 많이 늘어났었다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간증한 셈입니다. 

 

믿지 말고 알아야 하는 이유

 

믿음의 본질이 예수를 아는 것이며 더 깊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더 많이 임한다고 말한 까닭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마디로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항입니다. 아무리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부인해도 이미 과거에 실현된 엄연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동의는 물론 심지어 믿음도 굳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알기에 그 앎에 걸맞게 반응하든지 아니면 알지 못하니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서신을 받아볼 때쯤에는 순교한 자들도 이미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동시대인으로 주님의 골고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직간접적인 증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태어났다고 해도 자기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거짓이라고 무시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선지자도 죽었다 스스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계속 그럴 것이라고 미리 예언한 그대로 말입니다.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주님이 평소에 가르친 내용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틀림없다는 뜻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모든 인간의 죗값을 당신께서 직접 죽음으로 담당해주셨고 또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은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수많은 증인이 있는 역사적 진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어떻게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인간 선각자가 교묘히 만든 이야기나 각성한 진리라면 스스로 잘 배워서 이해와 동의가 되는지 따져서 믿기로 결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났고 신령한 신체로 바뀌어서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누가 지어내어서 다른 이에게 전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아예 믿어볼 노력도 안 하고 미친 사람 취급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인들이 처음 십자가 복음을 들을 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다니 너무 어리석다고 비난했습니다. 

 

오순절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만약에 처음으로 듣는다면 교묘하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콧방귀도 안 뀔 것이 뻔한 예수 부활 사건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로선 부활 주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심지어 허리의 창 자국과 손바닥의 못 자국을 직접 만졌기에 굳이 더 보태거나 거짓으로 지어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메주는 콩으로 쑨다고 말한 셈입니다. 

 

틀림없이 그때도 메주를 콩으로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이가 있듯이 많은 이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중에 십자가 사건의 직간접적인 증인들로서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는 성령이 역사해 마음에 찔림을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성령이 강력히 임하여 그리스도에 대해서 체험적으로 알게 만든 것이며 기꺼이 그날로 세례를 받고 싶다는 마음도 부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지금 너희가 자기와 하나 다를 바 없이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하나님께 이미 받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그 성령의 역사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요3:8)고 가르쳤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게.”(행2:2)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오순절을 미리 다 계획해 놓으신 후에 니고데모에겐 비유처럼 가르쳤는데 실제로 그 계획대로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임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개인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증거가 온 집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방에 모인 모든 제자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여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게 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 것입니다. 

 

이미 얻은 영생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스스로 교리를 공부하고 믿어서 순교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실제로 목격한 증인으로서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어떤 극심한 핍박도 이겨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3절)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을 위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기도해준 것입니다. 영생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지한 것이며 천국 시민의 신분이 보장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확실한 증거가 바로 베드로가 하늘에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증언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의미가 바로 신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태로 죽든 모세나 엘리야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이 된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육체의 눈이 잠시 감겼다가 다시 영적인 눈이 뜨는 순간 신자의 눈앞에 모세, 엘리야, 바울, 베드로는 물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미리 이 땅에서 맛보기로 보여주고 들려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장차 죽고 난 후에 너희들의 신분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정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선 당신께서 부활하여 변화된 모습보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변화할 모습을 미리 보여서 알게 해줌으로써 순교에 담대히 대비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같은 유대인으로서 주님은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 체험적으로 알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실제로 열매 맺혀서 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로마 교인들에게도 이미 다 주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네로의 박해로 순교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이미 체험적으로 알기에 앞으로 이 땅에서 얼마나 더 오래 살든지, 혹시 체포되어서 순교 되더라도 스데반처럼 죽어가는 중에도, 특별히 죽은 후에도 한결같이 그분의 넘치는 사랑 안에 완전히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죽음조차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어내지 못한다고 선포했지 않습니까? (롬8:38,39)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이천 년이나 지난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들과 경우가 다르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어도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을 때입니다.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실만 목격했지 그 사건이 의미하는 구원의 깊은 진리까지는 몰랐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초대교회 때는 기독교와 교회를 속히 세워야 할 필요 때문에 역사상 최고로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한 것도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역사했던 성령이 지금에 와서 힘이 빠진 것은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히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아나가선 안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가 자기에게도 오순절처럼 강력히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분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하고도 진정어린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분이 살아계셔서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고 내 인생을 거룩하게 주관하고 있다는 표적 증거 징조라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사람마다 그 방식과 정도는 달라도 반드시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시고 나의 지난 모든 죄를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저도 간증할 시간이 없지만 베드로 같은 영적인 체험을 겪었기에 내 안에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숨 쉬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죄 많은 탕자도 그렇다면 모든 신자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초대교회 신자들과 같은 신앙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 말씀은 오늘날 예배 때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처럼 초대교회 예배 때에 실제로 신자들이 고백하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친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 그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던 역사적 사실을 회상하여 기념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앎으로써 그에 적절히 반응한 것입니다. 

 

순교를 감당하려면?

 

베드로는 자기처럼 하나님께 믿음을 받아 변화된 교인들더러 순교를 담대히 대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권했습니까? 우선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합니다.(4절)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처럼 닮아가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신분과 특권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니까 주님의 성품만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천국에서 교제하게 될 것이니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열거된 닮아야 할 성품들을(5-7절) 일일이 살펴볼 여유는 없습니다. 전부를 종합한 영적 원리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까지는 신자 본인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나가면서 은혜와 평강을 더 누려야 하는 차원입니다. 마지막 형제 우애와 사랑만이 신자가 자기 외부를 향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가족과 교회 안의 성도들이 대상일 것이며 사랑은 이웃을 넘어 사탄에 미혹된 불신자들까지 포함될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목적과 의미가 이웃에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져 죄인 대신에 죽은 이유는 오직 하나 인간을 사랑하신 이유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직접 오신 것부터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사람들을 섬기고 이적을 베푼 것이나, 천국 복음을 가르친 것이나,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오직 죄인인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것이며 또 그것이 구원이자 영생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지금 당장 온전히 실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여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8절에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권면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베드로는 지금 형제를 사랑하면서 순교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온 세상에 사랑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사랑을 이길 어떤 사악한 존재나 힘과 적그리스도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성품에 참예하여 사랑을 하면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더 많이 임합니다. 사랑에 열중하다 보면 순교를 넉넉히 이기고 그전에 그런 것들을, 말하자면 종말에 대해 염려는커녕 신경을 쓸 겨를도 없습니다. 예수를 몰라서 이웃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자신의 죽음만 걱정할 수 있습니까? 

 

누차 강조하지만 구원의 완성에 대해선 신자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완성된 구원이고 이미 몸에 지닌 영생이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일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약해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완성은 아주 힘들고 평생을 가도 종종 실패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내주하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정확히 아는 본질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은 그분의 사랑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이며 신자가 된 후에도 그 사랑을 온전히 넘치도록 받고 있는 것이 믿음이며,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처럼 주위에 나눠주지 않고는 오히려 마음에 영적인 거룩한 부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같은 종말의 때에 신자들끼리만 교회에 모여서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재림 전에 혹시 순교하더라도 불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중에 당하라는 것이며,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순교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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