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02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한 여학생에게서 오랜만에 이메일로 소식을 전해 왔다. 한 마디로 미국생활보다 한국 생활이 더 적응하기 힘들다고 했다. 문화, 언어, 관습, 제도, 사고방식이 다른 외국 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들게 마련이다. 어학 연수차 와서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아 미국생활도 미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돌아 갔는데도 그렇다니 좀 놀라웠다.
한국은 모든 면에 눈감고도 다닐 만큼 너무나 익숙한 곳이고 미국은 모든 것이 불편 했는데도 그렇다면 언어, 문화, 생활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며 또 본인이 적응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리지도 않았다는 뜻이 된다. 친밀도와 상관없이 한국은 적응하기 어려운 사회고 생소함과 관계 없이 미국은 적응하기 쉬웠다는 말이다. 사회 자체가 친밀도와 생소함 둘 중에 하나의 특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의 폐쇄성과 개방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국 사람들의 생각이 깨어 있어 진보적, 전향적, 융통성이 있었다는 것일까? 근래 한국인들의 사고는 더 서구화 되었다. 사회 자체가 지닌 특성이지 그 구성원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움직여져 나가는 모든 부문의 작동 원리에 상식과 이성과 규칙이 통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미국은 제도와 법과 규범들에 일정한 원칙이 있고 그 적용에 원칙에 벗어나는 다른 어떤 것들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돈과 권세와 지위에 따라 원칙이 굽어지지 않는다. 법을 제대로 지키기만 하면 절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특별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인간의 기본 양심과 상식만 제대로 지키면 된다는 뜻이다. 그 학생이 미국이 적응하기 쉬웠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반면에 이런 부분에 관해 한국을 이야기 하자면 부끄럽게도 입만 아플 뿐이다. 우리 스스로 잔 머리 굴리는 데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 내지 자괴(?)하고 있지 않는가? 전 사회가 맨 아래에서 최고 위까지 전부 잔 머리 굴리지 않고는 굴러가지 않는 사회다. 누가 말을 하면 혹시라도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가부터 먼저 잔 머리를 굴려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주변 강대국에 당하기만 했던 순박한 백의민족이라는 긍지는 사라진지 오래다. 너무 이리 당하고 저리 치여 눈치만 늘었기 때문일까?
잔 머리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지능지수가 높은 것과는 다르다. 오직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지름길을 찾는가, 남보다 뒤쳐지지 않는가를 찾아내는 기술이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거나 원리원칙에 맞는가 틀렸는가라는 차원과는 별개다. 오직 어떻게 하면 편하고 빠른 방법으로 내가 의도하는 것을 달성하느냐만 강구하는 본능적인 기능이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생존 전술이지만 생존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위에 올라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멜에 더 충격적인 내용은 따로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 신앙의 열기가 식고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고 있는데 그 원인이 친척 오빠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 부모가 신학교에 보내 졸업시킨 후 거액의 권리금을 주고 교회를 인수해서 맡게 했는데 아주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이 학생의 부모가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불신을 해버려 전도하려 해도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이다.
사회 생활에 적응 못하면 신학교에 가서 목사 하면 된다는 발상 자체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너무 말이 안 된다. 잔 머리를 굴리지 못해 요령 부려 돈 벌 체질이 못되므로 부정부패 안 해도 되는 직업을 가지겠다는 뜻이다. 일면 순진한 면이 있어 보이지만 본인의 하나님에 대한 소명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아가 소심하고 융통성 없어 약삭빠르지 못한 자가 남들보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어수룩한 자식을 둔 돈 많은 부모가 그 앞날을 위해 짜낸 잔머리의 산물이다.
그들의 잘못도 크지만 교회가 한국 사회에 겨우 그런 정도로 비취도록 한 신자들 전체의 잘못이 더 크다. 아무 소명 없이 목사를 하겠다는 당사자의 용기는 참 대단하다. 하나님을 우습게 본 것인데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어수룩하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거꾸로 정말 영악하게 목사란 직업이 돈 잘 벌고 존경 받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식으로 택했는지 하나님 만은 아실 것이다.
직업으로 목사를 스스로 택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너무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 마저 인간이 분석하고 선택할 수 있는 양 착각한다. 종교의 자유와는 다른 문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 분석, 이해, 동의, 판단, 결단, 심지어 믿음과도 무관하며 그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절대적인 존재다. 인간의 어떠한 생각, 결정, 행동도 그 분의 위대하심, 전지전능하심, 거룩하심에 티끌만큼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오직 그 분만이 우주 만유의 주인이며 모든 결정과 섭리의 근원일 뿐이다. 내 필요와 부족과 생각과 계획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지금껏 한국 교회가 교인들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을 그저 일상 생활에서 어려움을 해결해주며 축복하는 분 정도로 가르쳐 왔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도 단순하게 고통에서 건져주고 죄를 사해주셨다는 정도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신앙을 자기 사회 생활을 돕고 더 살찌우는 한 방편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해 왔다. 그래서 목사조차 사회에 제대로 적용 못하는 자들의 도피처로 간주되고 교회도 권리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는 사업체처럼 취급한다. 신자마저 그렇게 하는 것이 아예 몸에 익어 있어 잘못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잔 머리를 굴릴 대로 굴리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회에 적응 하지 못하는 성격이나 기질의 차이를 메워주는 그런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다. 남에 비해 몇가지 부족한 결점을 고쳐주는 상대적인 하나님도 아니다.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 전 인생과 전 존재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시는 절대적 하나님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 진리, 사랑, 권능 또한 절대적이다. 새 생명, 새 소망, 새 믿음, 새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신다. 그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고 취해야만 하는 반응 또한 절대적 신뢰, 절대적 순종, 절대적 헌신뿐이다. 말하자면 잔 머리를 굴려 신앙생활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리의 잔 머리를 굴려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잔 머리 중의 잔 머리다. 이런 잔 머리의 극치가 없다. 순진한 것인지 겁이 없어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변개가 없으시고 거짓이 없다. 오직 영원토록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잔 머리로 대하시지 않으신다. 신자 쪽에서 더 이상 잔 머리를 굴리며 신앙 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다. 그 다른 생각의 극치가 십자가이며 신자에게 주는 메세지는 있는 모습 그대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오라는 것이지 않는가?
신앙이란 하나님 당신이 약속하신 것은 우리의 상태와 상관 없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신앙이란 그 분이 계획하신 모든 선과 거룩과 영광이 우리를 통해 반드시 드러날 것을 확신하고 그분의 섭리와 다스림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인간의 잔 머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 분의 다른 생각 안으로 불러 들여 이끌고 계심을 믿고 따라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세상이 아무리 잔 머리 천국으로 변했다 할지라도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 삶과 일생을 하나님이 책임 지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께 오직 감사와 찬양과 경배만을 돌려야 할 가장 큰 이유다.
것을 믿는것이다. 신앙이란 그 분이 계획하신 모든 선과 거룩과 영광이 우리를
통해 반드신 드러날 것을 확신하고 그 분의 섭리와 다스림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아멘!
그런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