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0:1-10) 천년 왕국은 언제인가?
구원 완성 담화 (10)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10)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오시는 시기, 그 전의 징조, 오시는 모습, 세 가지 측면을 살펴봤습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사탄을 멸하려 홀연히 오셔서 곧바로 마지막 구원과 심판으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바로 인류 구원 역사의 완성이자 종결입니다.
그럼 지금 진행하고 있는 구원완성 시리즈도 끝을 내어야 하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려 합니다. 신자들이 재림의 시기와 징조와 모습이 궁금했듯이, 재림 후도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살아가는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재림 전과 마찬가지로 재림 후 상황에 대한 해석도 교파 간에 서로 달라 신자들이 혼란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도 본문이 설명하는 천년 왕국에 관한 의견이 가장 분분한데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년 왕국의 의미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접근 해석해야 할지부터 간략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접근방식
요한계시록은 사도 중에 유일하게 순교 당하지 않고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이 AD95년 경에 예수님께 장래 일에 대해 계시받은 바를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자기에게 계시해주었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계1:1) 그런데 주님은 아주 모호하게 대부분을 상징과 묵시로 계시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생전에 직접 가르치신 예언도 그렇게 했듯이 계시록 해석의 첫째 원칙은 절대로 문자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계시록은 신구약 66권의 마지막 책입니다. 그럼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를 마무리해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책이라고 봐야 합니다. 앞의 65권의 내용은 때가 되면 예수가 와서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해주고 당신의 백성들로 복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형성하여 당신의 일을 감당하게 했다가 마지막 날에 모든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이 말하는 바도 바로 그것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설명도 많습니다.
무슨 책이든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는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동기로 집필했는지와, 둘째는 저자가 강조하려는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당해 있을 당시는 도미티안 황제 치하 말기로 네로에 이어서 기독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두 번째로 자행되고 있을 때입니다.
요한은 주님께 계시받은 내용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로 전한다고 했습니다.(4절)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실제로 있었던 교회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1:9a)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그 일곱 교회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래서 편지 내용에서 보다시피 각 교회의 사정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1:9b)고 덧붙였습니다. 현재 요한 자신은 물론 그 교회들이 심한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와 참음에도 동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너희들도 그 핍박을 참으면 주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우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일차로 강조하려는 바는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의 신자들더러 실제로 있었던 로마의 극심한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일곱 편지가 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동일한 패턴으로 결론 내립니다. 그 일곱 교회들의 신자가 공통적으로 귀담아들어야 하는 한 가지 말씀은 바로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는 천국 면류관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책을 저작한 일차 동기인 로마의 핍박을 이겨내는 문제는 초대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단기간에 세계적 종교로 든든히 섬으로써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에 개별적으로 보낸 편지에서부터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에서도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22:16)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계시록은 교회들에 관한 권면의 편지로 시작해서 결론도 그 권면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따라서 계시록 전체가 말하는 바는 로마의 박해와 동일한 핍박이 초대교회를 넘어서 모든 세대의 교회와 신자에게 임할 것이며 특별히 마지막 때는 더 극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항상 함께하니까 세상 권력의 핍박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으므로 끝까지 참으라고 위로 격려하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그럼 오늘날의 신자들이 계시록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내용도 어차피 거쳐야 할 고난보다도 고난을 이겨내는 방안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서두의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 핍박을 이겨내고 교회와 신자들이 행할 바를 가르친 것이므로 당연히 그와 동일한 핍박들이 아무리 계속 생겨도 그 가르침대로만 따르면 되지 않습니까? 요한이, 아니 예수님이 책의 서두에 결론을 제시한 셈입니다.
계시록은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일으킬 무시무시한 대환난과 종말에 대한 기괴하고도 초자연적인 비밀을 숨겨놓은 책이 아닙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처럼 머리를 짜내어 퀴즈를 풀 듯이 계시록을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계시하는 진리를 요한 당대에 있었던 일과 비교하면 종말에 대해서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666은 비밀 코드인가?
바꿔 말해서 계시록의 내용이 연대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이 7번씩 세 차례 총 27번의 큰 핍박이 있다고 보고 각각 역사적 상황이나 사건과 일대일로 끼어 맞히려 해선 안 됩니다. 인류 전 역사에, 아니 지금부터 종말까지라도 큰 재앙이 27번만 있다면 오히려 큰 다행일 것입니다.
대신에 완전 수 일곱을 의도적으로 3번이나 사용했으므로 심판이 완벽하게 또 철저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인과 나팔과 대접으로 나눈 것은 동일한 성격의 심판을 그 확실성과 완전성을 더 강조하려고 각기 다른 차원에서 겹쳐서 설명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자주 쓰는 수사적 기법이 바로 같은 의미를 비슷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팔과 대접으로 일곱 번씩 반복되는 심판의 대상과 방식들이 출애굽 때의 재앙과 같은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탄과 그의 종인 세상 권력들을 출애굽 때처럼 철저하게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에서 신자들이 믿음대로 살다 보면 반드시 로마의 박해 같은 환난이 따르나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고전10:13) 해주십니다.
계시록 중에서 신자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막 적 그리스도에게 굴복한 표시인 666일 것입니다. 이것도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면 무서워해야 할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당시에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각 알파벳을 숫자로 환산해서 표기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666은 역산해서 따지면 네로라는 이름이 됩니다.
문제는 요한이 저작할 때는 이미 그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네로가 죽지 않고 로마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파르티아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습니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으나 일부 로마 시민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요한은 당시의 그런 상황을 감안하여 현재 도미티안 황제가 또 앞으로 비슷한 세상 권력자들이 교회에 극심한 핍박을 가할 것이라는 뜻을 폭군 네로에게 빗대어 설명한 것입니다. 이 서신이 교회들마다 회람이 되면 로마 사람들도 볼 수 있는데 로마 황제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숫자를 풀어내도 이미 네로는 죽었기에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시효가 만료된 666을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추적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협박에 굴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다는 거짓 자백이라도 하게 되면 구원을 잃을지 미리 걱정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666 표식을 세 번이나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 질문해서 그 세 번의 표식을 다 지우고 용서해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진심이 결코 당신을 부인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으며 또 그래서 그가 세 번 부인한 후에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한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어떤 방식이든 사탄의 표식을 받았느냐가 아니며 오직 예수님을 끝까지 완악하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666이 의미하는 바는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자기를 경배하는 자와 그것을 거부하는 자를 나누는 표시입니다. 그럼 세상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전 세계인을 상대로 자기를 숭배하도록 하는 적그리스도부터 먼저 나타나고 그 후에 666 같은 표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런 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미리부터 666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베리칩이나 이번 코비나 백신처럼 사탄이 비밀리에 표식을 심어놓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믿는 신자는 물론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려 만든 과학적 산물일 뿐입니다. 나아가 공개적으로 세 번 절한 것과 다름 없는 베드로도 용서해주신 예수님이 미처 몰라서 표식을 받은 자를 심판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계시록의 결론은 사탄과 그 흑암의 세력을 예수님이 진리의 말씀 한마디로 철저히 또 영원히 멸망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도 심판받아 큰 고통을 겪을 자는 사탄과 그 졸개들이지 예수 안에 있는 신자와 교회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도 처참하게 완전히 멸망 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가 가할 고통을 자세히 묘사해서 신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려는 의도는 저자 요한에겐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13장만 짐승이 성도들을 패배시킨다는 언급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보듯이 세상 유혹에 져서 교회 밖으로 나가버리는 신자들이 나오거나 순교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어도 거꾸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듯이 예수 안에 있는 신자가 순교하면 거꾸로 사탄에게 가장 강력하게 또 크게 승리한 것입니다.
천년 왕국에 대한 해석 원칙
계시록 해석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천년 왕국에 대한 본문을 살펴봅시다. 당연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상징과 묵시가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약 선지자들의 마지막 날에 관한 예언을 그대로 인용했듯이 요한도 구약적인 이미지를 차용했습니다.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8-9절)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는 미래의 성전과 땅에 대한 에스겔서 38, 39장의 예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곡이라는 족속이 거주하는 장소가 마곡인데 당시나 지금이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민족과 지명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했던 그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전쟁도 지금껏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곡은 사탄을, 마곡은 그의 추종 세력을 상징할 뿐입니다. 현재의 러시아나 중국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최후의 전쟁을 치른다고 추측해선 안 되며 그래도 될만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에스겔은 소돔과 고모라의 완전한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쏟아부어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황 못에 영원히 빠트린다고 해서 종말적 심판을 선언합니다. 에스겔은 여호와 하나님이 장차 있을 이방들의 엄청난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신다고 한 반면에, 요한은 예수님이 종말에 오셔서 사탄을 영원히 멸하여 새 이스라엘인 교회와 신자들을 보호해주시고 마지막 구원과 심판을 종결시킨다는 것입니다.
천년 왕국에서 천년이라는 표현도 문자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라고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고 권면합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문자적 천 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기간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천년 왕국에 대해 요한은 의도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천사가 용을 잡아 무저갱에 넣어 천 년 동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가 잠시 풀어준다고 합니다.(1-3절) 둘째는 예수를 증언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순교한 자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합니다.(4-6절) 셋째는 천 년이 차매 사탄이 잠시 놓이고 마지막 전쟁이 있고 신자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유황 못에 영원히 던져진다고 합니다.(7-10절) 첫째 셋째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 둘 사이에 신자가 왕노릇하는 것이 위치하는 구조입니다.
첫 단락에서 용은 옛 뱀인데 마귀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옛 뱀은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한 원흉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단락의 짐승은 사탄이 세운 종이며 그 우상은 그 종이 만든 우상 종교와 그 추종자들을 뜻합니다. 셋째 단락의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흑암의 세력과 그 추종자들 모두를 뜻합니다. 세 단락에서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그냥 간단하게 사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따라서 천년 왕국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요한이 나눈 세 문단에서 사탄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 요컨대 3절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입니다. 특별히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는 부분입니다.
사탄의 풀림과 묶임?
우선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3절 말씀은 7절의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각기 다른 성격의 사탄에 대한 심판이 두 번 있다는 뜻입니다. 세 단락을 순서대로 문자적으로만 따라가면 어떤 해석이 됩니까?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만든 천년의 기간이 먼저 있은 후에, 신자들이 주님과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천년의 왕국이 따르고 그것이 끝나면, 사탄이 옥에서 풀려나서 대환난을 일으키고 그럼 예수님이 오셔서 최후 승리를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습니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서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문자적으로는 천국이 지상에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사탄과 전쟁을 또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주님이 그 전쟁을 치르려고 일부러 무저갱의 옥문을 열어서 사탄을 풀어준 것입니다. 신자들을, 선데이 크리스천이라 해도, 의도적으로 참혹한 전쟁에 몰아넣어 고통을 겪게 하신 하나님이 됩니다.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말해 놓고서(3절) 다시 구원받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자가당착적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힌트조차 주지 않은 두 번 재림이라는 억지 주장이 신자들이 공중 들림 받는다는 한 문구(살전4:17)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순서대로, 특별히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는 한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니까, 인류 역사에 구원받아야 할 기간이 두 번 있다는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두 번 재림을 주장하는 교파가 본문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요한이 첫째와 둘째 단락에서 천년이라는 동일한 기간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명드린 대로 “사탄이 옥에서 놓인다”는 7절이 “잠깐 놓인다”는 3절과 의미의 흐름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럼 둘째 단락은 첫째와 셋째 사이에서 첫째 단락을 보완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 년 동안 사탄을 무저갱에 가두었다는 것과 신자들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는 것이 같은 내용을 말한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성경 예언이 이중 삼중의 의미가 있듯이 둘째 단락은 셋째 단락의 마지막 때와도 연결되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결국 요한의 의도는 사탄에 대한 심판이 두 번 있는데 처음은 일시적 부분적이라면, 두 번째는 영원하고 완전한 심판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신자들이 왕노릇하는 일도 첫째 심판에선 일시적 부분적으로 행하지만 둘째 심판 후에는 영원하고 완전히 행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영계를 창조한 이후부터 사탄의 활동이 완전하게 결박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천상에서부터 그 반대였기에 사탄은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내려 온 후에도 하나님의 허락하에 공중 권세를 잡아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두 번이나 결박해야 할 만큼 사탄이 하나님에게 힘에 겨운 상대가 전혀 아니므로 번거롭게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백성들이 온갖 억측을 하도록 구원과 심판의 여정을 복잡하게 계시하지도 않습니다.
입이 아프도록 강조하지만 재림과 마지막 심판의 주체이신 예수님은 사탄을 멸한 후에 홀연히 오셔서 홀연히 구원과 심판으로 나눈다고만 직접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준도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었는지 여부 하나뿐입니다. 둘째 단락에서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 당하든지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했으나 그런 일은 과거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단락은 그래서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고 또 주님 다시 오실 때 살아있는 신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혔다는 의미?
이제 요한이 첫 단락에서 사탄이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결박당했다고 설명한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의 키도 재림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한 이후로는 누구나 그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약 39권은 그 원시 복음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지, 또 계시록 앞까지 신약 26권은 때가 차매 그 여자의 후손이 와서 복음을 완전히 성취시켰다는 사실과 그 복음이 신자에게 어떤 열매를 맺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은혜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온 땅에 임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 율법의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은혜의 시대를 시작할 메시아로 예수님이 오셨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천국이 이 땅에 임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천국이 침노를 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직은 모두가 아무 제약 없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믿어야 하고 믿은 후에도 사탄의 온갖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복음을 완악하게 거부하는 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여전히 사탄에게 미혹된 불신자들과 그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땅은 갈수록 더 타락 피폐해질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이 분명히 이 땅에 도래했으나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고 유보된 상태입니다. 먼저 믿은 신자들이 복음을 땅끝까지 끝날까지 전하면서 서서히 완성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면 천국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사이에 혹시 구원받은 신자가 때로 사탄에게 져서 넘어져도 성령이 내주해 계시므로 절대로 사탄의 종이라는 이전의 자리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탄이 창세 이래 계속해서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 앞에선 완전히 무력해졌습니다. 참믿음 안에 있는 참교회와 참신자들을 절대로 흔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첫째 단락의 설명대로 사탄은 일차로 무저갱에 완전히 결박된 셈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둘째 단락이 첫째 단락을 풀어서 설명해준 것입니다.
무저갱에 갇혀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3절)라는 표현이 사탄을 완전히 무능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북음을 이스라엘을 넘어서 열방으로 강력하게 전파하므로 구약 시대처럼 사탄이 만국과 성령의 권능을 입은 신자들을 자기 맘대로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천년 왕국은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재림 사이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전체 내용도 모든 세대의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 붙들면 세상 권력에게서 어떤 큰 핍박을 받아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종교의 자유가 있던 제약을 받든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서면 사람들과 죄악과 사탄에게 당당히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듯이 말입니다.
첫째 부활이 천년 왕국이다.
천년이라는 기간을 첫째 둘째 단락이 같이 사용했다는 것보다 천년 왕국의 의미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가 본문에 따로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신자들이 주님과 함께 왕노릇한다고 설명한 후에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5,6절)는 말씀입니다.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둘 다 둘째 부활과 첫째 죽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첫째 부활은 예수를 믿어서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사탄이 결박당했기에 가능해졌습니다. 둘째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 육체까지 신령하게 부활하는 것이며 그럼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적으로 죽는 것인데 신자는 낙원으로 올라가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육신의 신령한 둘째 부활로 영생을 하니까 둘째 죽음을 겪지 않습니다.
대신에 불신자는 첫째 부활인 영적 거듭남이 없어서 죽으면 낙원으로 가지 못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미 죽었거나 남아 있던 불신자는 모두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되므로 둘째 사망을 겪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 )로 부연 설명한 대로 그 나머지 죽은 자들 즉, 초림과 재림 사이에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도록 살지 못하고 둘째 죽음을 맞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둘째 단락 안에서 주님의 초림으로 천국이 임했으나 재림 때까지 완성이 미뤄지고 천년 왕국은 그 둘 사이의 기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년 왕국이 역사적 사건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 다시 오시기 전까지 모든 세대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년 왕국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왕국의 끝에 예수님은 홀연히 다시 오셔서 홀연히 심판과 구원으로만 나누십니다. 우리는 이미 신령한 둘째 부활까지 보장되어 있으며 둘째 사망은 절대로 없습니다.
더 이상 사탄의 미혹을 받지 않을 능력도 이미 받았습니다. 초자연적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십자가 구원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성령이 함께 해주시기에 절대로 사탄, 세상, 죄악에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귀한 은혜이자 권능입니까? 헛된 종말론에 휩싸일 필요도 없고,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666에 미혹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종말을 대비하며 깨어있는 것도 종말적 현상을 추적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삶에서 정말로 신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매 순간 점검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택하신 자를 구원해 주시지만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신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천국이 침노당하지 못하며 주변의 가족 친지 이웃이 불 못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손 놓고 있는 셈입니다. 전도해야 구원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십자가 은혜 안에 사는 삶이 귀하고 참 생명이라고 절감하면 바울처럼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신자답게 살면 사탄의 종이 된 세상 사람들과 권력들로부터 반드시 핍박받게 된다는 점은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 고난은 잠시이고 영원한 안락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 밖의 사람들이 세상에선 형통 안락할 수 있으나 잠시뿐이고 그 내면은 헛되고 헛되며 무엇보다 영원한 고통이 기다립니다. 그들이 오히려 더 불쌍하지 않습니까?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외에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이 요한계시록, 아니 성경 66권이 선언하는 한 가지 절대적 진리입니다.
(2/5/2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