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4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인생살이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무엇이겠는가? 고상하게 철학적, 영적 차원에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너무 중요한데도 항상 모자라 허덕이는 것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아무리 있어도 결코 충족해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돈이다. 신앙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모든 자에게 엄연한 사실이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현실의 삶에 매번 만족하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특별히 둘 다 자기 마음에 찰 때까지 양껏 충족시키려 드니까 그렇다. 그것도 동시에 말이다. 시간과 돈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면 누구나 생활에 재미가 없고 짜증나게 마련이다.
미국에 이민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주말이면 취미활동을 하고 휴가 때면 여행을 즐기는 등 더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풍요롭다는 것은 돈이 많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고, 여유 있다는 것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취미활동을 즐기며 사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부러워 이민 와놓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돈 버는 데 모든 시간을 소요하고 주일이면 교회 갔다 오면 끝이다. 돈은 그런대로 버는 데 시간이 없어 못 쓰고 또 아까워서도 즐기지 못한다.
돈과 시간의 두 가지 요소만 따지면 둘 다 많거나, 둘 다 적거나, 시간 혹은 돈 한 쪽이 많아 서로 불균형이 생기는 네 가지 경우밖에 없다. 세상에 이 둘 다를 만족할 정도로 풍부하게 가진 자는 거의 없다. 반면에 둘 다 적은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모든 자가 돈이 많으면 시간이 모자라고 시간이 남아 돌면 돈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따라서 어차피 서로 균형이 맞지 않을 바에야 한 쪽 불균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시간이 많고 돈이 적은 것보다 돈이 많고 시간이 적은 것을 선 택한다. 돈 쓸 시간이 없어 무덤에 갖고 가는 한이 있더라고 그렇다.
바울이 배운 일체의 비결
시간과 돈의 상관관계에 이 네 경우 외에 또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생각 못한다.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소용되는 만큼만 시간과 돈을 서로 줄이고 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시간이 남으면 돈 버는 일에 조금 더 투자하고 돈 버느라 도저히 쉬고 즐길 여유가 없다면 억지로라도 짬을 내어야 한다. 미국 사람이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이유가 돈을 우리 보다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여유를 위해 돈을 포기할 줄 알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고 했다. 현실의 삶에서 시간과 돈 사이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뜻이다. 분명히 궁핍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돈과 시간을 잘 조절하여 불균형이 생기지 않게 했기 때문에 항상 여유롭게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신자라고 무조건 돈에 항상 쪼들리고 검소하게 살아야 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사용 가능한 돈과 시간 사이에 균형을 잡아 자족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검소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이 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수전노, 일 벌레, 베짱이 식으로 한 쪽 극단으로 흘러 가선 절제된 여유가 생길 수 없다.
그런데 엄격하게 따져 이 둘 사이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당연히 시간이 돈보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없어도 즐길 수 있지만 시간이 없으면 즐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돈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시간이 돈을 위해 존재해선 안 된다. 오직 돈 버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시간은 무조건 희생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 찬 일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목적인 사람은 돈을 그 수단으로 쓰게 된다. 이 둘은 서로 상반 된 성격이라 한 쪽이 목적이 되면 다른 쪽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담이 받은 형벌의 의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어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다. 그 때 그가 받은 벌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였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한다고 했다. 평생을 도저히 짬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에 쫓기며 일해야 겨우 먹고 마실 것을 마련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지어서 그 벌로 우리더러 고생 한 번 죽도록 해보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은 아담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자기 마음 속에 생명과 삶의 참 근원과 능력 되시는 하나님을 제거하고 나니까 인생을 지탱할 수단이 물질로 바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세상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해줄 만한 것들만이 자기를 보호하고 생존을 가능케 해 주는 자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이 오직 돈을 위해 존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죄 아래 있는 불신자의 구체적 상태이며 죄의 본질적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 구원은 어떻게 해야 이뤄지는가? 이 순서를 처음 하나님이 의도했던 대로 다시 되돌리면 된다. 시간이 돈보다 우선인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신자다.(마6:3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원죄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구원 받은 신자가 천국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완전한 본으로 보여 주려 오셨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과 돈의 우선 순위를 바로 잡으러 오신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동안 시간과 돈의 불균형이 나타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삶을 사셨다. 새벽 미명과 밤 늦은 시간은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 낮 시간은 복음을 가르치고 질병을 고치며 천국을 선포하면서 인간을 사랑하는 사역에 전무했다. 오천명의 남자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없었고(돈의 부족) 또 해가 저물어 갈 수 없었을 때(시간의 부족)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자 모든 자들이 먹고 남을 만큼 하늘로부터 받았다.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전대와 먹고 마실 것을 휴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더러 말씀을 전한 사례비를 받아 자급자족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채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주님은 돈 보다 시간이 우선하는 삶을 사셨다. 나아가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오직 시간만을 위한 삶을 사셨고 그 시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하나님이 쓰라고 하는 일에, 가라고 하는 장소에, 만나라고 하는 사람을 위해 그 시간을 썼다. 거기에 소용되는 돈은 하나님이 채워 주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돈 없이도 즐길 줄 아는 신자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특해서 축복으로 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 돈보다 시간을 우선하는 가치관을 갖고 살기에 얼마든지 자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풍족하든 궁핍하든 억지로 참아 냈다는 뜻도 아니다. 물질의 풍족과 궁핍에 상관 없이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더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에 감사하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의미다. 신자가 큰 능력을 받아 슈퍼맨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고 매 순간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오직 그 분의 뜻과 계획만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면 무슨 일에나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삶이며 주님이 신자인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삶이다.
사람이 시간보다 돈을 택하는 이유가 특별히 재벌이 될 욕심때문이 아니다. 시간이 많고 돈이 적을 때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되었던 일을 안 하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돈을 버는 것은 그래도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돈 없이는 재미있게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돈을 써서 반대 급부로 따라 오는 것, 맛 있는 요리를 먹거나 세련된 옷과 고급 차를 사거나 경치 좋은 곳을 여행을 하지 않고는 즐길 줄 모른다. .
돈 없이도 즐길 줄 안다면 얼마든지 쉽게 돈과 시간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바울처럼 자족할 수 있다. 그가 궁핍에도 자족할 수 있었고 또 예수님이 제자들 더러 전대를 갖고 가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과 제자들이 하는 일은 전도였고 그 일에는 돈이 그리 필요 없고 시간이 더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일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바울과 제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던 영혼이 주께로 돌아 오고 그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이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즐겁고 보람찬 일이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돈과 시간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돈이 더 중요하여 시간을 수단으로 쓰는가? 시간을 즐기기 위해 돈을 수단으로 생각하는가? 돈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고 시간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신자는 오직 주님의 종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 일생을 걸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시간과 돈은 자동으로 균형이 이뤄지며 더 이상 현실의 삶이 짜증나고 힘들지 않다. 특별히 시간의 전부를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 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쉬지 말고 기도하며 시간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면 범사에 필요한 시간과 돈은 주님 뜻 안에서 완전히 균형을 이루게 되어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이다.
이 균형은 좀 특이한 균형이네요.
그래서 하나님께 하~~앙~~복!
두손을 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