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200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6,17)
매일 새로 생기는 86,400원의 새 돈
어떤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만일 당신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86,400원의 새 돈이 늘 있다면 그것을 매일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그런데 그 돈을 하루 동안에 다 쓰지 않으면 은행에 저축을 해도 그날 자정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매일 그 돈을 잘 쓰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신경을 쓸 것이다.”
이 목사님이 왜 하필 십만원, 백만원도 아닌 86,400원을 예로 드셨을까? 86,400이라는 숫자를 보면 떠오르는 것은 없는가? 그럼 1,440은 어떠한가? 아직도 모르겠는가? 마지막으로 60이나 24는 어떠한가? 하루는 24시간이고 한 시간은 60분이므로 하루 전체는 1,440분이며 1분은 또 60초이므로 하루는 86,400초를 의미한다.
매일 새로운 시간이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주어지는 데 그것은 그 날 안에 무조건 다 써야 한다. ‘시간은 돈이다’라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86,400초라고 해선 그 귀한 것이 별로 실감이 안 난다. 만약에 고급 샐러리맨이 있는데 일초당 일불의 엄청난 연봉을 받는다 치면 하루 종일 24시간 일하면 86,400불이 된다. 이제 조금 실감이 나는가? 그 돈을 그 날 안에 다 쓰지 않으면 그 날로 몽땅 없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가장 유익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않겠는가? 가만 두었다가 사라지게 만드는 바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초라는 시간의 단위가 순식간에 지나버리니까 별로 아까운 생각이 안 들지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찰나에 달린 경우도 많고, 순간의 결정이 평생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는 데 그 때의 일초는 일 불이 아니라 수 백만 불의 가치도 가질 수 있다. 일초는 별로 아쉽지 않지만 그것이 3,600개가 모인 한 시간이라면 시간당 수익이 비록 최저 임금 7불에 불과해도 슬슬 아까워지기 시작한다.
돈은 한 번 없어도 다음 번에 다시 두 배, 세 배를 벌면 되고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만 시간은 한 번 낭비하면 두 번 다시 찾아 먹을 수 없다. 그 목사님의 말씀대로 은행에 저금도 되지 않는다. 그 날 하루에 다 써야 한다. 매일 은행에서 방금 꺼내온 완전한 새 시간 86,400초를 낭비한다면 얼마나 아깝겠는가?
시간의 가계부를 적자
우리 한 번 상상해보자. 만약 정말 반드시 그 날 안에 다 써야 하는 86,400불의 새 돈이 매일 생긴다면 무엇부터 하고싶은가? 어떻게 사용하겠는가? 한 며칠은 잘 쓸 것이다. 벤츠도 사고 매일 집 한 채 씩 사는 다운페이로도 지불하고 어떤 날은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도와 주기도 할 것이다. 생각만해도 즐겁다.
그런데 만약 몸이 아파 외출을 못했다든지 해서 제 대로 그 돈을 다 쓰지 못했다고 가정하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 가장 아쉽겠는가? 맛 있는 것을 제대로 못 먹은 것일까? 여행을 못한 것일까? 골프를 싫컷 못 친 것일까? 책을 사 읽지 못한 것일까? 각 자의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그럼 이제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 올 차례다. 하루 일당이 86,400불 즉 연봉이 3,100만 불이 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매일 86,400초의 새 시간은 주어진다. 이 시간을 제대로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게으르게 낭비했다고 치자. 여러분은 무엇이 아쉽겠는가? 낭비했던 그 시간에 내가 주로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래서 그것 대신에 그 시간에 무엇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드는가?
금주 한 며칠간 제 개인적으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겨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정말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12:25) 하신 성경의 말씀 그대로였다. 이 년 전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던 때와 같은 증세가 다시 나타나려고 했고 저녁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그때 언뜻 생각나는 것이 내가 하루 종일 무엇했나 싶었다. 아무 한 것이라곤 없이 오직 번뇌로 86,400원을 날려 버렸다.
모든 사람이 자기 수표책은 열심히 관리한다. 주부는 또 가계부를 열심히 쓴다. 그런데 왜 시간의 가계부는 쓰지 않는가? 만약 정말 솔직하게 분 단위로, 아니 시간 단위로 시간의 가계부를 기록한다면 우리 모두 아마 거의 공란 아니겠는가? 어렸을 때 방학 숙제 할 때 마다 누구나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일기 쓰기였지 않은가?. 매일 한 것이라곤 놀고 먹고 잔 것 뿐인데 일기를 쓰려니 쓸 것이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 버릇이 커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일까?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따로 없다. 시간을 쪼개 쓰는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하루하루를 아깝게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 하루보다 시간 단위로 쓰는 사람이 더 크게 성공하고, 시간 단위보다 분 단위로 아껴가며 관리하는 자는 세상에 최고가 된다. 일초가 아쉬운 자라면 못할 일이 없다. 반면에 하루가 흘러가도, 한 달이 흘러가도, 몇 달이 흘러가도, 일 년이 흘러가도, 십년이 흘러가도 마냥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놀고 먹은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
찬양의 십일조
신자가 적어야 할 시간의 가계부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시간의 십일조를 따로 떼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는가? 하루가 24시간이니까 2시간 반을 성경보고, 기도하고, 묵상하든지 교회 봉사하는 일에 바쳐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렇게 할 수 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 하루 몇 시간만 하라는 법은 없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사43:21) 신자는 어떤 유익한 일, 이웃을 돕는 일, 하나님의 뜻 대로 하는 일 등을 시간을 쪼개가면서 관리할 필요는 없다. 오직 한 가지만 하면 된다.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24시간을 감사와 찬양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 단위로 나눠 관리하고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열심히 하고자 하는 소원과 능력을 주시고 나아가 대신 해 주시기까지 하신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면 된다.
저녁에 주무시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 보라. 딱 한 가지 기준으로만 그 날 하루의 시간들을 정리해 보라. 염려하며 세상으로 흘러 보내 버린 시간과 찬양하며 하나님께 올려 드린 시간의 비율을 매겨보라. 구태여 시간, 분 단위로 쪼개고 아낄 것까지는 없다. 염려의 가계부 대신에 찬양의 가계부를 적으면 된다.
신자가 처음으로 시간의 가계부를 적으면 이 염려와 감사의 비율이 아마 백대 일, 천대일도 넘을 것이다. 이 수치를 줄여 나가 보라. 하루에 염려 하는 시간만큼 감사하는 시간이 같은 자가 신자 중에도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 비율이 일대일만 되어도 염려는 감사에 묻혀 없어진다. 아니 감사의 은혜가 염려의 번뇌보다 그 효율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 1에 염려 10이라도 감사가 염려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하루 시간의 1/10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종교적인 행사로 하루의 십분의 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설사 거의 하루 종일을 힘들고 어렵고 짜증나고 분노에 휩싸이고 심지어 시험과 죄악에 빠진 적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으로 1/10을 쓰라는 것이다. 기도하고 묵상할 때도 교회 봉사할 때도 하나님 찬양으로 시작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마쳐야 한다. 이 찬양의 십일조를 드리기만 해도 신자의 삶은 매 순간 “내 잔이 차고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염려와 감사의 비율이 1:2, 1:10, 1:100으로 역전된 생활을 여러분 한 번만이라도 상상해 보라. 그 인생이 성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어디까지 요구하는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 잠언에 비록 염려가 번뇌케 한다고 했지만 그 말씀 끝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선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만큼 이 세상에서 더 선한 말은 없다.
우리 모두 당장 오늘부터 시간의 가계부를 적자. 시간 단위로, 분 단위로 유용하고 거룩한 일에 쓰자. 하나님이 매일 새롭게 주시는 86,400초를 정말 아끼자.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찬양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자. 그럼 우리의 삶이 그 순간부터 반드시 거룩과 의와 생명과 빛으로 가득 찰 것이며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확장 될 것이다. 염려는 후회와 실패만 낳지만 찬양은 기쁨과 성공을 낳는다. 염려를 찬양으로 바꾸어라. 그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이다.
하나님 아부지 안에서 그 분만을 기뻐하며
그 분만을 즐거워하여 늘 가슴이 부풀린 풍선처럼 곧 터져버릴 듯
그렇게 찬양하며 남은 여생 살겠습니다.
찬양드림의 결과를 인해 찬양이 아닌 찬양드림이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 듯..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