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리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아주 선한 고민이 하나 있다. 그것도 오랫동안 열심히 고치려 노력해도 여전히 해결 못한, 어쩌면 거의 고치기 불가능한 고민이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해도 속으로 은근히 염려하는 것이다. 바로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는가?”라는 문제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각기 다를 것이다. 술 담배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너무 쉽게 화를 잘 낸다, 여전히 현실적 형통을 염려하며 때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 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예배를 보아도 별로 기쁨이 솟지 않는다, 대표기도만 시키면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 한 번도 성경 통독을 한 적이 없다, 말씀을 규칙적으로 보지 않는다, 등등 온갖 이유가 있다.
그 중 한둘만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 같으니 정말 힘들다. 언제 그 많은 문제들을 다 고칠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나름대로 자기가 꼭 행해야 할 신앙생활의 최소범위를 정해 놓고 그 이상을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주일성수와 구역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하루 삼십 분 정도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기준을 잘 지키고 있으면 신앙에 더 이상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 스스로 잘 믿고 있다고 자위하려 든다.
이런 생각들은 믿음에 대해 아주 잘못된 접근을 한 것이다. 그만큼이나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아직도 믿음의 본질조차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작금 많은 교회들이 믿음에 대해 너무 잘못 가르치고 있다. 목회자들부터 잘못 알아 잘못 가르치고 있으니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신이 없어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열거한 그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행하여 겉으로 드러난 결과들이지 믿음 자체는 아니다. 믿음은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태와 자세이지 그 마음이 만들어낸 행위로 판단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 진술은 정확히 맞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호 모순되는 이중성을 지녔다. 신자들이 믿음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분명히 행동으로도 잘 나타난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면 그런 행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니까 당연히 믿음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가? 또 그럼 사실은 믿음을 올바르게 알고 있고 잘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그럼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행동으로 옮기는 측면에서 연약한가?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따르지 않는가? 그래서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믿음이 좋아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믿음의 본질조차 모른다고 말하는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것 아닌가?
이렇게 한 번 곰곰이 따져보아라.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그 모든 문제점들을 완벽하게 고쳤다고 가정했을 때에 과연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이제 성경도 줄줄 외우고 대표 기도도 물 흐르듯이 뜨겁게 하고 교회에서 중책을 맡아 성실히 봉사하고 모든 성도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치자. 물론 실제로 안 되어봐서 모르겠지만 그렇게 된 후에도 과연 자신의 믿음에 아무 문제없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은가 말이다. 아니지 않는가?
문제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자신감의 결여가 단순히 겸손하게 말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지난 오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런 노력 자체가 성공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 어쩌다 아주 성공한 적이 잠깐씩 있었지만 그 때를 회상해도 여전히 믿음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남들은 믿음이 좋다고 칭찬해도 스스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노력하여 성공할 자신이 별로 없고, 설령 그렇게 되어도 믿음의 자신감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스스로 짐작하게 된 것이다. 그럼 대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정말 믿음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지난 모든 신앙생활이 모래 위에 쌓은 탑처럼 헛된 짓이었는가?
가장 근본에서 출발하라.
앞에서 믿음을 간단히 어떻게 정의했는지 되돌아보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태와 자세라고 했다. 구태여 ‘상태’와 ‘자세’라고 구분한 이유가 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마음의 상태는 그분을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생각이다. 특별히 의지적 노력을 별도로 가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품게 되는 생각이다. 반면에 자세는 그런 생각에다 자신의 의지력을 동원해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거나 어떤 신앙 행위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해 믿음이 좋다 나쁘다, 자라거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분석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든 그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비뚤어지게 마련이다. 첫 단추부터 다시 바로 끼우지 않고는 절대 바로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면 저절로 그녀를 향한 애틋하고 뜨거운 마음이 생긴다. 따로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 다음에는 그녀를 위해 선물을 사주고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대신해 주고 싶은 결단이 자연스레 따른다. 그럼 돈을 열심히 벌어서 시간과 수고를 투자해 그녀를 정성껏 섬긴다.
지금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게으르기에 믿음이 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다. 그런 것은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 세 번째 단계에 해당 될 뿐이다. 돈이나 시간 여유가 따르지 못하면 애인을 행동으로 섬기지 못하거나 등한히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더 안타깝고 열정도 커진다.
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간단하게 이렇게 해석하려 하지 않는가? 믿음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태이지 않는가? 저절로 품어진 마음의 상태에서 그분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마음의 자세가 따르고 또 실제 현실의 여건이 허락하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마음의 자세마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실제로 행한 것이나 마음이 결단한 것까지라고만 해석하지 처음의 마음 상태는 점검하지 않는다. 믿음을 점검해보려는 시도의 첫 단추가 잘못 끼인 것이다.
어떤 문제라도 제대로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그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문제의 원인은 말씀과 기도에 등한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미 문제가 생긴 후의 증상(症狀)일 뿐이다. 이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분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그분을 그분으로 인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왜 그분을 위해 살려고 결단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 결단이 행동으로 옮겨지는데 무엇이 방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정작 심층적으로 따져야 할 부분은 그분에 대한 마음의 상태가 제대로 온전하지 못한 까닭이다. 과연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하는가? 좋아하지 못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자신의 믿음을 즉, 그분에 대한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보라.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를 말이다. 그에 대해 No 라고 대답할 신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분명 하나님을 믿고,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럼 그분에 대한 믿음의 상태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대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더 헷갈리게 되었는가?
우리의 믿음의 상태는 바로 이렇다. 열렬히 연애할 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분명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 좋아하고 믿는다. 그런데 가끔 내가 바친 열정만큼의 반응을 상대가 보여주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는가보다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열렬히 사랑하고 상대를 믿는 데는 변함이 없다.
이제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애할 때에 조금 의심이 들어도 여전히 믿고 사랑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믿는다. 그 사랑과 믿음에 하자가 없다. 어떤 면에선 의아심이 들수록 사랑과 믿음에 더욱 열정을 보태어 그 강도가 세어지지 않는가? 힘들 때에 더 큰 믿음으로 더 뜨겁게 기도하는 것과 같다.
결국 믿음에서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보이는 열심과 정성에 비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는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여기는 오도된 생각에 궁극적인 초점이 모인다. 이렇게까지 뜨겁게 기도했고, 봉사했고, 말씀 보았고, 경배했으면, 한 마디로 열심히 믿었으면 이런 저런 문제는 해결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실망감 내지 의구심이 우리 믿음의 보이지 않는 가장 밑바닥에 기초로 깔려 있다. 기초가 아니라면 최소한 믿음의 싹이 자라서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이 근본적 장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지금까지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정작 필요할 때에 열심을 내었어도 기대한 대로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다른 모든 신앙생활에서 열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앙연륜이 깊어갈수록 형식적 율법적 신앙으로 변질 된다. 간단히 뒤집어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내가 기대했던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나에게 반응을 보이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느 누가 그분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러지 않는 자가 더 바보이지 않겠는가?
믿음의 본질
이제는 하나님이 왜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볼 차례다. 그러나 그 전에 확실히 해두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이런 의구심 자체가 사실은 아주 큰 잘못을 내포하고 있다. 그분이 과연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칠 분인가? 그 반대로 우리의 기대가 그분의 수준에 비해 너무나도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아니 우리 기대를 감히 그분의 크기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잘못이 아닌가?
그런데도 작금 하나님의 수준을 아예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 보려 한다. 신자라도 여전히 죄와 탐욕에 찌들기는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기대대로 하나님을 끌어내리려 한다. 그분을 내가 작정하여서 믿은 대로 종교적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아주 좋은 믿음인 양 이해되고 있다. 또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떳떳하게 가르쳐지고 있다.
“왜 나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믿음 만능주의에 큰 원인이 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하면 현실적 풍요나 형통은 몰라도 어려운 문제들이 안 생겨야 되는 것 아닌가, 아니 남들은 겪지도 않는 이 한 가지 환난에서만은 건져주셔야 하지 않는가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런 기대대로 안 되니까 자연히 믿음에 힘이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종으로 부리려 했지만 자기 말을 잘 안 듣더라는 불평일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선언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분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또 다르기에 높다고 한다. 단순히 그분의 생각이 우리보다 큰 것이 아니다. 큰 믿음을 갖고 큰 비전을 세워서 큰 정성으로 섬기면 크게 열매 맺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내가 기도한 제목의 수십 배로 늘려 주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생각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기에 당연히 그 양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을 상대로 연애할 때는 성의껏 최고의 선물을 주었는데도 시큰둥하면 새로운 남자가 생겼는지 의심이 들 수 있다. 주는 것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빈말이라도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상대의 사랑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상대의 생각이 진짜로 이미 나에게서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가 있다면 즉, 생각과 길이 다르다면 당연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쁜 목적으로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에는 말이다.
그럼 우리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분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식어버리고 다른 대상을 찾아서 딴 마음을 먹었는가? 또는 우리를 이용해서 당신만의 욕심을 채울 의도가 있는가? 절대 아니지 않는가? 당신께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까지) 주셨지” 않는가? 우리를 악용해서 욕심을 채우려는 것은 사단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기대에 그분이 부응하지 못해서 우리 믿음에 의아심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고 있기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이다. 기껏 내가 세운 계획을 그분은 몇 배라도 불려줄 수 있다는 생각 밖에 못한다. 그분과 우리의 생각과 길의 차이는 오직 능력뿐이다. 성경은 분명히 능력이 아니라 길과 생각이라고 명시했는데도 자꾸 능력의 우열만 감히 비교한다. 그 차이를 가능한 좁히는 것이 좋은 믿음이 되어버렸다. 성경대로 하면 그분의 뜻이 우리와 다름을 겸비하게 인정하고 얼마나 다른지 아는 것이 좋은 믿음이어야 한다.
그분과 나를 능력으로만 비교하니까 더 큰 실망과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신자를 단순히 인도하고 보호만 해선 안 된다. 더 크고 풍성하고 화력하게 채워주지 않으면 그 채워지지 않는 부분만큼 믿음도 저절로 약해진다. 대신에 천신만고 끝에 채우면 믿음은 아주 좋은 것으로 치부된다.
다시 정확히 따져 보자. 그분의 생각과 길이 우리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차이를 줄여나가야 하는가? 아니다. 차이를 줄이는 것은 생각과 길이 같은데 그 크기만 다를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은 A이고 인간의 것은 A' 혹은 a일 경우다. 반면에 그 생각과 길이 전혀 다르다면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A이고 인간의 것은 B일 때다. 결국 하나님의 품성뿐 아니라 그분이 세상과 신자를 다루는 원리들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나아가 그 원리들의 배경에 있는 그분의 궁극적인 뜻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믿음의 본질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더 깊이 자세히 알아가려는 마음의 갈망이다. 또 알아가려는 갈망이란 어떤 완성된 상태, 절정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미 속속들이 완벽하게 알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믿음은 항상 자란다고 말하는 것이 이런 면에선 맞는 표현이다. (믿음이 자란다고 말하는 것에 불합리한 측면도 있다는 뜻이다. 아래에 그런 내용이 나올 것이다.)
어쨌든 이런 자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질적 양적 정도의 자람을 말한다. 나아가 그 앎이 깊어지고 정확해질수록 필연적으로 그분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 따르고 또 행동으로도 드러나게 된다.
결국 믿음 성장을 점검하기 위해 흔히 통용되는 기준인 기도 잘하고 성경 많이 보는지, 봉사와 전도는 잘하는지 등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열망이 자연히 기도와 말씀으로 이어지면 그 믿음은 옳은 것인 반면에 그런 소망이 없이 단지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또 그럼으로써 반대급부를 기대한다면 아주 잘못이다. 심지어 기독교 신자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정도로 여겨도 큰 잘못이다.
한 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분과 동행하고자 하는 열심이다. 따라서 이런 소원과 열심을 제 삼자가 측정할 기준은 사실상 없다.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둘 만의 은밀한 관계다. 진심으로 기꺼이 그분을 알아나가기를 소원하는 크기, 역으로 말해 그분의 나를 향한 기대를 온전히 알고자 하는 갈급함이 바로 믿음이다.
왜냐하면 신자의 갈증이 클수록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깨닫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향한 그분의 뜻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갈증도 생기는데 하나님이 이번에도 절대 외면할 리는 없다. 그분이 그 뜻을 이룰 능력과 여건도 다 마련해 주신다. 말하자면 신자의 믿음이 성장, 진보하게 된다. 또 그분이 채워주시는 믿음인지라 온전한 믿음이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된다.
한국 신문에 연재되었던 인기 만화 “외인구단”의 주인공 까치가 사랑하는 엄지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 나중에 유행가로도 크게 히트 쳤던 명대사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분이 나에게서 정말로 바라는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신한다면 당연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올바른 믿음 아닌가?
우리 믿음의 실상
그러나 우리 믿음의 실상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뭔가 해주지 않으니까 그분의 마음이 변심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저 어쩔 줄 모르는 정도 밖에 안 된다. 나아가 내 혼자서 그분을 위해 열심을 내보려니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아서 그냥 이 모양 이대로 믿고 말겠다고 주저앉아 있다. 왜 내 믿음이 자라지 않지라는 너무나 빤한 타령을 뇌까리면서 말이다. 마치 그런 타령을 하는 것으로 믿음이 모자란 잘못을 변명 내지 핑계로 삼아서 말이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사랑은 절대로 영원토록 변개가 없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그저 혼자서만 의심했다가 믿었다가 또 다시 의심하니까 믿음이 자라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단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지레 짐작해서 말이다. 그분의 생각과 길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고 넓은지는 아예 안중에도 안 둔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신자들이 믿음이 왜 잘 자라지 않는지 고민하는 것은 분명 선한 것이다. 또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일면 하나님에 대한 갈급한 소망을 갖고 있음도 반증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미래의 삶을 지향해 개선, 진전되어야 한다는 점도 인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이 완성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항상 변하는 것이기에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한다는 원리까지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많다.
그런데 하나님을 더 깊이 안다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은 무한히 크시니까 다른 것도 아주 당연하며 또 그래서 그분 앞에 필요한 것은 오직 순종과 경배뿐이라고 이해하고 치운다. 그 정도로는 사실은 많이 부족하다. 자칫 하나의 객관적 교리로 인정한 것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고 인간은 그에 비해 무한히 작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에 그친다. 교리적 진리로만 알고 있으면 참된 순종과 경배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깨달음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항상 주관적 체험을 수반해야 한다. 신자더러 종교 행위에 몰두하라는 뜻이 아니다. 삶에서 실제적인 은혜와 권능으로 체험되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성적인 개념, 철학, 사상으로 머무는 것은 아무리 고상하고 심오한 깨달음이 따른다고 해도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실제로 믿음을 갖고 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삶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우리와 다른 그분의 길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알면 따르지 않을 자 어디 있느냐고 반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오히려 잘 알고도 모른다고 뻔뻔하게도 시침 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솔직히 자신에게 물어보라.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
이렇게까지 닦달하면 마지못해 그분의 길은 신자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 사실은 다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 자신의 그분을 향한 뜻을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그나마 봐줄만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또 실제로 도덕적 종교적 열매를 많이 맺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에 따른 보상은 못 줄망정 최소한 어려움은 제거해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도무지 그러지 않으니까 그분의 길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단사상이나 노골적인 기복신앙에 물들지 않아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기복신앙과 하나 다를 바 없다. 기복신앙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곳도 도덕적 종교적 열매를 맺으면 현실의 복을 직접 플러스 해준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일반 교회에서도 도덕적 종교적 열매를 맺으면 현실의 복을 직접 플러스 해준다고는 가르치지 않지만 이미 생긴 마이너스(환난, 문제)를 없애준다고는 가르친다. 마이너스가 상쇄된다는 것은 표현만 다르다뿐이지 결국은 플러스가 되는 것 아닌가? 신자의 도덕적 종교적 열매를 대가로 하나님의 보상을 되돌려 받으려는 거래를 한다는 측면에선 너무나 동일하다.
바울의 믿음의 자세
본문에 드러난 바울 사도의 믿음의 자세를 보라. 빌립보 감옥에서 사형으로 생이 마감될 것을 예감하면서 지난 삶을 반추해보고 있다. 자신의 생애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에게 맡긴 소명을 달성하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살아온 삶이었다. 신자라면 누구나 그처럼 살아야 한다.
물론 그의 믿음에 관해선, 특별히 성장에 관해선 본문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바는 없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얼마든지 유추는 가능하다. 신자가 된 후에 믿음이 성장해야 하는 까닭은 당연히 신자가 살아야 할 삶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믿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고 또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믿음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행위에만 국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하며, 소속된 공동체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 믿음과 삶이 절대로 분리되어선 안 된다. 믿음은 인생 전체를 완전히 바꾸기 위해 존재하고 실제로 기능해야 한다.
신자의 삶이란 신자가 된 후부터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중의 모든 사건에 관한 개별적인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아는 것은 아주 어렵다. 반면에 그분의 신자를 향한 생각의 처음과 끝은 너무나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 그럼 그 중간과정인 신자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도 그에 비추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바울의 믿음의 본질이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본문은 그가 살아온 믿음의 자세를 소명에 붙들려 뒤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이 부르신 뜻대로 앞만 보고 살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된 시작과 그렇게 삶으로써 맞게 될 마지막 결과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신자로서의 출발을 보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高尙)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7-9)
아무 공로와 자격이라곤 없었음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은 전부 버리고, 아니 오히려 해롭다고 확신하여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 살기로 했다. 믿음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변할 때에 이미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불타는 마음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마음의 자세도 자신의 남은 생애에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으로 결단했다. 평생을 두고 그분에게 받은 소명만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또 그가 도착할 궁극적 목적지가 어디라고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천국에서의 부활이 믿음의 여정의 최종 도착지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절)
본문이 단순히 그가 받은 소명에 계속 충성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시작과 끝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 끝을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겠다는 말이다. 오직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즉, 부활의 면류관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다. 부활을 맛보기 전에는 믿음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오직 부활을 소망하며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믿음의 시작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이었고 그 끝은 부활이었다.
신자의 일생
그런데 이것이 그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불과한가? 또 그의 인생에만 해당되는 사항인가? 둘 다 아니다. 우선 그에게 하나님이 심어주신 믿음이다. 그 스스로 깨달은 믿음이 아니다. 또 예수 믿는 모든 신자의 인생에 공통으로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이다. 말하자면 신자의 일생을 향한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다. 그분은 신자가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그분의 향기를 드러내며 천국을 향해 걸어가라는 것이다. 이미 부활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일생의 출발은 골고다 십자가이며 도착은 천국부활이다.
그럼 그 중간 과정에서 즉,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일생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길과 생각도 분명하게 되었다. 신자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 풍요나 궁핍이든, 형통이나 환난이든, 현실적 성공이나 실패든, 건강이나 질병이든, 도덕적 성화나 죄악에 넘어짐이든, 종교적 성실함이나 나태함이든,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다. 세상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천국 입성을 향한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풍요와 궁핍 등 그 자체에 그분의 길과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믿음이 우리와 다른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바울은 지금 곧 바로 사형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믿음의 여정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가장 중요한 목표가 남았다고 한다. 사실 그는 사도로서 충성했다. 그만큼 열심히 소명에 붙잡힌 삶을 산 자가 없었다. 그럼 이제 지난 삶을 살아보니 후회할 것이 없으며 나름대로 참 보람이 있었다고 회개해야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부활을 잡으려고 또 다시 담담히 걸어가겠다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겠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비록 처형의 고통은 따르겠지만, 기꺼이 참예하겠다는 것이다. 또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런 최고조의 고난의 순간에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당부했다. 사형수가 마지막 남긴 유언이 “기뻐하라”였던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내포된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정확이 읽고 있었다. 의아심, 의심, 불만, 불신으로 흐를 여지라곤 전혀 없었다. 신자로서의 인생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일직선으로 이어진 선상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실천했다. 세상의 현실 여건이나 자신의 외적 상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오로지 천국의 면류관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삶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 믿음으로 살게 된 계기와 믿음으로 살고 난 결과를 어떻게 산정하고 있는가? 자신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출발이다. 그리스도의 의에 완전히 사로잡힌바 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것이 목표가 된다. 자연히 당장 겪고 있는 사건에만, 지금 처해 있는 여건에만, 자신의 현재의 위치에만 관심이 가 있다.
다른 말로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길 뿐”이라는 인식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이제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더 유익하게 만들 뿐”이라는 각오와 헌신만 있다. 자신의 매일, 아니 매순간의 삶이 십자가에 출발하여 천국으로 걸어가는 도정(道程)이라고는 생각은 전혀 못하거나 아예 잊어 먹고 산다.
믿음이 왜 이리 자라지 않는지 의구심과 불만이 드는 문제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다. 현재는 반드시 어떤 목적지에 도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반드시 믿음으로 어떤 결과가 도출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예컨대 기도도 잘하고 있어야 하고, 장로가 되어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하고, 죄도 안 지어야 하고, 어떤 환난이 닥쳐도 전혀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등등 모두가 어떤 완성이 아니라면 최소한 문제의 해결을 지향한다.
바울의 경우는 믿음이 계속해서 걸어가는 과정이었다. 이 땅에서 완성은 없었다. 단지 걸어가고만 있을 뿐이다. 각각의 개별적 사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개별 사건이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뒤를 안 돌아볼 리가 없지 않는가? 그에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 자체로는 어떤 실체적 의미도 없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물론 그에게 현실의 사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영원하고도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없는 일들이기에 돌아보며 연연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것들이 믿음으로 이루어야 할 진정한 열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천국의 면류관을 향해, 예수님을 진짜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며 바라볼 그 순간과 영광을 소망할 따름이었다. 또 그리스도 외의 일들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소개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믿음으로 정작 이룰 일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라고 했는가? 오직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라고 했다. 믿음의 출발,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계기가 어디였는지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으로 어떤 행위를 해야만 하고 그래야만 믿음이 자란 것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다. 믿음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은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권능으로 채우는 것이다.
또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으라고 한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면 자연히 자신의 유익은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이어지며 또 성령의 권능이 작용하여 담대하게 천국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믿음을 그 믿음의 본질대로 유지하면 자연히 믿음은 자란다는 것이다. 아니 자라고 자시고 할 것도 사실은 없다. 자신의 가슴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넓게, 길게, 높게, 깊게 차있는지가 바로 믿음이다. 종교적 활동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키울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갈증이 믿음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더 많이 알아나가느냐, 그래서 그 안만큼 삶에 실제로 적용하느냐가 믿음이다.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의 필요조건이고 그래서 자신의 문제와 환난이 해결되는 것이 믿음의 충분조건으로 판단하고 있는 한에는 무슨 수를 써도 믿음은 자라지 않는다. 항상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신자에게도 세상의 죄악과 쾌락과 재물의 유혹은 동일하며 사단의 훼방은 더 심하다. 나아가 현실에서의 문제와 환난이 신자를 더 괴롭히면 괴롭히지 절대 비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믿음을 현재의 문제에만 적용하니까 또 다른 문제가 닥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키워야 한다. 심지어 전번에는 이보다 큰 문제도 믿음으로 잘 버텼는데 이번에는 왜 이리 힘들지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불평이 생긴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힘든 일이 겹치니 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믿음의 세기가 아니다.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는 심지어 자신의 믿음마저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다. 정확히 말하면 믿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동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자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졌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믿은 것이 아니다. 은혜로, 선물로, 값없이, 심지어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을 때에 그분이 먼저 일방적으로 자신을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신분, 위치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을 보라. 나의 나 된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존재마저 그분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분에 의해서 사로잡혔고, 불러내어졌고, 부름을 받았고, 사도로 세워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본문에서도 그분의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한다. 자기 일생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되고 진행되고 종결되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빼면 자신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빈껍데기뿐이라는 고백이다.
신자가 골고다에서 출발하여 천국으로 가고 있으면 믿음이 좋은 것이다. 실제로 이미 다 자란 것이다. 따로 더 키울 믿음도 없다. 그러나 믿음의 열매마저 다 열린 것은 아니다. 그 열매는 천국에서 완전히 열릴 것이다. 천국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신자라면 믿음 자체로선 더 보탤 것이 없다.
대표 기도를 잘못해도, 장로가 되어 있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다. 기도란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따로 장로다운 기도는 없다. 또 자신이 천국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주위에 보여 알게 하면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 않아도 장로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풍요에도 실족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 사람들로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권능에 관심을 갖게 만들면 된다.
말하자면 믿음을 키울 수 있는 특정한 도덕적 종교적 방법이 따로 없다. 단지 예수를 어떻게 더 많이 아느냐, 그래서 그분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더 채우느냐에 달린 것이다. 교회의 특정한 프로그램에 따른 훈련과 연습으로 믿음이 자란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는 길 뿐이다. 성령의 조명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나가며 그 알게 된 만큼 실제로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
믿음을 키우려고 자기 믿음의 크기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실체를 질량으로 따져 우열을 정하지 못한다. 대신에 정말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위하던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얼마나 많이 버릴 수 있는지 따져보면, 그래서 얼마나 많이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지 재어보면 바로 그것이 자신의 현재 믿음의 상태일 뿐이다.
혹시 도무지 내 것을 그분을 위해 버리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분을 갈망도 하지 않는다면 다시 골고다로 돌아가는 수 말고는 없다.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 안에 들어오지 못한 믿음은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골고다에서 출발해 천국으로 일직선으로 연결해서 걸어가고 있으면 가장 올바른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길부터 찾아야 한다.
바꿔 말해 “나는 왜 이리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가?”는 신자가 정작 고민할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도덕적 종교적 훈련 밖에 얻지 못한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내게 유익하던 것을 정말 모두 버릴 수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통해 십자가 진리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다시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진짜 버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분을 알아나가야 한다. 그것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직 그분의 의로만 덧입혀지기를 간구하면서 말이다.
8/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