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2004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토기장이는 무슨 그릇을 굽더라도 반드시 그 용도와 목적을 정해 굽는다. 아무리 특이한 형태로 만들어져 식사 때에 쓸 수 없다 해도 그것을 만들 때에 토기장이의 마음에는 장식용이나 잡동사니를 담아두는 용도로 쓰겠다는 목적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토기가 스스로 파티용, 장식용, 식사용이 되고싶다고 정하는 법이 없고 또 정할 수도 없다. 인간도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 무슨 일을 할까 스스로 정하고 태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시작한다. 우리를 지은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기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다면 지은 자의 분명한 목적도 따로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목적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 정한 목적대로 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무슨 공부를 해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누구랑 결혼해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현실 생활의 종류와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정하도록 우리 재량에 맡겨져 있고 그래서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살든 상관하지 않으신다. 죄악을 추구하는 직업이 아닌 이상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일차적인 관심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분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느냐이기 때문이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든 간에 언제, 어디서, 누구랑 같이 있더라도 절대 바뀌지 않는 자기 삶과 인생에 관한 일관된 방향성에 관한 문제다. 평생에 걸쳐 자기라는 존재가 반드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근거와 기준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한 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창세기 1:1의 선언을 믿는 신자라면 바로 이 구절에 명시된 목적도 함께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조물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신자가 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가? 찬양 예배를 매일 드려야 하는가? 집에서나 자동차 안에도 찬양 테이프를 항상 틀어 놓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97년 만에 처음 받은 교통 위반 티켓
며칠 전 미국 NBC TV의 Today Show에 조그만 시골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와 대담하는 장면이 나왔다. 자기 차를 몰고 미장원을 가다 경미한 위반으로 걸렸는데 몇 년 전 차량등록세를 늦게 내는 바람에 발부 받은 벌금을 내지 않은 것이 컴퓨터 조회로 드러났다. 그래서 경찰이 수갑을 채우고 유치장에 반나절 감금시킨 것이 사연이지만 미국에선 다반사로 일어나는 너무나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전국 TV에서 인터뷰한 까닭은 그 할머니의 나이가 무려 97세였기 때문이었다. 화면으로도 너무나 정정해 보여 많아야 70대로 보일 정도니 직접 운전한다는 것이 전혀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려 70-80년간을 운전하는 동안 과속으로 한 번 경고 당한 것 외는 교통위반 티켓이라곤 받은 적이 없었다. 문제가 된 벌금도 나이가 들어 어쩌다 보니 잊어버리고 못 낸 것이지 돈이 없거나 고의로 안 낸 것도 아니었다. 두 아들을 성형외과 의사와 법원 판사로 키웠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회자가 작은 마을이라 누구라면 다 알만한 할머니를 수갑을 채우고 감옥에 가둔 경찰이 너무 심했고 본인도 억울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그녀는 좀 부끄럽긴 했지만 경찰은 응당 자기들이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본인도 잘못했으니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당한 일이라 재미있었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운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처음에는 농담으로 15년이라고 했다가 곧 솔직히 한 2-3년 정도 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쳐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라고 하면 항상 도덕적으로 경건해야 하고 종교적으로 열성을 보이고 감정적으로도 뜨겁고 영적으로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대담 장면을 보면서 저 할머니가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직접 운전하고 다닐 만큼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강건하게 잘 관리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고, 사회 질서와 법에 잘 따르며 순종했고, 자기가 할 바를 일이 적든 크든 성실히 수행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최대한 열심히 산 것이다.
찬양의 본질
찬양이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주신 인생과 삶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인생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불신자 가운데도 얼마든지 그렇게 사는 자가 많다. 신자의 삶은 성실 위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열심히 살되 모든 순간을 즐기며 살아야 찬양이다.
그 할머니는 대담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고 유머를 구사해 주위를 웃기며 자신도 즐거워 했다. 그녀의 지난 97년간의 삶을 두 마디로 정리하면 성실과 기쁨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감사와 웃음이다.
장로교에서 세례를 주기 전에 성도의 신앙을 확인하는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이란 것이 있다. 그 첫 질문이 “인간의 가장 제일 되고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인데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이를 믿고 실천하는 자가 신자라는 뜻이다. 신자가 찬양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기 때문에 찬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찬양은 의무나 주문(呪文)이거나 아부에 불과하다.
찬양이란 하나님이 나라는 존재를 지으시고 이 모습으로 이 때에 이 곳에 보내어 이 형편으로 살게 하신 바로 그 삶을 기뻐하여 즐겁게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을 소중히 여겨 귀하게 가꾸어야 한다. 죄악으로 내 영혼과 육신을 더럽혀선 안 된다. 거룩하고 순전하게 보관하고 유지해야 한다.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적은 일에도 충성해야 하는 것이 찬양이다.
현실적인 일에 형통하여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불신자도 그렇게 한다. 정말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들도 모르게 하늘이 무엇인가를 도와 준 것 같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신자는 지금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과 미래에 생길 일까지 그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과 사탄이 아무리 방해하고 시험하려 덤벼도 내 힘으로는 다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절대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삶을 살아 간다. 비록 일시적으로 실패할 일도 생기겠지만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으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의 구석구석에 넘쳐 나오도록 내 인생 전체를 그 분의 품 안에 맡겨 드려야 한다. 그렇게 살 때만이 적은 일에 충성할 수 있고 또 바로 그것이 찬양의 본질이다.
적은 일에 충성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자에게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요구한 뜻이 신자가 얼마나 성실하고 근면한가를 보자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책임과 재량에 두었다. 게으른 자는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고 자기가 손해 보게 되어 있는 반면에 성실한 자는 어느 분야에서도 성공하게 마련이다. 스스로 남들에게 뒤쳐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을러도 된다. 십자가를 전혀 몰라도 살다 보면 성실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절로 깨닫기 때문에 구태여 기독교 신앙의 덕목에 중요한 것으로 올려 놓을 필요는 없다.
또 책임감이 강하고 세밀한 성격이라 무슨 일에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를 몰라도 얼마든지 적은 일에 충성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성격을 바꾸라는 이야기도 아니지 않는가? 대신에 주님은 신자가 적은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기는지를 보고싶어 하신다.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주님이 주신 일이며 그 곳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여 그것을 누리라는 뜻이다.
이 계명을 주신 이유를 역으로 따지면 신자들이 적은 일에 충성을 하지 않으니까 충성하라는 것이다. 성실성을 따지기 이전에 적은 일, 나쁜 일, 궂은 일, 힘든 일, 앞 뒤로 막힌 일들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니까 충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일에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아가 발견하려고 노력도 않는 생각과 태도가 틀렸다는 뜻이다. 주님은 그 생각과 태도를 고치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 되어 있다면 큰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 하시는 일은 다 큰 일이다. 그 분이 성도에게 베푸시고 허용하는 일에 적은 일이란 없다. 인간의 눈에 적게 보일 뿐이다. 이 생각을 고치지 않는 한 적은 일에 절대 충성할 수 없다.
나아가 이 계명에는 신자가 미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 단순히 충성도나 인내심이 얼마나 강한지 보자고 한 것이 아니다. 신자가 자신들의 눈에 적어 보이는 일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즐기며 충성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신자들의 눈에 크게 보이는 일도 허용해 주겠다는 뜻이다. 우리 생각에 커 보이는 일들을 주님은 이미 예비해 놓고 계신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부어 주셔서 더 큰 일을 맡게 하시고 더 큰 그릇으로 바꿔 주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했다. 세상에서 희생당하고 손해 보며 살거나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선교하다 순교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몸이란 육신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다. 순종의 뜻이 무엇인가? 현재 일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에 감사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영적 예배라고 해서 꼭 찬송하며 눈물 흘리고 방언을 안 해도 된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이 바로 신자가 드릴 산 제사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삶의 모든 부분에 넘쳐 흘러 당신의 자녀들이 평강한 안식 가운데 즐겁고 신나게 사는 것을 원하신다.
신자가 적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 그 보다 더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없다. 오늘 감사하지 못하면 내일 감사하지 못한다. 오늘 불평하고 나태하면 내일은 더 큰 불평과 나태가 우리를 삼킨다. 항상 문제가 쌓이고 더 큰 문제가 파도처럼 밀려 온다. 대부분의 신자가 문제가 생겨야 겨우 기도한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해결 받지만 또 다른 문제는 닥치기 마련이다. 어려울 때에만 기도하고 끝나면 쉬는 식의 줄 당기기를 주님과 평생 한다. 제대로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 보지도 못하고 이 짧고 한 번 뿐인 인생을 마친다. 환난 가운데는 주님의 소망과 사랑과 은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찬양예배 만은 지금 껏과는 다르게 드리자. 승리의 찬양을 하자. 힘껏 박수 치며 신나게 목청을 높여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신하며, 특별히 힘든 일에 감사하면서 찬양하자. 오늘 감사가 크면 내일은 더 큰 감사를 주신다. 오늘 찬송을 하며 살면 내일도 찬양할 수 있고 내일 찬양하면 모레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뿍 담뿍 담겨져 있는 우리의 현실, 상황들..
찬양치 않을 수 없는 것은 나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도 마다치 않으셨으니...
어찌 찬양않겠는지요.
이곳의 글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가슴이 부푸러져서
예리한 바늘끝으로 찌르면 뻐~엉 터져버릴 것 같아요.
제 가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