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200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갑자기 유턴하는 차
오늘 아침 집 사람을 직장까지 태워주는 길에 우리가 우회전 하려는 방향으로 갑자기 어떤 차가 유턴(U-turn)해 들어 와 깜짝 놀랐다.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직진할 차선에 있던 차였는데 마침 기차가 앞을 가로막아 지나가고 있는 그 잠간을 기다리지 못해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앞을 쏜살같이 앞지른 그 차는 얼마 못 가 또 다른 빨간 신호등 때문에 지체되긴 마찬가지였다. 추측컨대 그 차 주인이 꼭 해야 할 일이 많아 급히 방향을 바꾸었거나, 돌아 가면 시간이 절약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좁은 차 안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을 못 참은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무엇인가 남에게 뒤쳐지는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산다.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이 없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마치 뒤에서 무엇이 잡으러 쫓아와 무작정 앞만 보고 도망하는 것 같다. 아무 할 일이 없으면 셀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라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사실은 편안해진 것이라기 보다 까닭 모를 불안을 전화하는 동안만이라도 잊으려는 것이다.
특별히 이곳 미국생활은 정신 없이 바쁘다. 매일 하는 일이 똑 같은데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기본 생활이 보장이 안 된다. 가뜩이나 성공지향적, 물질 중심적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는 미국인데 ‘무엇이든 할 수 있다(You can do it!)’는 구호가 사람들을 더 몰아 부친다. 누가 표현한대로 미친 듯이 바쁘게 살지 않으면 순식간에 낙오자(loser)가 되기 쉽다. 많은 미국 사람들이 일 중독증 (workaholic)에 걸려 있다. 오직 일의 성취와 목표 달성에만 매어 달린다. 일과 연관되지 않은 인간관계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주말에도 가정을 제쳐 놓고 일에 파묻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바쁜 것은 일 중독증과는 다르다. 일 중독은 어쨌든 돈, 승진, 출세 등 돌아 오는 보상이라도 있다. 그리 바쁜 일도 별로 없고 실속도 차리지 못하면서 그저 마음만 바쁜 것이 우리다. 처음에는 성공하기 위해 빨리 달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성공 여부와 전혀 상관 없이 빨리 달리는 템포에 길들여져 그 템포를 늦출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친구와 대화를 즐기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술을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급기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경우와 같다. 일 중독이 아니라 템포(Tempo) 중독이다. 맹목적으로 빨리 달려야 직성이 풀린다.
하나님의 중지 신호
시카고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던 하워드 웨스런드 목사님이 청소년 집회를 비롯해 꽉 짜인 일정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다리에 심한 통증이 와서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다. 25년 동안 단 한 번도 몸이 아파 예배를 빼먹은 적이 없던 그가 최초로 예정된 집회를 취소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저는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는 일을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겠습니까? 그 동안 하나님께서 중지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얼마나 내가 하나님 일에 필요한 존재인지 따지기만 좋아했지 실제로 중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신자들의 삶에 때때로 하나님이 중지하라는 신호를 보낼 때가 있지만 그 목사님처럼 중지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가 우리가 건너야 할 고비를 막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중지 신호를 알아 채지 못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돌아서라도 빨리만 가려 한다. 하나님이 우리 갈 길을 열어 주지는 못할 망정 왜 되려 막는가 불평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이 중지 신호를 보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정말로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그 첫번 째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라는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완전히 잘못되었을 때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경우는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평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다. 신자가 청개구리나 럭비공 같이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니지 않는 한 당신의 자녀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막을 리 없다. 또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향한 생각이 죽 끓듯이 변덕 심할 리도 만무하다.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우리 삶은 향방 없는 달음질로 허공을 치는 듯 했었고 또 혹시라도 절대자가 있다면 틀림 없이 변덕 심한 심술 궂은 신이라 생각했었다. 나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는 일 마다 어떤 눈에 안 보이는 힘이 자기를 막아서는 경험을 통해 깨어질 대로 깨어져 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된 것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가 너무 청개구리나 럭비공 같아 그대로 두어선 도저히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고 안타까이 여겨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마다 막으셨던 것이다.
신자가 된 후로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러시지 않는다. 신자의 삶은 이미 방향이 바뀌었고 빛 가운데 들어섰다. 또 다시 큰 물줄기를 바꿀 필요가 없다. 나아가 신자가 무슨 일을 하든 빛의 자녀답게 믿음과 의와 거룩의 삶을 버리지만 않으면 하나님이 언제나 넘치는 승리와 축복으로 함께 해 주신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너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하나님의 중지 신호에 더 빈번하고도 중요한 이유는 신자더러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 서라는 것이다. 꼭 우리 가는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 템포 중독증에 걸려 조금이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해 하는 것을 없애라는 뜻이다. 일이 없는 것이 불안 것이 아니라 템포가 처지니까 초조해 한다. 무슨 일이건 우리 스스로 하고 본다. 하나님의 뜻도 묻기 전에 앞서 일부터 한다. 승승장구 하던 사울이 언제부터 하나님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게 되었는가?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자기 스스로 먼저 제사를 지낸 것 때문이지 않는가?(삼상13장) 어지간한 일로는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에 항상 하나님보다 앞장 서 더 빨리 달린다.
여호와 이레의 찬양
신자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굳건한 신념과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어떤 환난이라도 이겨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템포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범사에 주 여호와를 인정하여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 주신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잠3:5,6)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매사에 하나님과 정확하게 템포를 맞출 수 없다. 어떤 신령한 자라도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분명한 응답을 받고 확신을 갖고 진행하지 못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템포에 맞추려고 노력해 보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자가 하나님보다 앞서 가거나 뒤 쳐지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불신앙이요 후자는 신앙이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가 앞서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먼저 보내 드리고 뒤에 따라 가는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이 우리 보다 앞서가서 행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백 살에 낳은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도 아마 처음에는 눈 앞에 도저히 끝이 안 보이는 기차가 건널목을 완전히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은 알 수 없지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하고 일단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갔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는가? “네가 네 아들 네 독생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2,13) 하나님이 이삭 대신에 미리 준비해둔 속죄 양을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었고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는 의미로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칭하였다.
템포에 중독이 된 신자들은 평소 때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가만 있으면 불안하고 잠시 잠간도 멈춰 서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 신자가 저만치 앞장서 가고 하나님이 숨을 헐떡이며 한 창 뒤쳐져 달려 오는 꼴로 살고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 왜 이일, 저일 제 때 빨리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그저 하나님을 재촉하기 바쁘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우리의 출발과 정지와 도착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또 정하신 그 길을 기뻐하신다. 우리가 급해 먼저 가면 넘어진다. 잠시도 기다리지 못해 돌아가면 더 큰 위험을 만나거나 도리어 시간만 더 지체된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수시로 정지 신호를 보낸다.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제발 먼저 가지 말라고 타이르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중지 신호를 계속해서 무시하거나 모르고 지나면 그 목사님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제로 세우실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모든 실패에도 하나님은 넘어진 당신의 자녀의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주신다. 그러나 이미 넘어진 후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템포에 우리의 템포를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확실하고도 완전한 싸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을 먼저 보내 드려야 한다. 먼저 가신 하나님이 이제 따라 와도 된다고 손짓 할 때까지 잠시만 참고 있으면 된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였다. 오늘부터 우리 찬양의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 이미 일어난 좋은 일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가 건너야 할 건널목에 기차가 가로 막고 있을 때 찬양해야 한다. 그 기차는 주님의 정하신 길과 템포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님의 정지신호이기 때문이다. 또 기차로 가로막혀 있어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철길 너머의 더 큰 위험으로부터 지켜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먼저 가서 행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간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신 인도, 생업을 튼튼하게 해 주신 보살 핌, 많은 위로와 권면으로 영혼을 살찌워 주신 은혜를 찬양하는 것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주의 승리를 위해 찬양할 줄 알아야 한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7:12)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함께 찬양해야 한다.
비록 지금 당장 상황이 나아진 것 없고 눈 앞에 해결책이 안 보이는 것 같을지라도 아브라함처럼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스스로 준비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찬양으로 우리 앞 길에 모든 위험이 물러가고 사단이 우리 앞 길에 절대 발도 들이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찬양으로 우리 삶의 종과 횡을 걷고 행할 때 주님은 우리 밟는 땅을 반드시 차지하게 해 주심을 확신해야 한다.
내주의 승리를 위해 찬양하라. 먼 앞날의 비전을 품고 찬양하라. 하나님 나라가 땅 끝까지 확장 되는 것을 소망하고 찬양하라.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하늘과 땅 위의 그 모든 주님의 권세를 죄악과 사망과 사단을 향해 쏟아 부어라. 사단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가고, 지치고 실망하여 쓰러진 영혼들이 다시 일어서고, 무너진 성벽과 훼파 된 성전이 보수 되며, 죄악으로 가득찬 이 땅이 주님의 보혈로 다시 깨끗케 되는 것을 반드시 볼 것이다. 우리 앞을 가로 막는 장애를 찬양으로 벗겨라.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동안 찬양하라.
볼 것이기에 우리 앞의 장애물을 찬양으로 벗기기위해,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동안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