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인생을 읽는 비결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3-5)
자수(刺繡) 같은 인생
맥스 루케이도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책에 이런 예화가 나온다. 약 백여 년 전 영국의 한 탄광 마을에서 매몰사고로 많은 광부가 죽었다. 그 지역 주교가 모든 일을 선하게 마무리하시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주민을 위로하면서 한 비유를 들었다.
“집안에 어머니가 물려주신 오래 된 책갈피가 하나 있습니다.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물건이지만 안팎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안에는 온갖 매듭과 실이 이러 저리 얽히고설켜 있는 모습만 눈에 띕니다. 마치 큰 실수를 저지르고 수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요. 안쪽만 본 사람은 자수의 기본도 모르는 초보자가 아무렇게나 바느질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아름답게 수놓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책갈피의 안쪽만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완성품 쪽을 보고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환난에 대한 참으로 적절한 비유다. 졸지에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고통 가운데 빠진 가족들에게 이 이상의 위로를 별달리 줄 수 없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아무 원인도 없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고난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다. 기쁘고 신나는 일보다는 슬프고 힘든 고난이 훨씬 많이 얽히고설킨 것이 인생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주교가 비유한 내용이 완전하지 않다. 인생의 고난을 자수에 빗댄 것은 맞지만 그 해석에서 조금 부족하다는 뜻이다. 어지간한 믿음을 가진 신자도 앞면에 아름답게 수 놓여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잘 보지 못한다. 언젠가는 완성품 쪽을 보고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될 날이 모든 경우에 반드시 다 오지는 않는다. 이 땅에선 죽을 때까지 보기 흉한 뒷면만 보고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그 “언젠가”가 천국에 들어간 이후를 의미한다면 옳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지금 가장(家長)을 잃어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한 가족에게 천국 이후를 바라보라고 하면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천국 이후를 소망하라는 것은 심하게 말해 가족들더러 죽어야만 환난이 끝난다는, 사실은 엄연히 그러하지만 실질적인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뜻과 같다. 믿음에는 현실의 고난도 얼마든지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수의 뒷면은 보지 말고 앞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위로하면 자칫 믿음을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혼동할 우려가 있다. 어떤 인생사에도 장단점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단점만 또는 장점만 있는 경우는 거의, 아니 하나도 없다. 따라서 어떤 일이든 나쁜 요소는 무시하고 좋은 측면만 보라고 권하는 것은 언뜻 적절해 보인다. 심지어 최근에는 예수 믿는 믿음마저 그러해야 한다는 큰 흐름마저 생겼다.
긍정적 사고로 환난 중에 현실적 위로를 가끔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전한 위로는 결코 얻지 못한다. 우선 모든 인간이, 또 한 개인이 항상 긍정적일 수는 없다. 환난이 닥치면 응당 긍정적 사고가 절실해지지만 이미 온갖 어려운 면들이 생생하게 부각된지라 누구라도 자연히 실망에 빠지게 된다.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려면 많은 무리수를 동원해야 한다. 이미 드러난 어려운 요소는 짐짓 외면해야 하고 부정적 생각이 조금이라도 파생하면 무조건 부인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가능한 긍정적 적극적 사고를 한줌이라도 쥐어짜내어야 한다.
바꿔 말해 아무래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지 못한다. 아주 단순한 한두 가지 색조로만 스스로 색칠한 도면을 따라 차후의 인생 여정이 정해진다. 필연적으로 자기 힘이 닿는 범위를 넘어서면 아예 제쳐둔다. 삶의 차원을 스스로 축소 제한시킨다. 인생을 다양하고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방도를 미리 막아버린다.
물론 환난 가운데는 그렇게 사는 것도 필요하고 의외의 효과도 산출한다. 그러나 세상은 타락한 죄인들과, 벌 받아 왜곡된 피조 세계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놀이터다. 절대로 인간이 선한 뜻에 따라 살도록,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굴러가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아무도 평생에 걸쳐 긍정적 사고로만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는 결코 없다.
나아가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스스로 인생을 온전히 파악할 만큼 지혜로운 자는 한 명도 없다. 거기다 선입관, 편견, 독선, 아집이 정도만 다를 뿐 사람마다 다 있으며 죄의 본성과 탐욕에도 묶여 있다. 인생의 긍정적인 면만 보겠다면 결국 인생의 반쪽만, 사실은 힘든 일이 더 많으므로 반(半)도 안 되지만, 살아가는 셈이다. 그런데다 지혜롭지도 못하니까 그 반쪽마저 온전하게 알지 못하고 사는 꼴이다.
요컨대 긍정적 사고란 자신의 너무나 부족하고도 허점이 많은 지정의, 그 중에서도 의지력에만 크게 의존하는 것이라 인생의, 특별히 환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결코 되지 못한다. 불신자들 사이에도 효력이 충분치 못한 대책이 어떻게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해야 하는 기독교 신앙을 대체 내지 보완책이 된다고 소개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죄에서 구원을 얻는 기독교 신앙의 시발점과는 아예 관계도 없다는 결정적인 하자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신자가 보는 자수의 뒷면
신자에게조차 긍정적 사고만 가지라면 반쪽 인생을 살라는 정도를 넘어서는 더 큰 잘못이 발생한다. 이미 말한 대로 인생의 좋은 반쪽이라도 절대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자기 임의로 즐겁고 신나는 장면 일색인 인생 극본을 다시 짜는 수밖에 없다. 진짜 인생은 실종되고 억지 춘향격의 소극(笑劇) 같은 삶을 살라는 것과 같다. 결국 허물과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는 데도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것과 같다.
또 서두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실 것이므로 믿음으로 이기라는 권면도 많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되 이 땅에서 그러지 못하면 천국 보상이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라는 것이 근거가 된 신앙이라면 너무 가난하기 때문이다.
비단 자수 책갈피의 비유를 가지고 인생사에 대해 다시 설명해보자. 우선 신자나 불신자나 인생에서 보이는 것은 항상 얽히고설킨 자수의 뒷면뿐이다. 그 앞면의 아름답고도 온전한 모습을 아무도 정확히 볼 수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령한 신자라도 그렇다.
말하자면 불신자나 신자가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 먹는다고 해도 앞면에 수놓아진 아름다운 그림은 여전히 전혀 알지 못한 상태다. 단지 스스로 엉뚱하게 상상한 아름다운 그림으로 대체한 것이다. 또 당장 눈앞에 보이는 뒷면은 일부러 무시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불신자는 완전히 자기 멋에 도취해 살게 된다. 신자는 가끔 긍정적 효과도 나타나기에 긍정적 신념이 올바른 믿음인양 착각한다.
신자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는 것도 앞면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지 못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뒷면에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때가 되면 풀어지겠거니 여기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내기만 한다. 다른 말로 힘든 일을 자기 의지로 이겨내는 것을 믿음인양, 또 어려운 일을 무조건 참아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양 착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다르다. 실크 자수 책갈피의 뒷면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런데 신자는 자수의 특성을 즉, 인생의 실체적 윤곽은 확실히 알고 있다. 뒷면에는 얽히고설켜 있지만 그 앞면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선명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최소한 뒷면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현실의 어려운 일이 끝나야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아름다운 일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인생은 뒷면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신자의 인생은 사실은 앞면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문제는 자수 앞면은 평생을 두고 정확히 보지 못하는데도 제 멋대로 상상하여 그쪽 면만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한다. 아니면 뒷면이 힘들지만 참고 견디면 곧 앞면처럼 바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결코 환난을 이겨내는 온전한 믿음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신자는 아무리 자기 삶이 자수의 뒷면처럼 보여도 그 아름다운 앞면이 항상 함께 붙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얽히고설킨 인생의 뒷면에서 불신자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통용되고 부러움을 사는 생활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야, 아니 완전히 반대가 되어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수의 뒷면만 보고 살 수밖에 없다. 물질계 내에 제한된 인생의 가시적인 영역은 환난과 문제가 겹치는 곳이다. 그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를 무시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억지로 긍정적인 사고를 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현실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법은 없다.
그 엄연한 인생의 고난을 자기 힘으로만 해결하려 드는 자는 불신자다. 신자마저 긍정적 사고를 가져 고통을 기쁨으로 가장하려 노력하는 것도 자기 힘을 의존하는 셈이다. 고통을 견뎌내기만 하면 보상이 기다린다는 것도 인내력 즉, 자기 힘에 의존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수는 항상 앞뒷면이 함께 있고 뒷면은 당연히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다. 지저분한 뒷면만 바라볼 수밖에 없어도 바로 뒤에 아름다운 앞면이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지저분한 뒷면을 바꾸려 노력하지만 신자는 달라야 한다. 지저분한 뒷면을 없애거나 바꾸면 이미 아름답게 예비 되어 있는 앞면마저 지저분하게 바뀐다는 것을 안다. 앞면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도 지저분한 뒷면을 없애지 않아야 한다.
미증유(未曾有)의 고난
인생사는 정말로 얽히고설킨 자수 같다. 기쁘고 신나는 일보다 슬프고 힘든 일이 더 많다. 하나 해결되면 전보다 더 강한 고난이 다시 닥친다. 새로운 종류의 고난이라 이전의 고난을 이겨낸 경험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때로는 견고한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도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고 심지어 더 도지기만 한다. 간혹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이 닥치면 그 고통은 둘째 치고 제발 그 원인만이라도 알았으면 싶다. 한마디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종류의 고난이 반복적으로 닥친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반복해서, 아니 한 번이라도 체험할 수 없는 고난이 딱 한 번 있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겪는 모든 종류의 고난과도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적인 고난이었다. 하나님이 때가 차매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겪는 모든 종류의 고난에서 건지려고 십자가에 죽이신 고난이다. 이 고난의 전에도 후에도 없었던 미증유의 고난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죄악의 시험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모든 고난을 직접 체휼하셨다.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의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은 십자가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어떤 추하고 더러운 죄에 빠져 있던, 아무리 힘들고 비참해져 상심해 있든 그분의 찔림과 상함과 징계 받음과 채찍에 맞음과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가족과 부모마저 해결 못해줄, 아니 그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할 고난과 죄악도 그분은 대신 짊어져 주신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8-10)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절대적 고난이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위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고난을 이미 다 당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인간에게 줄 것은 이제 위로뿐이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환난 중에 모든 위로로 함께 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미화시키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최고, 최악의 수치와 비방과 환난과 고통을 직접 겪으셨다. 어느 누구도 그분이 이 땅에서 가르치고 고치고 섬기고 사역하셨던 모든 일과, 특별히 마지막 그 죽음과 부활은 도저히 흉내조차 못 낸다. 하나님의 절대적 자비와 긍휼만이 인간의 절대적 죄악과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지 역사상 가장 크고 억울한 고난을 당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포함해 우주 전부를 다 아우르는 그분의 공의로 바로 잡지 못할 더럽고 추한 죄악과 흑암의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영원까지 신실하신 그분의 너무나 큰 사랑으로 용서하여 품어 주지 못할 죄인도 없기 때문이다.
신자가 겪는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적은 절대로 없다. 나아가 위로가 부족한 모습으로 계신 적도 절대로 없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그분은 모든 위로로 함께 하신다. 신자는 좌절은커녕 실망조차 할 이유와 근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성경이 지금 뭐라고 말하는가? 신자 본인에겐 당연히 모든 환난에서 모든 위로가 함께 하지만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도 능히 위로할 수 있는 만큼 그 위로가 넘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다고 하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다. 실크 자수의 책갈피처럼 눈에 보이는 인생은 모든 환난이 겹친 양으로만 이해된다. 그러나 그 모든 환난은 동시에 앞면에 아름다운 모든 위로와 함께 하고 있다. 그 앞면에 적힌 글씨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신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보지 못하는 것이 진짜 인생이다.
흔히들 신자들이 고난이 닥치면 이제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편이고 기도할 수 있으니까 자꾸만 그 결말만 빨리 보고 싶어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믿음으로 참아내려고만 한다. 그 인내의 끝에는 당연히 현실적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잘못된 기대와 함께 말이다. 심지어 눈앞에 고난을 짐짓 외면하고 일부러 유토피아를 상상하여서 믿음, 사실은 본인의 힘으로 이겨내라고까지 권한다. 신앙을 진정제, 마취제, 최면술로 사용하려 하는 짓이다.
모든 신자의 인생은 실크 자수의 책갈피와 같다. 단 한 명의 예외라곤 없다. 얽히고설킨 뒷면과 아름다운 무늬로 드러난 앞면이 동시에 있다. 어느 한 쪽만 있거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따로따로 하나씩 나타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또 인간의 눈에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보이는 쪽은 죽을 때까지 거의 뒷면뿐이다. 아름다운 앞면을 볼 수 있다거나 보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상상해낸 것을 자신의 믿음이 좋아서 보였다고 착각한 것일 수 있다.
믿음이란 훨씬 다른 것이다. 우선 아무리 삶에서 지저분한 뒷면만 보여도 앞면이,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항상 함께 있으며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앞면이 아름답다면 바로 그것이 인생의 진짜 실체라는 것도 당연히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당신께서 신자를 위해 계획하시어 당신만의 권능과 은혜로 이끌고 있는 인생이 오직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으로 반드시 덧입혀 주실 것도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순수하고 경건한 신자라면 자수 뒷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면의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짐작할 수 있다. 잘하면 퍼즐을 풀어나가듯이 세밀한 모양, 색깔, 크기 까지는 몰라도 앞면에 그려진 글자가 무슨 문장인지 그림이 어떤 모양인지는 알아맞힐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에 이미 그려놓은 큰 밑그림을 미리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그림대로 인생여정을 꾸려갈 수 있다. 그분이 맡기신 구체적인 소명을 깨달아 일생 동안 헌신 실천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보고 만지고 듣고 접하는 것은 얽히고설킨 뒷면 안에서다. 그러나 아름다운 앞면도 신자의 믿음 안에서 이미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먼 장래의 일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책갈피에 앞면이 함께 붙어 있듯이 말이다. 그런 확신과 체험이 항상 따르니까 모든 환난에 모든 위로가 넘칠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다른 이에게 모든 위로로 섬길 수는 결코 없을 것 아닌가? 또 그런 신자의 위로는 자기 의를 나타내는 자랑이요 교만으로 흐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단지 종교적 의무요 도덕적 가식일 뿐이다. 그 자체가 또 다른 멍에요 율법이 된다.
신자란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절대적 고난에 동참해 자기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인 자다. 또 그분의 절대적 위로를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난 자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 종교적 헌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자신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며 실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수 앞면이 항상 함께하므로, 아니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실체적인 삶으로 누리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의 모든 환난 가운데 그분은 모든 위로로 함께 하신다. 기도하고 있는 일부 큰 환난에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기도로 환난이 해결 되는 순간에만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한다고 환난이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환난은 여전하거나 더 보태지더라도 그 동안 잊고 있던 앞면의 실체를 기도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평생 지저분한 뒷면만 보고 살더라도, 특별히 고난을 만날 때에도 앞면이 있음을 결코 잊지 않는 실력이 바로 올바른 영성이다.
6/9/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