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쁜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
말로 하는 시비와 실제적인 시비
논리(Logic)라는 책에서 리오넬 루비는 말로 하는 시비와 실제적인 시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사실은 시비거리가 안 되는 것을 시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정작 목숨을 걸고 시비해야 할 일은 잘 시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각각 이런 말로 서로 다투었다고 치자.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은 아니야.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다 달라. 토마스 제퍼슨이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완전히 엉터리야.” “아니야! 모든 인류는 평등해. 누구나 동일한 존엄성을 갖고 있기에 피부색, 성별, 학식, 재산에 관계 없이 평등한 기회를 부여 받을 권리가 있어.” 자 누구 말이 맞는가? 언뜻 보면 후자가 맞을 것 같지만 사실은 둘 다 맞는 말이다.
전자는 신체 구조, 지능, 감성, 성격, 기질, 건강 상태 등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권리와 신분에선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유전적 특성은 다르지만 그 존엄성에선 동일하기 때문에 둘 다 맞는 말이다. 두 사람은 기준이 서로 달라 인간의 평등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본 것 뿐이다.
말하자면 서로 간에 시비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유전적 특성이 인간마다 같은가 다른가?”, 아니면 “사람을 외적 조건에 따라 차별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별개 주제로 해서는 얼마든지 서로 따질 수 있다. 동일한 기준을 갖고 시비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인 시비이며 또 꼭 해야 하는 시비다. 반면에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는 아무리 시비를 해봐야 말꼬리를 물고 무는 시비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를 없애려면 가장 먼저 시비하는 기준을 먼저 일치시켜야 한다. 예의 경우에 처음부터 각자가 판단한 인간 평등에 대한 기준을 먼저 비교해 봤더라면 애초부터 아무 필요 없는 시비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시비거리다. 말하자면 기준이 동일한 시비가 있고 또 그런 시비에는 둘 중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리게 마련인데도 성경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가 시비하는 기준
성경은 본 구절 앞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고 신자가 모든 일을 판단하고 시비하는 기준을 이미 말씀해놓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그 마음이다.
한 마디로 사랑이다. 그것도 완전한 자기 희생과 절대적 겸손에 바탕을 둔 사랑이다. 모든 일에 시비와 원망을 없애는 유일한 기준이자, 신자가 평생을 두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실현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다시 처음에 제기한 문제점으로 되돌아 왔다. 모든 일에 원망하고 시비하지 않고 열심히 사랑해야 하지만 여전히 실패하고 있는 그 자리다.
다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끼리 서로 관계를 갖다 보면 너무나 복잡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그런 온갖 갈등과 분쟁을 성도들조차 단지 도덕적, 종교적 열심으로만 다루려고 하는 데 이는 잘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처럼 내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 생명까지 상대를 위해 주어야 하는 사랑, 질적 양적으로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사랑을 하려고 든다.
우리 모두는 그러기에는 사실 그 믿음의 크기나 사랑하는 실력에서 너무나도 모자란다. 그렇다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당장 바꿔주지 않는다. 정말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경건을 훈련하고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이 시비의 기준을 동일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어쩌면 기도하여 우리의 품성을 예수님을 닮게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나아가 이 기준을 바꾸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예를 들어보면 불신자와 신자는 시비와 원망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불신자는 신자더러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신자는 불신자에게 그럴 수 없다. 저들의 인생의 목표와 삶의 기준은 오직 돈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모든 원망과 시비가 돈 때문에 생기며 또 그 시비를 따지는 기준도 오직 돈이다. 그런 그들과 이제는 영원한 하늘의 신령한 복이 인생의 목표와 삶의 기준이 된 신자가 같이 원망하고 시비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신자가 불신자와 시비하는 것은 시비를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시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전도를 하면서도 서로 기독교의 교리를 가지고 말꼬리만 붙드는 싸움을 한다. 전도란 기독교의 도(道), 즉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신자는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맛보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기독교에 대한 시비에서 떠나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즉 전도 자체는 성령의 능력이 이끌어 가신다.
예수님이 신자더러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신자들더러 불신자보다 고급한 사랑을 더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다. 산상수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시작한대로 천국에 관한 훈화다. 신자의 인생의 목표가 천국, 즉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거룩한 통치를 받는 것으로 변화되었기에 세상에서 사단에 묶여 있는 사람들과는 시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삶의 기준이 다른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않던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수 밖에 없다. 신자는 불신자의 영혼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소명을 지녔으니까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도덕률이 아니다. 예수님이 다른 종교보다 한 차원 높인 도덕적 계명이 아니다. 십자가 사랑을 통해 이미 천국을 맛본 자가 아직 예수를 모르는 너무 불쌍한 심령들과 이땅에서 함께 살아 갈 때에 지켜야 할 기준이다. 나아가 신자라면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목표를 넘어서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이다.
본문에서도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할 이유를 뭐라고 했는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기를 기뻐하는 자가 신자다. 그래서 신자가 갖고 있는 소망도 하나님이 심어준 것이며 그것을 이루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한다. 삶의 목표와 기준이 완전히 바뀐 자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조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는 원수에 대한 기준 자체가 바뀌었으니 그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단간 방일 때가 가장 행복했다.
불신자를 상대할 때 뿐 아니라 성도 간의 교제에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아야지 노력하기 이전에 서로간의 기준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간의 갈등도 바로 이 천국이라는 기준으로 풀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견지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 보아야 한다. 바꿔 말하면 신자가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최종 목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 나라가 확장되는 가장 좋고 완전한 수단이지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니까 무조건 사랑, 희생, 순교만 생각한다. 아니다.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의 모습까지 낮아진 것은 낮아진 것 자체가, 심지어 인간을 사랑하는 것마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낮아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신자가 그분을 닮는 최종적인 모습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즉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자기의 전 존재와 일생을 헌신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이땅에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겨 거룩하고 신령하게 바꾸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도 거룩한 공동체가 최종 목적이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신자가 가장 먼저 변화시켜야 할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반드시 그 가정을 궁극적으로 하나님 왕국으로 바꿀 소망과 계획을 부부와 자녀들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다 같이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함께 뜻을 모아 그 나라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사랑이 없어도 갈등이 먼저 해소되며 나아가 자연히 사랑은 더 풍성해지는 법이다.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간의 갈등을 자꾸 사랑으로만 풀려 해선 우리 모두 지금껏 경험한대로 너무 힘들고 실천이 잘 안 된다.
쉽게 비유컨대 부부가 가장 사이가 좋을 때는 결혼 직후 단간 방에서 아무 세간 없이 고생할 때다. 아직 신혼이라 사랑이 식지 않아서라는 의미가 아니다. 부부 간에 빨리 저축하여 집을 장만하자는 한가지 뚜렷한 최종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갈등이나 다툼도 그 목표에 비추어 해석하고 처리하게 된다. 말하자면 원망과 시비할 기준이 통일 된 것이다. 그러다 돈이 많아지고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부부사이가 틀어지고 자주 다툼이 생긴다. 돈과 여유를 쓰고자 하는 기준이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너무 거창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단간 방 부부의 예처럼 현실적으로 선하며 전체 구성원의 덕을 살릴 수 있는 한가지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이 심어준 소망이라는 확신은 있어야 한다. 인간적 세상적 욕심으로 세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현실적 목표가 아닌 도덕적 영적 목표가 되어라는 뜻은 아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목표를 현실적이든, 영적이든 관계 없이 전 가족이 기도해보고 정하면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그런 가정의 목표가 세워졌다면 전 가족이 예배를 볼 때마다 혹은 가족 각자가 큐티할 때마다 그 목표(꼭 하나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님, 가족이 모두 동의하면 복수의 목표를 가질 수 있음)를 위해 가장 먼저 합심하여 기도할 것 아닌가? 가족 중에 누가 암에 걸렸으면 치유를 위해, 아직 믿지 않는 가족이 있으면 구원을 위해, 모두가 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데 아직도 단간 방이라면 집을 구매하기 위해, 결혼할 적령기에 있는 자녀가 있으면 그 결혼 문제를 위해 등등… 가족 모두가 하나되어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가정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또 그 가정에 원망과 시비가 있겠는가? 모든 갈등을 그 목표에 비추어 보면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혹시라도 그런 현실적인 목표가 없어도 된다. 신가 가족끼리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합의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의 가정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일차적인 목표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과연 이 거룩한 공동체를 더 거룩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그 원망과 시비를 다루면 된다.
또 가능한 아버지가 가정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 가정의 현실적 목표도 정하고 예배와 기도를 인도해 나가야 한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의 현실적 목표를 조정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세상적 목표를 다룬다고 영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현실적 일과 영적인 일에 따로 구분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 뜻대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라도, 심지어 밥 먹고 물 마시는 것마저 영적으로 신령한 일이다.
원망과 시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무조건 사랑만 하여 그 원망과 시비를 없애려 하지 말라. 가장 먼저 그 시비의 기준을 서로 맞추어라. 물론 현실적으로 그 조정이 힘들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신자가 먼저 양보하는 수 말고는 없다. 신자끼리는 이 원리를 아는 자가 먼저 양보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양보한 자만 손해 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본문을 다시 인용하자면 신자에게 소원을 두게 하고 그 일을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확고하게 믿어라는 것이다. 만약 상대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쁜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분이 그 기준을 고쳐주던지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다. 혹시 양보한 본인의 기준이 잘못이라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계획하고 조정하여, 즉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끼리는 서로 간에 원망과 시비가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원망과 시비는 사랑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다. 시비의 기준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어떤 공동체의 - 두 사람만의 개인적 인간 관계도 공동체다 –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모든 일의 배경에 절대적 주권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인도에 순응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범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조차 자기 기분과 뜻에 맞지 않다고 원망과 시비를 하면 하나님에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꼴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2/1/06
우선 기준을 맞추어라. 조정이 힘들 때는 신자가 먼저 양보하라.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확고하게 믿어라. 아멘! 아멘!!
공동체에 어려움이 참 여러모양으로 여러색깔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적용해 보아야겠습니다. 먼저 양보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기에 참고 기다리며 또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질 것이기에 기쁨으로 감내해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