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4-19)
드럼 통의 비밀
화공 약품 회사에선 강력 펌프를 사용해 큰 드럼 통 속의 오염 물질을 빨아내는 작업을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펌프의 힘을 조절해 통 속의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너무 공기를 많이 빼내면 통 바깥의 압력이 통 안쪽 보다 높아져 통이 찌그러지고 그 반대로 하면 통이 터진다. 안과 밖의 압력을 똑 같게 맞추어야 드럼 통에 손상이 안 가고 속에 있는 오염 물질만 빼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속 사람의 능력이 최소한 외부의 죄악과 사단이 유혹하고 방해하는 힘과 최소한 같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리 의지력이 강한 자라도 혼자의 힘으로 그럴 수 있는 자는 없다. 사단은 인간보다 훨씬 세다. 인간 내부의 압력은 외부보다 항상 낮기 때문에 그 싸움은 찌그러지는 모습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구원이 이뤄지기 전, 죄악에 찌든 인간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는 성령으로 인치시고 또 신자 속에 내주(內住)케 하셨다. 외부 압력에 대항할 신자 내부의 저항력을 성령님이 키우고 뒷받침 해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구원을 얻고 난 이후의 신자가 매일 구해야 할 것은 이전 불신자 시절과는 달라진다. 자기의 의지력을 신장(伸長)하여 스스로 세상을 이기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다. 오직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간구해야 한다. 혼자서는 세상과 사단의 시험과 궤휼을 감당하기 힘들기에 항상 그리스도를 그 마음 속에 계시게 해야 한다. 속의 저항력이 작아지면 신자도 별 수 없이 찌그러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내부의 저항력이 너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두말 할 것 없이 신자도 폭발하고 만다. 아니 성령이 속에서 충만하면 신자로선 너무나 좋은 일인데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신자가 간구하는 성령 충만은 너무 세어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되며 밖의 압력에 적당하게(?) 맞추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폭발적인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에 관해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뭔가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일도 그렇게 진척될 것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불의 혀 같이 성령이 강림하니까 그곳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방언의 은사를 받고, 삼천 명이 그날로 회개하고, 그 이후 사도들이 기도하면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것 같은 이적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능력은 분명 폭발적이다. 이 폭발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으로선 도저히 막을 수 없으며, 나아가 세상과 사단의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꼭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이루어진 일 자체가 화끈하고 감동적이어야만 하는 법은 없다.
물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경우도 있다. 특별히 예수님이 전혀 소개 되지 않은 오지에서 처음 복음을 증거할 때는 그러하다. 초대 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복음을 접하는 곳에선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지 눈으로 보여 주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성령이 신자를 통해 역사하는 과정과 결과는 폭발적인 것과는 오히려 정 반대다. 하나님은 어떤 장애가 있어도 당신이 목표하신 결과는 반드시 이뤄내지만,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의 공동체와 각 개인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 말이다.
이들 열매 가운데 초자연적인 능력이 가시적,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성령님은 당신만의 은혜와 권능으로 신자의 내면과 그들이 모여 서로 섬기고 나누는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 신자가 주님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 주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비취게 한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역사만 한다.
그것도 신자가 성급히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오직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만 한다. 그래서 항상 그 역사는 서서히 진행된다. 하루에 한 걸음씩 만 인도하여 조금씩 변화시킨다. ‘오래 참음’과 ‘충성’과 ‘절제’라는 열매의 성격이 바로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 나머지 모든 열매도 순간적으로 급하게 이뤄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성령 충만의 강도를 낮추어라
그럼에도 신자들은 자기 속의 압력을 높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끌어 올려져야 하고 환난이나 시험이 닥칠 때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저 부흥회, 기도원, 영적 각성, 찬양과 경배 집회를 찾아 방황한다. 더 강력한 파워를 더 값싸고 빨리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찾아 쏘다니기 일쑤다.
그런 집회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권능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때에는 압력이 너무 낮아 있던 신자의 내부가 갑자기 압력이 높아져선 얻을 수 있는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다. 은혜 받는 것도 집회에 참여 할 그 당시 뿐이다. 집회가 끝나면 풍선에 바람이 빠져나가듯이 순식간에 성령의 능력은 줄어들고 집회에 참가하기 전보다 상태는 더 나빠진다. 드럼 통이 터진 셈이다.
신자는 외부의 압력에 견딜만한 성령의 충만만 구해도 된다. 이 말이 절대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무시하여 약하게 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외부의 어떠한 죄악과 악한 세력에도 충분히 견딜만한 성령 충만을 이룬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정말 솔직히 되돌아 보면 오히려 참으로 두려운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외부의 시험과 유혹에 지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승리한다는 뜻이다. 사단과 성령의 싸움에 휴전을 하거나 무승부인 채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폭발적이다. 인간의 눈에는 잘 안 보이고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오히려 의심과 불만만 불러 일으킬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계시며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내기에 폭발적이다. 효과가 단번에 확 나타나면 신자가 손을 놓고 기적만 바라든지 아니면 뭔가 자신이 잘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성령은 어지간해선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드럼 통에서 오염 물질을 빼낼 때는 서서히 항상 압력을 균등하게 조절하며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압력의 차이가 나면 어딘가에 잘못이 생긴다.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부의 저항력을 외부에 맞추어 견딜만한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매일 매 순간 계속해서 구하는 수 밖에 없다.
나아가 신자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이미 성령의 전이 되어 있다. 외부의 압력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이 바로 신자의 속 사람 안에 좌정하고 계신다. 성령의 능력을 순간적으로 대박 터지듯이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매일 똑 같이 조금씩 기도하고 말씀 보며 하나님을 묵상하고 찬양하기만 하면 된다.
신자가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이 그 환난에서 안 망할 정도로 구원은 해주신다. 그것도 벼랑 끝에 다다라 신자가 완전히 항복을 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말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벼락치기로 신자에게 성령이 갑자기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신자가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길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나가 얼마가 되었든 그것으로 자기 속을 채우는 길 외에는 절대 없다.
바울 사도가 육체는 일을 하고 성령은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했다. 일이란 인간의 순간적 일시적 노력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계절들이 있다.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고 해충을 막고 추수하여 거두어 들이는 일 중에 하나라도 생략하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대신에 그런 계절들을 거치고 나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그래서 “이 같은 것은 금지할 법이 없다”(갈5:23)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신자가 자신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점검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방언, 신유, 축귀 등의 은사가 얼마나 나타났는가를 보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 봉사를 얼마나 성실히 했고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따지는 것도 아니다. 매일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아침에 잠시 기도하고 말씀 보지 않았더니 오늘 하루는 뭔가 생기가 빠지고 기쁨과 평안이 없었다는 고백이 있는가를 보면 안다. 아니면 말씀과 기도로 아침을 시작하면서 오늘 하루는 정말 넉넉히 승리하는 축복의 날이 될 것 같은 확신이 생겼는가? 현실의 형통과는 상관 없이 영혼에 안식이 있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세기와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큰 능력을 구하지 말고 오늘도 내 앞에 닥치는 죄악과 흑암의 세력을 담담하게 맞설 수 있는 분량 만큼만 구해라. 신자가 매일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 당신이 책임을 져 주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당신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니 그 준비만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 것은 매일 쉬지 말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주님의 은혜와 권능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조금씩 자기 속에 쌓아가는 만큼만 성령은 충만해진다. 성령 충만에 천재나 거인은 절대 없다. 성령님 그분이 천재나 거인이지 인간이 그렇지 않지 않는가?
12/8/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