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최고로 선한 행위였다.
(죄의 본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불순종이 과연 죄의 본질인가?
인간 타락의 계기가 된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순전히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세 번째로 주신 명령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싫어서 혹은 당연히 타락할 줄을 알고도 지킬 수 없는 명령을 준 것이 아니다. 짐승을 산 채로 포획하려고 덫을 놓고 기다리듯이 하나님이 심술궂게 아담이 빠질 수밖에 없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 금령은 인간을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근거하여 접근해야 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아주 연약하고 어리석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과의 사이에는 영원토록 결코 메어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아담이 그 금령을 어긴 이후로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의미를 단순히 타락의 결과로만 받아들여선 안 된다.
선악과를 창조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죄의 본질이 금령을 어긴 일에만 초점이 모이게 된다. 그래서 지금껏 대체로 죄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고 정의해왔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죄가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일 뿐 죄의 본질은 아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를 실행하기 전에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생각이든 것이 죄라고 한 차원 높여서 설명하기도 한다. 죄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이긴 하나 여전히 죄를 타락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이 행한 일의 잘잘못만 따진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여인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도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단순히 예쁜 여자를 보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본능적인 욕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결혼이나 연애 같은 정상적인 관계 밖에 있는 여자를 향해 오래 동안 음란한 생각을 품고 수작을 부려보려고 궁리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비정상적인 관계를 생각했으니까 이것도 사실상 행동으로 범한 죄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려는 생각도 충동적으로 떠오르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 결코 아니다. 오래 동안 궁리해 본 후에 결행한 일이므로 사실상 행동으로 범한 죄가 된다. 이처럼 생각으로 범한 것도 인간의 행동으로 지은 죄가 된다.
불순종이 죄의 본질이라고 하면 구원의 길은 당연히 순종이 된다. 불순종하려는 행동과 생각을 하지 않으면 구원 받는다. 순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스스로의 성찰과 수양과 노력과 실천이 따라야만 한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명령을 따르면 어떤 유익이 생기는지 잘 가르치면 그대로 순종하려는 자들 즉, 구원 받을 수 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나온다. 불순종이 죄의 본질이라고 정의해버리면 본의는 아니지만 인간의 공로에 따른 행위 구원이 옳다는 결론을 낳는다.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해보라.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생각처럼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선악과 금령 자체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해 묵상하면 된다.
간단하게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당연히 하나님이 없으면 선악과도 선악과 금령도 생길 수 없다. 그럼 그분께 불순종하려는 생각이나 행동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나 그 전에 불순종하려고 오래 동안 궁리한 것은 죄가 아니게 된다. 말장난하려는 뜻이 아니다.
선악과 금령 자체가 없으니까 그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말고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일만 따져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부부끼리 맛있는 과일을 따서 서로 나눠먹었으니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칭찬 받아야 할 선행이다.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주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죄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반대로 따져보면 순종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하니까 구원을 받아야하는 죄의 본질도 그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고 십자가 구원에 맞추어서 죄의 의미를 수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본질에 따르면 반드시 십자가 구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아담이 임의로 따먹을 수 있게 허용했으나 유일하게 선악과만 금지시켰다. 그마저 따먹었으니 더 이상 그분의 통치를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죄의 본질은 그래서 불순종한 행동이나 하려는 생각보다 앞선 인간의 영적 상태로 그런 불순종으로 이끈 근본적인 인간의 마음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 그분이 나에게 전혀 필요 없고 아무 관계도 없다는 완악한 고집이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신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가 되라는 명령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셋째 명령인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은 이미 그 전에 둘째 명령도 어긴 셈인데 그것이 불순종보다 앞선 아담의 영적 상태다.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라는 둘째 명령을 지킬 마음이 확실하다면 자연히 셋째 명령도 기꺼이 지키게 된다.
그렇다고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아예 관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은 것은 전혀 아니다. 도리어 더 큰 욕심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기 멋대로 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선 자기가 대신 차지하겠다는 교만이었다. 바로 그것이 죄의 본질인데 선악과 금령은 인간더러 그런 욕심을 절대 품지 말라는 의미였다.
주인은 엄연히 따로 있다.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서 이미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과일을 따먹은 최초 인간은 복잡한 쇼핑몰에서 엄마 손을 놓아버린 아이와 같다고 필립 얀시가 말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싫고 귀찮아서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벗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거역할 줄 알면서도 금령과 자유의지를 준 것은 차고에 고급 차를 두고 여행을 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면서 그 차의 열쇠까지 맡긴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제가 생각한 비유인데 그래야만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인간) 간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럼 창조 때부터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세 번째로 주신 명령이라는 관점에 합당한 또 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 미국 목사의 설교에서 들은 것이다. 한 대형교회가 주일예배 때마다 주차장이 모자란 것을 본 바로 옆의 오피스빌딩 사장이 자기 건물 주차장을 무상으로 마음 놓고 사용하라고 허락해준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그 사장은 딱 한 가지 조건만 걸었는데 일 년 내내 그래도 되지만 신년 첫 주일만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 회사에 신년 하례 같은 특별행사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 년에 하루 만이라도 그 주차장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그것이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음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한 번의 제한조차 없으면 교회와 교인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소유였다고 착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사할 것이라고 염려한 것이다. 주차장을 마음 놓고 사용하되 엄연히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말라는 너무나 지키기 쉬운 조건이었다.
선악과 금령도 마찬가지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소유이자 당신께서 궁극적으로 통치하는 곳이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그곳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표식이었다. 선악과를 빼고는 다른 모든 과일은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대해 소유권이 없는 대신에 그 땅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용권을 받았다. 당신을 대신하여 관리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셋째 명령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잘만 관리하면 그 전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선악과 금령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었다.
하나님이 (최초) 인간에게 유일하게 요구한 사항은 이 땅(에덴)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 주인은 만물 중의 최고인 인간의 차지가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럼 최초 부부가 선악과를 따서 함께 먹은 것은 아주 선한 일이다.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이 있다고 가정해도 윤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 되는 죄의 본질이 윤리적인 차원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 선한 행위가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죄가 되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 혼자 멋대로 살겠다는 것이 아무리 선하고 경건한 모습을 나타낼지라도 성경이, 아니 하나님이 규정하는 죄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 되시는 당신의 절대적 권한을 인간이 대신 차지했기에 그분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죄가 된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최초 인간 부부는 스스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그분을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이 땅을 자기들이 독차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어떤 잘못된 행위를 했거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도적적인 결함은 없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자의에 따라 능동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을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어서 더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아담은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선악과를 따먹을 당시에는 자기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경고했으나 불행하게도 그는 죽음의 의미를 잘 몰랐다. 아직 육체적 죽음은 에덴에 일어나지 않았다. 육체적 죽음이 어떤 상태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선악과 금령은 초등학생더러 미적분을 풀어보라는 것처럼 너무 무리한 요구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 금령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다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고 또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고 힘주어서 강조했다. 자기들이 금령을 따르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열렬히 원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최소한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정반대의 삶이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다른 과일까지도 먹지 못한다고 했지 않는가?
최초 인간은 학교 생물시간에 배우듯이 지능이 아주 낮은 미개한 원시인이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그렇게 창조한 후에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셨다. 피조세계를 당신 대신에 다스릴 임무를 감당해야하므로 아담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셨음이 틀림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최초로 여러 생활 방식을 개척해야 하므로 현대인들보다 지식은 적어도 지능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문제는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기더라도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 욕심이 너무 강해졌고 또 스스로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자 자신이 예상 기대 계획한 것은 단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정반대의 상황이 닥쳤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너무 부끄럽고 불안해져 견딜 수 없었다. 비로소 정녕 죽는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그런대로 실감이 나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두려워져 에덴의 숲속 깊이 자꾸 숨어들어갔다.
여호와는 모든 경위를 다 아시고 그를 먼저 찾아오셨는데 “아담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라고 물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를 책망하지 않았고 그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아담더러 대답해보라고 물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리 없었음에도 말이다.
여호와의 뜻은 “지금 네가 나의 낯을 피해서 숨어들어간 곳이 네가 정녕 있어야할 곳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선악과 금령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한 뜻이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아담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하려 했다. 하나님의 관할 밖에서 그분과 전혀 관계를 갖지 않고 혼자서 거하려고 시도했다. 비유를 하자면 방금 출생한 아이가 이성이 생기자말자 친부모를 부인한 것을 넘어서 부모더러 그 집에서 나가라고 내쫓은 셈이다
죄의 본질
하나님의 그 질문으로 아담이 최초로 범했던 즉, 성경이 말하는 죄의 의미가 더 확실해졌다. 흔히 생각하는 나쁜 행동을 한 윤리적 죄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종교적 죄도 아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 살고 죽느냐 생명이 오가는 존재론적인 죄였다. 그 결과 모든 인간으로 원죄 하에 태어나게 타락시켜서 본성적으로 지니게 된 죄다. 예수님의 대속죽음의 보혈로만 용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죄다. 그로부터 모든 윤리적 종교적인 죄들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적인 죄다.
주의할 점은 단순히 하나님의 실존을 못 믿는 죄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고 만드신 만물 안에 당신의 신성과 권능을 충분히 계시해 놓았기에 어느 누구도 그분이 없다고 핑계대지 못한다. 불신자들도 절대자, 신, 조물주, 하느님 그 명칭이야 어떠하든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실존을 대부분 인정한다.
불행하게도 많은 현대인들이 진화론에 현혹되어서 창조주의 존재조차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창시자 다윈은 이미 창조된 물질이 선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종에서 종으로 진화되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자신의 이론은 허구로 그칠 것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진화론을 발표할 때부터 자기 의견에 확신이 없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진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자료와 증거는 턱없이 부족하므로 다윈도 결국은 창조가 옳을 것이라고 미리 인정한 셈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실존하는 줄 알거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그분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만 도덕적 종교적인 행위와 말과 생각의 잘못은 이차적인 죄일 뿐이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My Way”노래를 부르며 평생을 사는 것이 죄의 핵심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으면 무죄이나 밖에 있으면 유죄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 같지만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구원의 방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만약 인간이 자기가 잘못 행한 행동과 말과 생각이 죄라면 그것들을 고쳐나가면 된다. 그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실 이유가 아예 없다. 성령의 간섭으로 죄인의 내면을 새롭게 뒤집어줄 필요도 전혀 없다.
성경은 그렇게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나아가 스스로 선해져서 구원의 합격점에 드는 일이 가능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한다. 죄의 본질이 아담이 하나님의 품에서 뛰쳐나간 것이므로 한 죄인의 존재 전체를 당신의 품 안으로 다시 안아주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다. 하나님 밖에 있던 자가 하나님 안으로 옮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아버지가 되고 인간은 그분의 아들이 되는 부자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인간이 예뻐서, 선하고 의로워서, 정성과 치성을 바쳐서, 간절히 소원해서, 성경의 진리를 많이 알아서, 기독교 교리를 실천해서 등등은 구원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거룩해지려는 모든 이의 노력은 도토리 키 재기에 그칠 뿐이다. 그렇게 따지면 모두가 구원 받든지 모두가 심판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죽어 마땅한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그 죄 값을 완벽하게 치렀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 은혜를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의 통치 밖에 있던 자를 당신 안으로 직접 옮겼으니 유효한 참 구원이다.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성경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한다. 십자가 구원은 유일성, 절대성, 영원성, 완전성을 지니므로 모든 다른 구원의 길에 대해선 배타성을 띌 수밖에 없다. 구원의 방식을 두고 종교 간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구원의 길(the best way)이 아니라 유일한 길(the only way)이다.
그 이유는 아주 자명하다. 성경만이 유일하게 죄의 본질을 인간이 하나님의 밖에 있으려는 의도적인 완악한 고집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자기 뜻대로 자기 인생을 꾸려가려는 노력을 칭찬하면 했지 절대로 제일 먼저 용서받아야 할 가장 크고 근본적인 죄라고는 정의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인들에게 죄의 본질에 대해서 성경대로 정확히 설명해주면 틀림없이 신자더러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을 믿고 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하나님 독생자이자 구세주라면 하나님께 저주 받아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리 없다고 믿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했다. 우상을 믿거나 무신론자들인 헬라인들은 인간이 선하게 살았던 공적이 전혀 없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믿으면 구원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비방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의 본질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다. 핏대를 세워가며 누가 옳은지 틀렸는지 따질 문제가 아니다. 죄가 도덕적 결함이라면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의 길이 맞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 죄의 본질이면 구원의 길은 하나님 안으로 옮겨지는 것 하나 뿐이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반드시 덧입어야하기에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된다. 성경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 담화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위에 설명 드린 죄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구원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 되겠다는 고집이 바로 죽어 마땅한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다.
타락 담화를 처음 시작하는 글에서 어떤 논쟁이든 토론할 범주와 사용할 단어의 정의까지 미리 정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살펴본 것처럼 죄의 정의가 다르면 구원의 의미는 물론 그 방식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이 둘 중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조와 진화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옳고 나머지는 반드시 틀린 것과 같다.
창조 경륜에서 보는 선악과 금령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존 여건을 다 마련하신 후에 당신의 형상을 닮게 인간을 만드셨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영혼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서 당신과 교제 동행할 수 있게 했다. 인간으로 당신을 감사 찬양 경배하면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다스리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것이 둘째 명령인데 선악과 금령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경륜으로 따지자면 사실은 둘째 명령이 셋째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는 그분의 청지기 직분을 절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이 땅의 주인으로 하나님이 따로 있음을 부인만 하지 않으면 그래서 그분의 통치를 받기 원하면 당신께서 모든 선한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뜻이다. 그 금령을 어긴 것은 그분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나아가 이 땅에서 그분의 청지기 노릇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자기 앞길을 개척하며 얼마든지 더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했으나 전혀 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는데 스스로 그 형상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혼의 작동도 멈춰질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그분이 주시는 모든 선한 것의 공급도 중지된다. 인간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그분을 밀어냈으니 스스로 자기 생명줄을 끊은 셈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 주신 둘째와 셋째 명령을 다 거역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관리하라는 둘째 명령이 싫으니까 셋째인 선악과 금령도 어긴 것이다. 인간에겐 짐승에게도 주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첫째 명령만 남았다. 인간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나님 밖에서 스스로 자기가 주인이 된 자들이 자신과 가족의 형통과 출세만을 추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에겐 창조의 의미가 다 사라졌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지녀야 할 참 생명이 없어졌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런 죄인과 일대일로 맞바꾸어 자신의 전부를 주셨다. 예수 십자가 구원은 인간을 참 생명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며 기독교도 종교가 아니라 참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의 축복을 계속해서 풍성히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한 교회가 이웃 빌딩의 주차장을 신년 첫 주일만 이용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비유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에덴의 주인임을 인정하면 선악과를 먹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럼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권능 가운데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창조 당시의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셨던 인간의 본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을 무시 부인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 한 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난과 비극의 시발이었다.
많은 신자들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구원과 구원 후의 성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를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하고도 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만 정의한다. 그러니까 기독교 교리나 성경의 계명에 불순종하면 혹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지 자꾸 불안해한다. 단순히 불순종을 죄라고 인식했기에 단순히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부를 못해 성적이 내려갔기에 성적이 오르려면 공부를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구원마저 일종의 순환논리의 틀에 가두어버리는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말에는 행위 개념이 내포되므로 순종은 구원 후의 신자에게 적용되지 구원 자체와는 무관하다.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죄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된 것이므로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그분을 주인으로 삼으면 구원 받는 것이다. 또 그분을 일단 진심으로 주인으로 모시면 성령이 내주해주시기에 구원의 취소도 없다.
죄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의외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여기더라도 참 구원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근본적인 죄와 우리가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개별적인 죄와의 관계가 무엇이며 구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성경의 타락 기사를 통해서 하나씩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1/11/2020)
이 글은 조금 길지만 꼭 한 번 천천히 잘 읽어보시길 권면드립니다. 그런 후에 이왕이면 성경문답 사이트의 공지 글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도 함께 다시 읽어보십시오. 샬롬!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