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양자로 입양된 목사 사모
미국 남침례교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다. 텍사스 콜리빌 침례교회의 프랭크 하버 목사의 사모인 베키 하버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낳는 곳에서 출산되었고 생후 일주일 만에 입양된 고아였다. 아들 몇을 두었지만 더 이상 임신할 수 없게 된 한 부부가 딸을 갖고 싶어 그녀를 입양시켰는데 그녀가 8살 때에 그 사실을 양부모로부터 듣게 되었다. 아직 입양(adoption)이라는 말의 뜻도 몰라 다시 그들에게 뜻을 물어 보아야 했었다.
그 양부모들은 혹시라도 어린 딸이 자기는 오빠들과는 다르다고 느낄까봐 출생의 비밀을 말해주는 것을 굉장히 망설였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그녀가 친 자식이 아니고 또 자기들이 생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말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녀는 자기가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틴에이저 시절에 처음으로 자기 친부모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는 입양 서류를 보게 되었다. 자기가 태어났을 때에 생모는 19살, 생부는 21살이었다. 그들이 자기를 아직 어린 나이에 임신하여서 양육을 포기한 것을 보면 계획에 없었던 임신이라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임신 중절을 택하지 않고 끝까지 혼전 임신을 유지하여 자기에게 이 땅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게 여겨졌다.
양부모는 그녀를 항상 무슨 일에든 책임을 질 줄 알고 남을 먼저 고려하는 사람으로 크길 원했다. 또 그녀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클 수 있도록 항상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 양부모가 자신의 일생의 가장 중요한 치어리더(Cheer Leader)였다고 회상했다.
그녀도 결혼한 지 4년이나 되어도 아기를 못 갖고 있으면서 현재 미혼모를 보살펴 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혼모들에게 절대 중절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는 비록 생부모의 형편이 어렵고 원하는 임신이 아니었어도 태어날 아이에게 훌륭한 입양 가정의 가족이 되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또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모의 아픔을 입양아가 덜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또 “아무도 내가 태어나길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만 빼고는...”이라고 덧붙이면서 에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그래서 “지금도 세상에는 매일 계획하지 않고 원하지 않은 아이들이 임신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실수가 아니다”라고 했다.
물론 그녀가 인간의 죄악과 실수로 불행한 임신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마저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조차 다 아신다는 것이다. 또 그 이전에 하나님이 그런 불행한 임신을 허용할 때는 그분의 계획과 목적이 없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강간이나 불륜으로 인한 임신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불행과 죄악으로 한 생명이 잉태까지 되는 데는 그분의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살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
신자가 가진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도 전적으로 100% 완전히 믿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의심하지 않아야 하되 마찬가지로 100% 완전하게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분을 단 0.00001%도 의심해선 안 된다. 아무리 새털 같은 의심이라도 섞이면 당연히 완전한 믿음이 되지 못한다.
그럼 특별히 하나님의 어떤 면을 의심 하지 않고 믿어야 하는가? 그분의 존재하심, 전지전능하심, 동행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 등등인가? 물론 다 맞다. 그러나 이런 교리들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인지라 신자들이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간혹 의심이 들더라도 그 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의심이란 의심이 들 만한 상황과 여건이 되면 자연히 생긴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무조건 무엇이나 의심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무조건 의심하면 신자가 아니라 정신병자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의심이 들 만한 일이 있으니까 의심한다. 에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빌면 그분의 생각이 마치 재앙처럼 보일 때에 신자는 자연히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분의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한다. 신자가 의심할 근거나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에게 평안이 닥쳤을 때에는 하나님의 생각도 당연히 평안이라고 믿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한 치라도 의심을 하지 않으려면 재앙이 닥쳤을 때에 그 속에 평안이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는 자꾸 재앙으로 보이기에 그 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없다고 의심하려면 역으로 평안으로 보이는 것에도 그 속에 하나님의 재앙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불안해해야 논리적으로 형평이 맞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재앙으로 보일 때만 일방적으로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부족하고도 불합리한 생각의 소산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믿음은 의심이 없어진 상태다. 의심을 그냥 두고 믿음만 100% 충전시키려 노력한다고 해서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심을 먼저 완전히 제거하면 믿음은 자연히 온전해진다. 재앙이 닥쳤을 때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겼을까 의심하면서 마치 생겨서는 안 될 일이 생겼다고 여기는 그 생각부터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런 일 뒤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은 있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야!”라고 억지로 의지를 동원해서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사탄의 방해를 받고 또 우리에게 남은 죄성과 정욕의 영향으로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정의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앙으로 판단되는 일이 생겨도 재앙이 아니라고 실제로 믿어야 한다.
온전한 믿음을 갖는 길
세상 사람과 비교해 보면 신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 판단에 재앙이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생긴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재앙을 없애려고만 한다. 일단 재앙이 닥쳐 힘들고 불편한 것은 신자에게도 같다. 그러나 신자는 그 일도 하나님이 허용하셨으니까 일어났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가져야 한다. 또 하나님이 신자에게 허용하셨다면 당연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재앙처럼 보이는 이유는 장래에 소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장래에 소망이 될 것은 아직까지는 완전한 소망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잠깐 동안 재앙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이 재앙이 아니기에 아무리 재앙처럼 보여도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키 사모의 경우를 보라. 겨우 8살에 자기가 고아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 들었겠는가? 그럼에도 비록 친부모를 생판 모르는 고아의 신세이지만 그것을 재앙이 아니라 평안으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어린 아이가 자신의 환경에 잘 적응했다든지, 의지력이 강했다든지, 신앙심이 대단했다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자신의 출생을 다른 모든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만은 원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다. 그녀로선 하나님이 원하시고 허락하셨다면 재앙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신자가 믿음으로 재앙을 잘 견뎌내면 마치 그 보상으로 평강이 따라 오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선 평생 가야 그 신앙은 재앙을 없애자는 캠페인 밖에 안 된다. 참으로 웃기는 일 아닌가? 하나님이 허용한 재앙을 자기 맘에 안 들고 힘들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것을 허용한 하나님에게 자꾸 없애달라고 떼를 쓰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잘못되었으니 어서 빨리 취소하라고 난리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까지 한다.
의심은 의심이 들 만한 상황이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생겨져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의심이 들 만한 상황에도 의심이 들지 않아야 한다. 의심이 들게 만든 상황이 바뀌어졌다면 어느 누구라도 의심을 없앨 수 있다. 상황은 여전히 동일한데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다면 그 상황 속에서 평강을 찾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재앙 자체가 평강이든지, 재앙 안에 이미 평강의 씨앗이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심겨져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절대로 참 평강을 맛보지 못한다. 의심부터 먼저 없애면 자동으로 믿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지금 현실과 사람들을 볼 때에 자꾸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가? 믿음이 적다고 실망하지 말라. 의심이 들 만하니까 믿음과 상관없이 드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의심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이 생겼을 때에 이기게 해줄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 기도하고 말씀보라는 뜻이 아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왜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 혹은 묵인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이유를 당장 알기보다는 하나님이 지금 신자가 의심스러워하는 그 상황을 알고 계실지 모를 지부터 따져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르고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는가? 사실은 그 의심스런 상황 안에는 장래의 소망이 충만하고도 완전하게 포함되어 있는데도 우리 대부분의 믿음 수준이 소망을 알고 붙드는 데까지 가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 상황을 알고 계시고 또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데 왜 자꾸 의심하고 염려할 것인가 말이다.
천하에 혈혈단신으로 고아가 되어 일주일 만에 남의 집에 입양된 인생보다 불행한 인생이 있겠는가? 자기를 낳은 생부모조차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아 갖다 내버린 인생이지 않는가? 출생부터 재앙으로 시작되었다. 인간적 생각으로는 재앙으로 일관될 인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재앙도 평강으로 바꿔주었다. 아니 출생, 그전 잉태 때부터 평안이었다. 베키 사모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감사했다. 이것 이상의 믿음이 없다.
하나님 하신 일은 아무리 재앙으로 보여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평안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재앙을 평안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평안으로 볼 수 있거나 사단과 죄악의 방해임을 분별하는 눈을 열어달라고 말이다.
6/7/2006
제 자신의 믿음없음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었는데 하나님은 저의 의심과 불신까지도 알고 계시다는걸
알게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 철이든 모습으로 제대로 설 수 있을때가 언제 오려는지....
세상과 저의 문제들이 제 믿음 보다 위에서 저를 노려보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저의 문제들을
볼 수 있는 하루가 되고 평생이 되고 순간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루 하루 목사님의 사역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