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이 시킨 일
세계 최고 명품 바이올린은 “스트래디베리우스”인데 그렇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설립자 앤톤이어스 스트래디베리어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과 모든 정성을 다해 만들어서 완벽(Perfect)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출고 시키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명품을 만드는 사장들의 경영 철학과 하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가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독특했다.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거나, 자기 기술이나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거나,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최고 가격을 받으려거나,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유지하려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음악을 온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 바이올린을 필요로 하는데 만약 그 악기에 작은 하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음악을 망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음악을 연주하는 일에 자기 제품이 사용됨으로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흔히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종교적으로 거룩하거나 최소한 도덕적으로 의로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봉사, 전도, 선교, 혹은 사회에서 구제, 자선 같은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분명히 좋아하실 것 같은 일의 “종류”부터 먼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도둑질, 도박장, 사기, 강도 같이 분명히 악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어떤 종류의 일도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없이 다 하나님의 일이다. 잔디를 깎거나 풀장 청소를 해도 의사로 생명을 살리거나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비해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 뒤지지 않는다.
스트래디베리어스도 자기 바이올린을 꼭 교회 음악용으로만 팔지 않았다. 또 교회 음악용만 완벽하게 만들고 일반 음악용은 덜 완벽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음악이 사람을 즐겁게 하고 평강을 주는 한 하나님의 일이며 그 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일의 종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일을 보는 관점에 달렸다. 특별히 신자의 경우는 더 그렇다.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킨 일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일은 다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켰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대신에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자꾸 하기 싫다면 일의 종류에 상관 없이 설령 교회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내가 겨우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좀 더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은 없을까?”라는 짜증과 의심이 자꾸 생기면 일의 종류를 바꿀 것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종류를 따지지 않는다고 해놓고 왜 또 종류를 바꾸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하는 일이 싫으면 그 일 자체만 두고는 “하나님의 일”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킨 일”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의 일에는 분명히 일의 종류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킬 때는 특정한 일의 종류를 지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간절히 기도하여 어느날 “선교사가 되어라” 혹은 “바이올린을 만들어라”는 직통 계시나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을 해도 즐거움은 없고 자꾸 하기 싫고 회의가 든다는 것은 자기의 은사와 재능과 적성에 맞지 않다는 뜻이다. 그 은사와 재능과 적성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때에 판단할 기준으로 이미 주신 것이다. 그 기준에 맞지 않다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킨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간혹 하나님이 그 일과는 전혀 엉뚱한 것 같은 사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반드시 그 일에 적합한 재질을 그 본인도 모르게 하나님이 이미 주었거나 형성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컨대 명확하게 악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직업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런 일을 하는 당사자가 즐겁고 신나면 하나님이 그에게 시킨 일이다. 스트래디베리우스는 바이올린을 만들면서 싫거나 짜증 내는 법은 당연히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신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킨 일을 확정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반드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려면?
그럼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특별히 신자가 세상의 일반적인 일을 할 때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해야 하는가? 불신자 손님이 올 때마다 전도해야 하는가? 아침에 예배를 드린 후 가게 문을 열고 저녁에는 기도로 문을 닫아야 하는가? 사업장 곳곳에 성경 말씀 액자를 걸어 놓고 신자 직원만 채용해야 하는가?
그런 종교적인 모습을 전혀 안 띄워도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도 아주 간단하다. 자기가 하는 일에 분명한 목적을 발견하면 된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목적이 이미 있는데 또 무슨 목적인가라고 생각해선 아무 진전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인 목표일 뿐이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만의 특유하고도 더 구체적인 목적이 확고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하나 같이 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운 난관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자기 은사와 재능과 적성에 적합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도 때로는 그럴 수 있다. 고통과 난관은 짜증과 싫증과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그 일을 할 마음은 기꺼이 있어 열심히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닥치는 어려움이지만 후자는 그 일을 할 기분 자체가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 힘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바로 목적이다.
쉽게 말해 일을 할 때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충분한 이유가 있으면 바로 그것이 그 일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자의 경우도 연습할 때의 고통은 범인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컨테스트에 입상을 하겠다든지 음악 교수가 되겠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그 어려움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목적을 이루어 나가며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의 종류나 실적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태도나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면”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주께 하듯 하라고 해서 무조건 최고로 잘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룬 실적(외모)을 보지 않고 당신이 시킨 일을 하는 마음의 자세(중심)를 보기 원한다. 본문은 크리스챤 종들에게 상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권면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최선의 유익이 되는 방법과 내용으로 하라는 것이다. 상전도 자기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종이 해준다면 당연히 흡족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주부가 된장 찌게 하나를 끓여도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특별히 남의 유익을 위해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남편이 오늘도 틀림 없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할 텐데 가장 좋아하는 된장찌게로 피곤을 풀어 드려야지라는 목적을 갖고, 또 남편이 이 찌게를 먹으면서 얼마나 기뻐할지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정성을 다해 끓이면 된다.
찬양이나 설교 테이프 들으면서 된장을 끓여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귀찮고 힘든 식사 준비지만 그 힘든 것을 이겨내는 분명한 목적, 그것도 남편과 가족의 유익을 위해 주부로서 그들에게 건강과 기쁨을 선사하겠다는 목적이 있으면 주께 하듯 하는 일이 된다. 설거지 하면서 찬양과 설교를 들으려면 그런 목적을 다시 새롭게 다지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 종교적 마취약에 취해 단지 귀찮고 힘든 것만 잊으려고 들어선 안 된다.
“돈도 제대로 못 벌어 오는 주제에 오늘도 상전 눈치 보느라 제 때에 퇴근도 못할 텐데 나중에 오면 적당히 라면이나 끓여 먹으라고 하지 뭐!”라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제발 남편 돈 잘 벌고 일찍 집에 들어오게 해주세요”라고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
스트래디베리우스가 최고의 품질을 만들려고 해서 세계적 명품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니까 자연히 세계 최고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복을 주어서 그렇다고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최고 품질의 바이올린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은 불신자의 악기회사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다.
그러나 스트래디베리우스는 악기를 연주할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기 위해서 만들었고 또 고객이 그 품질을 인정해 주어서 최고가 된 것이다. 반면에 불신자는 사람 보다 일의 성취에만 우선권을 둔다. 최고 품질의 악기를 만드는 데는 최선을 다하지만 악기가 이뤄낼 사람의 유익과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적 의식은 전혀 없다.
요컨대 신자는 무슨 일을 하던 이 일로 인해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할까를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자 그 분께 영광이 된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고 나아가 그렇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을 신자가 정말 기쁨으로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심히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따로 있겠는가?
대부분의 신자가 자기 일을 위해 하는 기도의 내용이 어떠한가? “하나님 어서 빨리 좀더 쉽고도 수입이 많은 일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니면 최소한 주문이라도 많이 늘어나 저는 메니저 일만 하고 전부 멕시칸을 시킬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헌금도 많이 하겠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겠는가? 절대 아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의는 뒷전이고 먹고 마시는 것만을 위해 기도한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헌금 많이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부자들만 만나고 다니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통해 당신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신자가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아무리 간절히 드렸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해서 크게 번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지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비록 잔디 깎는 것 같은 보잘 것 없는 일을 해도, “제가 이 정원을 잘 관리해 이 집의 아이들이 뛰고 놀 때에 다치지 않게 하고 잘 가꾼 화초와 잔디를 보면서 모든 식구들에게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목적을 갖고서 즐겁게 일할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 주부가 가족이 맛있게 먹을 것을 상상하며 콧노래(찬송가가 아니라 유행가라도 좋다)를 부르며 된장 찌게를 끓이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일이 따로 없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시킨 일을 기쁨으로 하고 있는가? 그 일을 할 때에 때때로 닥치는 난관을 이겨낼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또 그 이유가 진정으로 남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 이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일을 통해 드러날 것이며 얼마든지 세계 최고의 명품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도 당신께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실지 모른다.
2/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