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쉽고도 편하게 대하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관계와 교제
신자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면서 친밀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가 체감하는 교제의 친밀도는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신앙 연륜이 오래 될수록 오히려 그 교제가 메마르고 가슴 떨리는 감격은 실종되어있습니다. 그 이유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분과의 교제(fellowship)의 기본적 특성부터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던, 개인끼리든 교제를 하려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서로 간에 일단 관계(relationship)부터 맺어야 합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이나, 한 쪽에서만 상대를 아는 일방적 관계로는 결코 교제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또 상호간에 혹은 회원들 간에 기꺼이 교제하겠다는 자발적, 적극적, 능동적 참여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친목단체의 경우 가장 먼저 회원 가입부터 해야 합니다. 회원의 자격 제한에 부합해야 하고, 또 가입 및 등록 절차도 필해야 하며, 나아가 회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임무 사항들도 지켜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절차를 지켜야만 교제가 시작되고 또 회원으로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임무를 지키지 않으면 회원 자격이 취소되거나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제한을 받기도 합니다. 준회원, 초빙회원, 참관회원, 게스트 등으로 회원의 자격, 임무, 권리에 차등을 두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신자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그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이미 맺어졌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으면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고 영생의 삶이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자는 성령이 내주하는 전으로 바뀌며 성령은 영원토록 신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사회의 교제와는 달리 그 관계가 언제라도 변경 내지 취소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과 신자 관계를 유지되게끔 하는 어떤 규정된 임무도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관계를 유지시키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은 후에는 그야말로 그분과 교제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자 쪽에서 행해야만 할 의무에서 어딘가 태만하면 그 관계도 약해지거나, 심하면 취소도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신앙생활이 그분이 명한 명령을 준수하는 일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춥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착각하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화된다고 간주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교회의 멤버라고, 그것도 자기 행위와 기분에 따라 정회원에서 준회원이나 참관자 등으로 강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런 생각은 어쨌든 경건하고도 의로운 종교적, 도덕적 결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니까 다행입니다.
이보다 훨씬 잘못하는 교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는 이미 취소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져 있음도 모르고 그 관계부터 순간순간마다 다시 맺으려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지금 나와 함께 해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항상 갖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잘 봐주어서 하나님 제발 주무시지 말고 저의 말을 경청하시고 또 저가 처한 이 어려운 일들을 하감(下鑑-위에서 아래로 살펴보는 것)해 달라고 요구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점쟁이들은 귀신이 자기에게 들어와야만 점괘가 나오니까 언제나 그 신을 불러 내리는 강신(降神) 절차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지금 자기에게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신에게 바친 복채가 많으면 많을수록, 최소한 신을 부르는 정성이 더 열렬할수록 강신 절차와 시간이 단축된다고 믿습니다.
갈멜 산에서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 단 한명과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그런 오류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18:26) 급기야 바알 선지자들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28절) 하면서 자기들 신을 불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강신절차를 최고의 치성을 드려 시행했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우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들을 향해 엘리야가 조롱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큰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27절)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착각 내지 염려하는 심정과 아주 동일하지 않습니까? 만약 엘리야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조롱을 퍼붓지나 않을까요?
성령으로 인 쳐진 관계
고대 사회에선 왕의 도장이 찍히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앞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조시대 어명(御命)을 떠올리면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 순전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도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御印)을 찍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신자는 이미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sealed)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인간 왕의 도장만 찍혀도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명시하는 서류에 성령의 인감이 이미 찍혀 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이를테면 신자는 아버지 성함이 하나님이고 또 그분이 친필로 서명한 새생명의 출생증명서(Birth Certificate)를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성삼위 한 분이신 성령님이 직접 신자의 영에 좌정하시어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과 시공간으로 제한된 이 땅에 현현하여 종이로 된 서류를 줄 수 없다 뿐이지, 그것과도 도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증이지 않습니까?
혈연으로 맺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출생증명서를 근거로 호적에 등재되며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변화,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서로 마음에 안 들어 부인하고 싶어도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관계는 세상 어느 것으로도 변경 취소는 물론 어떤 영향조차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예수님의 피로 부모와 자녀 관계로 이미 맺어졌지 않습니까? 나 밖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이라도 그 관계를 부인, 변화, 취소는커녕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아버지는 때려 죽어도 아버지인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본문도 성령의 인치심이 어떤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까?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한마디로 천국 영생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지금 당장 죽어도 눈을 뜨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땅의 끊이지 않는 갈등, 상처, 슬픔, 분노, 궁핍, 고통,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최고 기쁨이자 우선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신자로선 천국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 최고의 축복을 이미 확보해 놓은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야, 아니 실제로 그렇게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따위 고난이 대체 나를 묶고 괴롭힐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당장이라도 천국 갈 수 있는 내가 이 정도 일로 염려 불안해하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상 어떤 것도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비록 내 육신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일지 몰라도 내 이 당당한 마음만은 절대 죽이지 못한다. 설령 육신이 죽어도 바로 그것이 내 아버지의 계획인데다 눈 뜨면 천국인데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 있는가? 어떤 힘든 문제, 핍박, 고난, 재앙도 부딪혀 싸워 이길 수 있다. 정말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 하나님이 바로 내 아비지인데 뭣이 두려워 그렇게 못하겠는가?”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더러 그렇게 하라고 권면, 아니 이미 그럴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1,32,35,37)
말하자면 믿음은 바로 배짱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기에 넉넉하도록 넘치는 여유입니다. 골목대장이 친구거나, 힘센 형을 둔 꼬마는 마음껏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어떤 후미진 골목에 가더라도 겁나지 않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시쳇말로 하나님은 때려 죽여도 신자의 편입니다. 아니 실제로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 우리 편을 서주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무슨 염려, 걱정할 것 있습니까?
그분께 나아가 말만 해라.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출생증명서를 이미 받아 쥔 자입니다. 그분과는 관계를 새로이 맺을 이유가 없는 것은 물론, 더 강하게 만들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 그분과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교제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도 틀렸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분명 이미 나의 아버지이고, 언제 어디를 가나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더 잘 사귀는 법을 배우는 아들이란 세상에 없는 법입니다. 혹시 아버지를 잘 모시는 법을 배울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잘 모시기를 바라는 아버지라면 이미 온전한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올바른 아버지라면 자나 깨나 그저 자식 잘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도 아버지께 잘 보여서 뭔가 얻어 내려는 심보가 있다면 참 자식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하나님과 교제를 잘하려면 관계를 새로 맺거나 강화할 필요 없이 곧바로 교제부터 그냥 시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교제를 특별히 잘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방책도 따로 찾을 필요 없습니다. 관계의 차원을 새롭고 더 은혜롭게 높이겠다는 인식부터 오히려 없애야 합니다. 우리 생각, 기대, 아니 최대한도로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풍성하고도 신비하며 아름답게 이미 맺어져 있는 관계를 그저 누리면 됩니다.
아버지는 언제 어떤 일로 찾아가 뵈어도 여전히 늠름하고 풍성하며 의지가 되지 않습니까? 멀리서 아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또한 그저 그냥 의지가 되는 하나님 아버지로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곁에서 항상 함께 계신 분을 두고 자꾸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것은 봉사 아니면 정신이상자가 하는 일입니다. 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며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분을 자꾸 주무시는지, 우리 기도를 듣지 못하는지, 어디 외출하셨는지 의심하면 우리가 생각해도 너무 우스운 일 아닙니까?
물론 그런 의심 내지 불만이 스쳐지나가거나 때로는 우리를 사로잡을 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고달프고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아주 위중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우리의 갈급한 심정을 말로서는 그렇게까지 표현할 수밖에 없는 즉,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열망한다는 반어법적인 진술이긴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고 계심을 모르거나, 우리가 이미 성령의 인치심을 얻어서 기업의 보장까지 받았다는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다면 아직은 올바른 믿음을 미처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다 알고 또 믿지만 자꾸만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여전히 문제는 하나님 함께 해달라고 요구하기만 하지, 이미 함께 하고 있다는 진리를 단지 다시 기억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를 다시 살펴봅시다. 먼저 백성들에게 도랑을 파고 물을 가득 부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왕상18:36)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도 분명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그분을 불러내는 즉, 관계부터 형성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 부르되”가 아니라 “나아가서 말하되”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들 조상의 하나님이 곧바로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로 이미 이어져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보장되어 있기에 도랑에 불을 내려 태워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자신이 주의 종 됨과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과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37절)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백성들 앞과, 특별히 바알 선지자들 앞에 드러내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는 이미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니 그들로 분명히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와 관계를 더 강하게, 심지어 친밀하게 맺을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또 그들로 그런 관계를 알게 해달라고 했지, 이스라엘더러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인줄 새롭게 믿고 그분 이름을 부르면 이제 관계가 형성된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에서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아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맺어진 것은 더 이상 염려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과 엘리야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천하가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변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여겨라.
그분과 이미 형성되어 취소되지 않는 관계를 누린다는 것은 의외로 아주 간단합니다. 그분을 진짜 아버지로 대하면 그만입니다. 항상 함께 하기에 언제나 그분께 일상 대화하듯이 주절주절 아뢰면 됩니다.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한 일까지 일러 바쳐야 합니다. 자기 소원과 계획, 그 안에 자칫 욕심이 내포될 수 있어도 하나 남김 없이 고해 바쳐야 합니다. 잘못한 일 있으면 솔직히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6)고 명하고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령하고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더 교제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아들이 아빠한테 항상 정장 입고 존댓말만 쓰면서 앞뒤 논리가 정연하고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겸손하게 정식으로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도리어 아빠가 복통이 터질 것입니다. 세상 어떤 부자가 그런 식의 관계를 유지하겠습니까? 아주 특별한 날, 예컨대 아버님 생신에, 그것도 잠시 인사말 드리는 순간 빼고는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주 쉽고도 편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저 그냥 아버지입니다. 무엇이든 의논하고 간구하는 것은 물론 모르는 것 있으면 일일이 물어봐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 놓고 떼쓰고, 대들고, 따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대화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도 하나 숨겨진 의도나 모략 없이 나눌수록 그 관계는 친밀해지는 법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교회활동이나 종교적 행사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이가 친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무조건 자주 만나야 합니다. 또 스스로 나부터 격의 없이 상대를 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과의 교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부터 그런 관계로의 초대이지 않습니까?
삭개오의 경우에서 보듯이 실제로 그분은 세리. 죄인, 창녀, 고아, 과부, 병자를 먼저 찾아가서 친밀하게 교제했지 않습니까?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멸시했으며 율법으로는 절대 만져선 안 되는 중풍병자들에게, 심지어 죽은 시체에도 아무 스스럼없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새 생명을 주시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증명하는 출생증명서를 안겨주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主人)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하였음이니라.”(요15:15) 독생자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단지 호칭만 격상시켜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이미 그분과 같은 신분이 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하나님은 오래 전에 모세도 친구처럼 대우해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와계시는 신자도 그와 마찬가지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대면(對面)이 아니라 아예 내재(內在)하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바로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하나님과 항상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지 않거나, 임재는 해도 졸거나 외출하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졸거나 외출하거나 손을 놓고 밖으로 싸다니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고 있습니다. 관계부터 맺으려 하든지, 내 임의로 그 관계를 더 강하게 하려해봐야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습니다. 아침마다 친아버지를 찾아가서 호적등본 보여주어야 아버지로 인정하겠다고 덤비는 꼴입니다.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친밀한 교제를 하려면 진짜로 친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는 친하지도 않는데 겉으로만 친한 척 해봐야 오히려 불편하고 거북스러울 따름입니다. 정말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저 그분을 편하고도 쉽게 대하면 됩니다. 무엇이든 쉬지 말고 그분과 대화하는 자세로 일상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 결과로 세상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든든한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속에서 만들어내는 의지적인 담대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바뀐 내 신분과 확보하고 있는 그분의 기업 때문에 내속에서 금할 수 없는 확신이 솟아나야 합니다. 전자는 시쳇말로 똥배짱이고 후자야말로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세상은 갖지도 알지도 못하는 참 믿음인 것입니다.
1/31/2011
저는 전에 이를 배수진 믿음으로 이해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믿음 - 모세가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의지적 담대함이 아니라, 내 속에서 금할 수 없도록 솟아나는 확신!!!
귀에 쏙 들어오도록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른 사이트에서도 은혜받았다는 고백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