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 구원을 얻고 난 이후에는 평생을 두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소위 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겠는가? 흔히들 교회 생활에 성실하게 임하고 그래서 성경과 기도에 열심을 내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겠는가?
로마서는 4장까지 율법과 대비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5:1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해서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 신자가 해야 할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즉 신앙생활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는가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대부분의 신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과는 전혀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미 구원을 얻은 신자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을 이룬 것인데 또 다시 화평이 필요한가이다. 기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어떤 잘못이나 죄를 범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지 않는가? 이제는 믿는 자답게 살아야 할 성화의 책임만 남았을 텐데 또 다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필요나 이유가 있는가 말이다.
짐 윌튼이라는 선교사가 남미 콜롬비아 정글의 라사바나에 있는 뮤나네 종족을 위해 신약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평’이라는 용어를 번역할 마땅한 현지 언어가 없어서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동네 추장 훼르난도가 볼 일이 있어 걸어서 3일 가는 거리를 여행을 갔어야 했다. 짐 선교사가 비행기로 20분 만에 태워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비행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추장이 도보로 출발해 버린 후에야 비행기가 도착했다. 급히 사람을 따라 보내어 추장을 데리고 왔지만 이번에는 또 비행기가 다음 스케쥴 때문에 이륙해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추장이 짐 선교사에게 뭐라고 자기들 말로 화풀이를 했다. 그 종족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항상 녹음기를 휴대하고 다녔던 짐이 그 말도 녹음하여 나중에 들어 봤더니, “나는 한 마음이 아니다”라고 자꾸 야단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 마음이 아니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더니 “당신과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는 상태라고 했다. 비행기 사건으로 화나 둘 사이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평’을 ‘한 마음’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신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과 저주를 벗게 되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엎드린 자는 어떤 죄에 빠져 있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분리 되었던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언제 어떤 모습이든 담대하게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과연 하나님과 화평, 즉 한 마음이 되었는가는 사실 좀 따져 보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 거듭남으로써 하나님과 이뤄진 화해는 그 중간을 가로 막던 담이 허물어졌기에 그 이후로는 언제라도 그분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신자의 개인적 만남에 장애가 되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신자의 마음 사이에 정말 아무 걸림돌도 없이 하나로 일치되었는가는 다른 문제다.
계속해서 이루어야 할 화평
바울 사도는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누린다’는 의미는 일시적, 순간적, 잠정적, 간헐적이라는 의미는 전부 배제한다. 화평의 상태가 계속해서 진행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을 테니까 항상 누리고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하나님과 일시적, 순간적, 잠정적, 간헐적 화평만 유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다른 의심이 없다. 그러나 그 후 천국 갈 때까지의 이 땅의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평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을 없애서 하나님과 중간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 생활이다.
짐 선교사와 추장 간에 일어난 일을 보자. 비행기는 약속대로 분명히 왔다. 짐 선교사가 약속을 안 지킨 것도, 일부러 지연시킨 것도 아니었다. 비행기회사의 일정이 조금 불규칙했을 뿐이다. 틀림없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비행기가 도착할 것이라고 짐 선교사가 만류했을 것임에도 추장은 출발했다. 오히려 추장 자신의 급한 성격이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더 큰 원인이었다.
어쨌든 결정적인 원인은 비행기가 제 때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행기가 제 때 도착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 아니라, 또 그 사실만 빼면 모든 상황은 하나 문제 될 것 없는 정상이었다. 특별히 비행기가 고장 나거나, 악천후로 결항되었거나, 오다가 폭발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짐 선교사와 추장 두 당사자는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제 삼의 그것도 조금 때가 지연된 것 하나로 두 마음이 되지 못했다.
신자와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그 두 마음 중에 어느 것이 문제이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마음이다. 단적인 예로 추장이 선교사에게 화를 낸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신자가 기도한 그대로 하나님이 하나 틀림없이 이루어 주었는데도 단지 신자가 바라는 시간에 빨리 안 된다고 불만이다. 하나님이나 신자가 서로에게 잘못한 것은 사실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지연된 때가 신자에게 더 유익한 때라는 것을 더 정확하게 꿰뚫어보시기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이 조금만 지연되어도 그저 불평이 넘치는 데 하나님이 당신만의 때, 나아가 방법과 뜻과 계획으로 이끌 때가 대부분인데 어떻게 화평을 제대로 이루겠는가? 또 그러니 계속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않고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겠는가?
신자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분의 신자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완전하기 때문에 신자가 그 분의 마음에 맞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실적 고난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때마다, 사건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그렇다. 물론 분명하게 가르쳐 주실 때도 있고 또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분명이 있다. 그렇다고 그분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신자가 단순히 교회에 관련되거나 도덕적인 일만 하려고 한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며 또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신자가 그런 일들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벗어날 가능성이 적고, 세상의 형통과 쾌락이 자연히 배제될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가 다 전임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할 뿐 아니라 또 그런 의미로 사역자가 되어선 하나님이 바라는 바도 아니다.
화평을 누리는 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더더욱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한다. 그것도 눈앞에 닥치는 현실적 일들을 처리해 가면서 심지어 자신이 하고 싶고 계획한 일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럼 자칫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자신의 계획대로만 모든 일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를 하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긍정적 낙관적 사고를 유지하라는 뜻은 아니다.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일단 무조건 감사하고 보면 하나님이 복 주시고 형통케 해 주신다는 것도 아니다. 감사란 항상 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감사에는 감사 외에 다른 것들, 예컨대 의심, 불만, 분노, 불신앙등이 어떤 형태로든 섞여 있는 위선적, 가식적 감사일뿐이다.
또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것은 좋고 신나는 일 뿐 아니라 궂은 일, 슬픈 일, 힘든 일, 심지어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일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일이든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감사 외에는 아무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는 화평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럼 돌고 돌아 결국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 온 셈인가? 화평 하는 길을 찾았는데 범사에 감사하여야 하고 또 그것은 화평 하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따져보기로 하자.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화평이라고 했다. 그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이 무엇이겠는가? 신자가 거룩하고 의롭게 되어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가 꼭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신자를 향해 항상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심정(心情)이 있다.
쉽게 말해 부모가 자식을 바라 볼 때에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식을 향한 한결 같은 심정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도 신자를 보호, 인도, 간섭하시는 사역의 근본 바탕이 되는 한결 같은 심정이 있는데 오직 긍휼이다.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하고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간들을 보면 오직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당신의 독생자의 피 값으로 사신 친백성인지라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의 원리로만 신자를 대우한다. 따라서 신자가 범사를 대할 때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해 하나님과의 사이에 감사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궂고 힘들고 슬픈 일이라도 그 배경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그런 일들을 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비록 그 당장에는 하나님의 이유와 뜻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이 신자를 사랑하기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만은 확고하게 붙들 수 있어야 한다.
복음에 너무 취해 있는 신자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오히려 여기서 부터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신자들은 복음에 너무 취해서 도저히 깨어날 줄을 모른다. 처음 구원 받았을 때의 그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아니 일부러 깨어나지 않으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사실만 끝까지 붙들려 한다. 하나님은 범사에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고집한다. 그래서 보잘 것 없고 궂고 힘들고 슬픈 일에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마땅한 하나님더러 지금 당장 신나고 즐겁고 기쁘게 바꾸어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다. 신자더러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라니까 진짜로 사랑만 문자적으로 꽉 붙들고 있다. 하나님은 신자를 영원토록 불쌍히 여기신다고 해 놓고 왜 지금 이렇게 힘들고 슬픈데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불평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이상한 긍휼로 만들고 있다. 십자가의 사랑은 무조건적, 무제한적으로 영원불변 해야 하니까 구원 이후에도 하나님 쪽에선 아무 조건 없이 무제한적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만 한다고 기대한다.
긍휼이란 십자가에 드러난 긍휼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베푸신 긍휼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19:5,6) 율법을 지켜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원 해 주셨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신의 소유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말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간섭하시는 모든 일의 바탕에는 그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삼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 부모가 아들을 사랑하는 심정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때로는 자식이 힘들어도 짐짓 모른 척 하고 심지어 힘든 일을 일부러 겪도록 만든다. 자식이 부모의 그런 심정과 뜻을 분명히 알면 비록 구체적인 이유는 몰라도 부모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 그저 감사와 공경하는 마음과 심지어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까지 생긴다.
그럼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비록 구체적인 이유와 진행 과정은 몰라도 하나님이 인간의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안 되는 사랑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에 확신이 있다면 말이다. 오직 감사와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 아직도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있지 못함에 대해 미안하고도 죄스런 마음부터 가져야 하지 않는가?
환난이 해결되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려야 한다. 그 후 범사에 감사하되 그렇게 되기 힘들면 기도하면서 십자가 원리를 자꾸 회상해야 한다. 고통이 끝나야 화평하겠다고 생각하면 평생을 가도 절대 화평이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일시적, 순간적, 잠정적, 간헐적 화평 밖에 누리지 못한다.
성경은 분명히 현실의 삶이나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모든 신자들은 현실이 화평해지면 그때서야 하나님과 화평하겠다는 심보다. 그럴려면 차라리 하나님의 긍휼을 잊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당신과 먼저 화평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현실과는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 두고 보신다. 현실과의 화평을 먼저 찾는 자는 하나님과의 화평은 뒷전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구원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외에 없다.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확신하는 바탕 위에서만 해야 한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과 계속해서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혹시 현실의 문제와 환난과 화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문자적 긍휼만 계속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6/13/2006
거친길을 걷게하시는 하나님의 맘, 그 아비의 맘을 넉넉히 알아가고 배워가고 깨달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해 봅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 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그 의미를 온 지와 정과 의를 동원하여 온몸이 경련을 일 듯 두렵고 떨림으로 그 크신 구원을 숨이 막힐 듯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