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7:8-16) 인간에게 없어선 절대 안 되는 것

죄인 구원 담화 (5)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8-16) 

 

다윗의 성전건축을 거절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맺는 언약을 통해 창세기에 계시한 원시복음을 더 구체화시켜나가는 과정을 살펴보는 중입니다. 본문은 그 네 번째로 언약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어도 다윗과 그 후손에게 당신만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이 언약을 맺게 된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은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절)라고 시작합니다. 다윗 왕이 가나안 족속들을 다 무찌르고 이스라엘 왕국을 든든히 세운 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창성케 해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언약이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주변 열강들 앞에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보배 같은 소유가 되라는 모세 언약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에 모세의 유언대로 율법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굳이 새로운 언약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다윗과 그 후손에게 또 다시 풍성한 은혜를 약속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윗으로선 더 이상 다른 족속들과 전쟁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궤를 온전히 모시고 싶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그런 의향을 드러내었더니 나단은 왕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라고 답해주었습니다.(2-3절) 나단으로선 아주 선한 일로 왕이 소원하고 이젠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에 바로 동의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여호와가 나단에게 임하여 왕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계시해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라고 반어법으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부터 밝혔습니다. 이어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날부터 집에 살지 않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당신의 거주지가 집이 아니라 장막과 성막이라고 합니다. 집은 한 곳에 고정되어서 옮길 수 없는 건축물을 뜻하고 장막과 성막은 언제든 분해 조립해서 옮길 수 있는 이동식 구조물입니다. 하나님은 거주하는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지 당신의 백성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불신 세상에도 임재 하여서 통치하시고 영계에서 모든 천사들도 지휘하십니다. 

 

성전을 완공한 후에 솔로몬도 봉헌 기도를 하면서 그런 점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나님은 땅에만 거하지 않으며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세 번이나 강조하며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높은 하늘은 물론이고 그 넘어 영계에까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둘째로 집에 살지 않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고 합니다. 성막(tabernacle)도 장막(tent)으로 이뤄졌지만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장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장막을 치고 생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제사를 받는 성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부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라는 뜻으로 회막(會幕)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항상 함께하면서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초월해 혼자 따로 계시지 않고 특별한 의도와 계획을 갖고 그들의 삶과 역사에 직접 개입하고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시하는 대로 따라다녔고 그 두 기둥이 도적떼와 광야의 변덕스런 기후에서 그들을 지켜주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당연히 그러하지만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제사를 받을 때에도 장소, 시간,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 어느 지파에게도 당신을 위해서 백향목 집을 지으라고 요구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었다고 확인시켰습니다.(7절) 성전이  어디에 어떻게 세워지든지 오늘날로 치면 교회 건물이 당신의 일차적인 관심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전 건축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감사 찬양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제사를 통해 그들의 죄를 사해주며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십니다. 수시로 옮겨 다녀야했던 광야생활에서도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아침저녁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방 대적이 파한 지금 이스라엘이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므로 조립식 장막 대신에 특정 장소에 성전을 견고히 지을 필요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전에 관심이 없는 하나님

 

그럼에도 하나님이 다윗의 요구를 거절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지 못한다고 일차 거절 하신 대신에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준다고 하신 말씀(11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전에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겨다가 다시 찾아오는데 우여곡절을 겪고 애꿎은 희생자들도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결국 다윗이 율법의 격식대로 예루살렘으로 매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너무 기뻐서 웃옷을 벗고 행렬 앞에서 춤을 추었고 본처인 사울의 딸 미갈로부터 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고 경박하게 굴었다는 야단까지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의 삼하6장이 말하는 스토리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언약궤를 거룩하게 안치하려고 성전건축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집이 없어도 너희 가운데 다녔다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지금 블레셋에서 언약궤를 다시 찾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다윗 네가 행한 바가 하나도 없다고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언약궤는 혼자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탈취해서 자기들 다곤 신당에 두었으나 그날 밤에 바로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넘어지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겨버렸습니다. 가드로 옮겼으나 성읍 사람들에게 독종이 번져 죽음의 벌을 받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노여움을 샀다고 보고 최대한의 성의를 다해서 이스라엘 지경인 벧세메스로 넘겨주었습니다.(삼상5,6장)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대로 쳐들어가서 되찾아온 것이 아니며 무생물인 언약궤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약궤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상황과 사람들을 주관하여 행하셨고 또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아무리 큰 고난에 빠져 있어도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져서도 당신께서 사탄과 그 졸개들을 다 멸망시키고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당신의 언약궤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당신의 권능과 이름은 당신께서 높인다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네가 성전을 짓기로 결정했다면 당신의 권능은 시간과 공간의 장애가 없이 역사한다는 이 진리만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당신을 집에서 가만히 살도록 제발 혼자 놓아두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우상 신들은 신전에 장엄하며 기괴한 모양을 한 조각상으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합니다. 그 신자들이 최고의 치성으로 갖다 바치는 풍성한 제물과 호사스런 음식과 술을 받기만 합니다. 그렇게 받은 것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정도에 비례해서 상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런 신들은 사실 실존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개념과 사상일 뿐입니다. 인간 제사장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에 따라 신의 행세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들은 자기 백성들의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니지 않으며 실존하지 않으니 다닐 수도 없습니다. 때로 사탄과 그 졸개들이 그 배후에서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 아래 있기에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로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고대 세계의 최강국 애굽의 최고의 신들 열 개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것도 80이 넘은 노인의 말 한마디에 무참하게 패배했지 않습니까? 첫째 나일 강이 피 빛으로 변하는 것과 둘째의 개구리 재앙까지는 애굽 술사들이 눈속임수로 비슷하게 흉내를 냈습니다. 세 번째 모든 생축과 사람에게 갑자기 이가 생기는 것은 도무지 조작이 안 되므로 술사들 스스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이라고 실토했습니다.(출8:19)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과 홍해에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적들을 베풀었고 먹고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에선 당신의 백성들의 장막과 성막 안에서 실제로 걸어 다니셨던 것입니다. 

 

나단이 대신 다윗에게 전한 메시지는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이며 특별히 너희를 택한 이유와 목적을 절대로 잊지 말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정성과 열심을 많이 바친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서 복을 주는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당신만의 완전하신 계획대로 이 땅과 너희를 다스려 나갈 것이므로 그대로 순종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하라고 너희에게 이미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다섯 축복

 

그 후에 하나님은 성전건축 문제까지 포함해 다윗에게 크게 다섯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먼저 너를 목양하는 양치기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 왕으로 세웠기에 항상 너와 함께하여 네 원수를 네 앞에서 멸했다고 합니다. 다윗이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경과를 회상한 후에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므로 네 이름을 창대케 해주겠다고 또 모세에게 애굽에서의 당신을 회상해보라고 한 후에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겠다고 하신 약속과 내용과 형식에서 동일합니다.  다윗더러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계승자가 되어서 그대로 온전히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내 백성 이스라엘도 한곳에 정하여 즉,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여서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고 악한 종류들이 이전처럼 해치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고 당신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한 내용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준 것입니다. 

 

셋째로 당신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조상들과 함께 누울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왕궁을 짓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개인적으로는 전쟁터가 아니라 자연 수명에 따라 평안히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은 자연수명을 다하고 평안히 죽어 선조들과 함께 묻히면 성공한 인생으로 여겼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하나님은 물론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희생 수고한 공로를 충분히 알고 있고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누가 봐도 다윗이 적임자인데도 그의 몸에서 날 솔로몬더러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합니다. 나중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부탁하면서 함께 전해준 하나님께 계시 받은 말씀 안에 하나님이 굳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밝혀져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22:8,9)

 

다윗은 양치기를 하다가 골리앗과의 전투에 불려 나온 후로 평생을 손에 피를 묻히며 전쟁을 치르며 보냈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제일 순전하여 당신의 마음에 들었어도 평강의 사람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윗의 삶과 인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할은 사방대적을  파하여 평화를 이루고 성전건축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거나 특별한 임무 전부를 다 맡기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의인도 예수님 빼고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치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평생소원인 가나안 땅 입경을, 다윗도 평생소원인 성전건축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충실한 종들은 평생토록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헌신하고 죽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현실정치도 지혜롭게 잘했지만 사실은 아버지 다윗이,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다 닦아 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성전 건축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피를 많이 흘린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은 살인과 전쟁은 절대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야 했고 또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인내의 한계에 차서 그 땅에서 몰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또한 당신께서 안타까이 여기며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 모세 언약대로 율법을 잘 지키며 제사장 나라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번째 약속까지는 사실상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다섯째로 성전을 지은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다윗에게만 새로 주신 약속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잘 마쳤으니까 그 보상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솔로몬의 무리한 성전 건축으로 백성들이 크게 고생했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정치적으로 잘못 판단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또 그것을 빌미로 삼아서 여로보암이 북왕국을 건설해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대부터 왕위가 흔들렸는데도 하나님은 그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케 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할리는 없으니까 당신께서 약속하시는 은혜의 핵심이 이 말씀에 숨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왕권이란?

 

하나님이 그의 나라라고 말했지만 솔로몬 개인의 나라가 아니며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도 영원히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이 언약을 받은 때가 BC 995 년경이었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경 앗시리아에, 남왕국 유다는 BC 586 년경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기에 길어야 겨우 사백년 정도 지탱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적 왕국에 관한 약속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건설한 어떤 제국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지금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는 미국도 백년도 지나지 않은데 눈에 띄게 쇠퇴해져 갑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므로 견고해질 왕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뜻합니다. 문제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온 우주에 그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도 다윗의 후손을 지명하여 그 왕위가 영원토록 견고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피신한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선조인 야곱이 죽기 직전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49:8-10)

 

유다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는데 그 통치가 실로가 오시기까지 견고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주신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데 실로가 오실 때까지 유다 왕국의 위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명인 실로를 의인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예언한 유다의 왕국도 인간이 세운 눈에 보이는 왕국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78:59,60은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즉,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같은 시편 68-69절은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여서 시온 산 성소에 지금 다윗에게 약속한 것처럼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고 그 앞에 세상의 모든 백성이 엎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59:20)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죄과에서 구해주려고 시온에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유다에게 예언한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시온에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기까지라는 뜻이 됩니다. 다윗의 언약은 그래서 원시복음에서 예언한 특별한 여자의 후손이 다윗 가문에서 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백성이 세운 왕이지 하나님이 세운 왕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세운 다윗은 유다 지파 베들레헴 출신인 이새의 아들로 야곱의 예언이 일차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서 아직도 다윗 왕국의 영광으로 회복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다윗 언약은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구약의 역사를 원시복음이 실현되도록 이끌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 복음을 완성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 때문입니다.(엡1:10)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당신의 피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오직 하나로, 예수로 시작하여서 예수에 의해서 성숙되어지며 예수에 의해서 완성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지금도 예수님의 영원히 견고한 왕권이 이 땅과 신자에게 실현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에 대해서 실감하고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작금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보면 오히려 예수님의 왕권이 점점 더 약화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기독교, 교회, 목회자는 물론 신자들까지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거꾸로 종교 중에서 가장 비난을 많이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성전을 소유한 나라

 

다윗 언약에서 그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문맥상 여호와 성전을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단 그 성전에 하나님이 살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에 당신께서 백성들의 집을 지어주고 범사를 거룩하게 보호 인도하기 위해 그들 사이에 걸어 다니시는 나라입니다. 출애굽과 광야에서 그런 은혜를 실제로 체험한 이스라엘은 그분께 계시 받은 거룩한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맹세를 끝까지 지켰다면, 간혹 어겼어도 바로바로 회개했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통치는 지금까지도 영원히 견고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상황에 대입하면 그의 나라는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교회 안에 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의식과 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것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교회 밖의 인간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박해 받는 자와 특별히 죄의 오염으로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하는 자들의 장막 가운데 걸어 다니시고 당신만의 긍휼로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아래 들어온 그분의 백성도 바울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귀해서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바치는 그분의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나아가 신자가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기로 헌신한 후에도 평생토록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철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의 조건 없는 무한한 긍휼만을 소망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자신과 삶과 일생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분이 살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면 죽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자들로만 모인 공동체가 있다면 그 안에 시기 다툼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라도 교회와 신자는 세상 앞에 제사장나라로 거룩하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에 멸망당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약해서가 절대 아니라 시편 예언대로 하나님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을 여호와 앞으로 초대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에게 동화되었습니다. 그들 나라가 현실적으로 형통하고 풍요롭게 사는 모습이 자기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피의 맹세를 한 대로 하나님은 그들이 따르며 함께 우상숭배 했던 바로 그 나라에게 멸망당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큰 죄가 되는지 늦게나마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증거 되고 또 모든 신자들이 그 진리의 도에 목숨을 걸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은혜를 누렸다는 것이 단순히 이신칭의 교리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값을 지불하고 즉, 그분의 생명과 맞바꿔서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신자도 당연히 자기 생명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자만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받아들여 믿으면 어떤 흉악한 죄인도 거룩한 새 생명으로 살려주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또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두세 명이라도 주님을 함께 따라가면 그 주변이 아무리 추해도 깨끗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형통을 부러워했듯이 죄송하지만 지금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거꾸로 세상 사람들이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모습을 훨씬 더 좋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 종교처럼 교회에서만 하나님이 살도록 가두어두었습니다. 교회생활에 열과 성을 바치는 양에 비례해서 현실적 풍요와 형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소금이 되어 세상이 썩지 않게 해야 하고 빛이 되어서 불신자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거꾸로 세상에 오염되어갑니다. 인간사회에 통용되는 세속적 진리와 지혜를 앞 다퉈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오히려 교회와 신자들을 자기들과 같거나 더 못하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내심 교회와 신자만은 그러지 않기를 기대하고 지켜봤는데 오히려 자기들보다 못하니까 더 크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교회에서 잘 살게 하려고 모셔놓고 열심히 교회에 가서 치성을 다해 섬깁니까? 물론 주일 하루는 따로 떼어서 주님께 온전히 거룩하게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집을 짓고 우리 안에서 걸어 다니십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처음에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을 때 뿐 아니라 주님을 믿고 난 이후로도 우리가 그분에게 정말 자신 있게 당당하게 바칠만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왕권뿐 아니라 십자가에 실현된 구원의 진리는 영원토록 견고합니다. 아무리 많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 그 전부가 부인 외면 대적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경륜대로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인간은 썩어 없어질 들풀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이 그를 멀리할수록 더욱 가까이 오시고 더욱 밝게 빛날 것입니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깊어지는 법입니다. 세상이 썩어가고 흑암에 파묻힐수록 신자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여지도 많아집니다. 신자의 중심이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향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신자가 모르는 사이에도 사탄의 흑암의 세력을 다 무찔러주십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인생의 과제가 결코 돈을 주인으로 모시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평생 주님을 위해 고생만 하며 자신의 개인적 열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 언약의 수혜자이자 그대로 실현해야 할 소명자입니다. 예수님만이 처음이자 끝이어야 합니다. 신자 인생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그 삶과 일생을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주도하도록 개입시켜선 안 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자는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8/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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