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5-18)
흑인이 스포츠에 강한 이유
미국 프로 스포츠계에선 흑인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특별히 농구, 미식축구, 야구, 육상 단거리 등 유연한 몸놀림과 순간적인 스피드를 요구하는 종목에는 더 그러하다. 단순히 순발력만 갖춘 것이 아니라 강인한 체력도 함께 자랑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특이한 시각으로 분석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18세기 한창 노예무역이 성행할 때에 노예들의 50%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신대륙까지의 머나먼 항해길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노예선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항해 중에 죽는 자까지 감안하여 가능한 많은 노예를 데려 오려고 진짜로 닭장에 갇힌 닭보다 못한 신세였다. 그것도 항해 내내 쇠사슬에 묶인 채 말이다.
흑인이라고 해서 다 운동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흑인들을 보면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는 자들도 꽤 많다. 반면에 그런 비참한 조건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신대륙에 발을 디딘 자들은, 즉 미국 흑인의 선조들은 분명 강인한 자들이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애굽 사람들이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두려워할 정도로 백성의 숫자가 많아졌다. 애굽이 더 심한 고역을 부과했지만 성경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졌고, 결국에는 남아가 태어나면 나일 하수에 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비록 환난을 겪더라도 완전한 멸망까지 가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먼 장래에는 더 좋은 결과로 드러나게 하신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오게 했거나 애굽 종살이를 시켜선 또 그 결과 수도 없이 죽었다면 하나님이 베푸신 선(善)은 하나도 없지 않는가? 그런 환난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인간의 체력과 의지 때문이지 그분 은혜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함부로 반발할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당신의 백성을 개별적으로 다루신다. 어느 시대 어떤 장소에서도 세상에 오직 그 한사람만 존재하는 양 일대일의 인격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로 이끄신다. 그분이 신자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를 제삼자가 결코 판단할 수 없다. 또 기왕에 발생한 사건이나 현재 처해 있는 여건의 겉모습만으로 그분의 은총의 넓이와 깊이를 헤아려선 절대 안 된다.
다른 말로 흑인 노예들과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에게 외견상으로는 헛된 죽음이 많았던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따지면 하나님 은혜와 권능을 누린 자도 얼마든지 있었다는 뜻이다. 남아를 살리려 바로에게 거짓말 한 히브리 산파나,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바로의 공주에 의해 양육 받아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모세가 그 좋은 예이지 않는가?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병이나 학대로 죽은 노예 중에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룬 자는 많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소외된 자들이 토해내는 한숨을 들으시고 학대 받는 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다 보고 계신다. 당신을 잘 모르는 이방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사라에게 학대를 받아 광야로 도망친 애굽 여인 하갈을 하늘에서 감찰(鑑察)하셨지 않는가?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16:11)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품는 소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천국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자람이 완벽한 단계로 끝나는 법은 한 명도 없이 전부 다 미완성으로 끝나긴 해도 말이다. 신자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맺어내는 결과는 신자마다 다 다르다.
나아가 믿음이 신자에게 하는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평생을 두고 제대로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그런 올바르게 반응하는 법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서 후손들에게도 동일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는 그 영원한 열매를 보아야만 다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적 시각으로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 하나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억울하게 고통만 겪다가 죽은 것 같은 사람에게도 그분의 사랑은 넘치도록 베풀어진 것이다. 아무리 제삼자나, 심지어 본인조차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감하지 못했을 지라도 당신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영원토록 인간이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농장주는 크리스천이었다.
지금 흑인이 운동을 잘 할 수 있는 체질을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었다는, 즉 고난 가운데 은혜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는 물론 북부의 노예를 부려먹은 농장주와 사업주들은 거의 다가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선조는 누구였는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청교도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유럽에 남아 있었더라면 노예보다 더한 취급을 받았을 수 있고 그중에 상당수는 순교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의 후손이, 그것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 더 심하게 노예를 학대했다.
공교롭게도 동일하게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왔지만 아프리카 들판의 자유인들의 후손은 노예가 되었고, 유럽 대륙 중하층 계급의 피압박민들 후손은 떵떵거리는 귀족층이 된 셈이다. 인생만사는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맞아떨어졌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을 기준으로 삼아 상벌을 나눠준 것인가? 둘 다 아니다.
인간 영혼의 타락상은 지역, 인종, 언어, 문화, 민족, 국가와 상관없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는 것이다. 신자라고 크게 예외도 아니다. 미국의 농장주들이 과연 노예 제도의 죄악상을 몰랐을까? 신실한 신자 링컨 대통령 혼자만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선각자적 선한 소명을 품었을까? 아무리 당시의 사회 관습이 노예제도를 인정했다 쳐도 신자라면, 아니 불신자라도,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가축과 동일하게, 때로는 더 포악하게, 부려 먹는 노예 제도가 분명히 죄악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은 분명 아닐 것 아닌가?
그럼에도 노예 제도가 성행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돈 벌이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값싸고 힘세며 편리한 노동력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목적이었다. 노동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며 근로 조건과도 아무 상관없는 참으로 편리한 생산요소인지라 투자에 비한 수익성, 효율성, 생산성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흑인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동일한 인간이라는 종교적 개념은 그 매력 앞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신자마저 노예 제도가 가져다주는 부와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명예와 권력의 단 맛에 흠뻑 취해버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간혹 스쳐 지나가는 죄책감 정도는 얼마든지 외면하거나 부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제도에 하나님과 나아가 자기들 생명까지 걸었다. 결국 그 제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지 않는가? 그것도 종교적 핍박을 피하거나 못 살아서 미국으로 도피해 온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본문은 지금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이다. 아담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3:6)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죄악이 인류를 노예로 묶게 된 원인을 밝히는 말씀이다. 욕심에서 출발한 죄는 그 필연적 열매로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만 한다. 또 마찬가지로 그 죄를 온전히 용서받으려 해도 사망의 삯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 진리는 최초 인간을 타락케 한 원죄뿐만 아니라 모든 일반적 죄에도, 심지어 문자적으로, 영원히 적용된다. 돈 벌이에 좋다는 욕심 때문에 노예 제도라는 죄를 낳았다. 또 그 매력에 푹 빠져 죄가 장성하다 보니까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수많은 사망자를 낳았지 않는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했으니 바로 신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조차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게 된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스스로 지혜롭게 될 만한 것들이 자꾸만 유혹하더라도 절대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정말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지, 또 그로 인해 거룩한 열매가 맺힐지 기도하면서 말씀에 비춰 따져 보라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860년대는 노예 제도가 가장 왕성할 때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라가 세워졌다고 자부했으며 또 그분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서약까지 했다. 평일에는 열심히 노예를 착취하다가 주일에는 경건하게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남북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남부나 북부나 하나님이 서로 자기편이라고 우기면서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하나님은 열심과 진정(?)을 다해 예배드리는 백인이나,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취급 속에서 소망을 잃은 흑인의 편도 아니다. 남부와 북부로 나눠져 서로 승리를 장담하는 정치가나 사업가들의 편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그분은 영원하고도 거룩한 당신의 진리 편에만 서 계신다. 그분에게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있을 수 없다. 오직 찬란히 밝게 빛나는 빛뿐이시다. 그림자란 빛을 가로막는 물체가 있어야만 생기지 않는가?
그분은 더럽고 추한 죄악과 흑암이 당신의 곁에 접근하는 것을 일절 허락지 않으신다.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진선미(眞善美) 그 자체이다. 그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도 그 분 앞에 서면 아무 형체도 남지 않고 바로 사라질 뿐이다.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선함과 절대적 아름다움을 조금치라도 훼방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림자란 빛을 받는 대상에게만 생길 뿐이다. 그분은 빛의 근원이자 빛 그 자체이므로 그림자는 아예 생길 수가 없다. 당연히 그분은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自存)하시는 분이다.
반면에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빛을 받을 뿐이다. 따라서 그 빛을 올바로 받아 바르게 반사하는 자는 그분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비스듬히 비켜 서있거나 혹은 등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분의 영광은 줄거나 없어진다. 별로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신자이면서도 노예 제도의 단 맛에 빠져있던 농장주처럼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모든 인간의 심령은 비록 부패해 있지만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구라도 기본적인 선악간의 구별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자마저 그 소리를 외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망에도 이를 수 있는 징계를 면할 길이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끊어지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지 않는가?
시작이 잘못된 영성 훈련
오늘 날 신자들의 영성을 훈련시키려는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있다. 예수를 믿어도 신자답게 변화되지 않는 자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말 그대로 신자답게 만들려고 한다. 기도 잘하고 말씀을 잘 풀며 교회에 충성하는 자들로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 성과가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성 훈련이 신자 내면을 충실케 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 그것도 신자의 노력으로 연습을 거듭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예컨대 온갖 종류의 기도를, 평소 잘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기도도 포함되어, 정기적으로 반복해서 하도록 훈련시킨다. 전통적 기도 외에 묵상, 침묵, 관상, 고행 등 부수적인 방안도 함께 소개하고 연습시킨다.
신자 본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려는 시도이긴 하지만 자칫 하나님이 아닌 다른 초자연적 영이 들어갈까 두려울 정도다. 바꿔 말해 영성 훈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를 포근하게 감싸주기를 기대하지만 정작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신자 스스로 수양하여 자신의 종교적 실력 혹은 외양만 높이는 것으로 그칠까 염려스럽다는 것이다.
영성의 형성과 성숙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그분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는 진리를 떠나선 절대로 올바른 영성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분이 무한하고도 조건 없는 자비를 신자에게 베푸시지만 동시에 그분의 빛 앞에 어떤 어둠도 절대 공존시키지 않는다는 진리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요컨대 완전한 공의와 무한한 사랑으로 가득 찬 거룩하신 그분 앞에 인간이 철두철미하게 항복하며 엎드려야 비로소 진정한 영성의 형성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에 대한 철두철미한 항복을 본문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만 내려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분이 아닌 곳에서 빛나고 선해 보이는 것이 있을지라도 절대 속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신 그분과 대비해 인간인 자신의 무가치성을 철두철미하게 깨닫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분이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섭리에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분만의 완전함이 있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오직 그분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런 온전한 항복 없이 단지 종교적 훈련으로 반복해 생기는 어떤 형태의 내면의 감동과 충만이라도 단지 감정의 일시적 충동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형제들아 속지 말라.”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농장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그것도 이전에 살았던 곳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개화된 문명사회에서 말이다. 짐승보다 더 못한 취급을 당했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애완동물은 인간 이상의 사랑을 받았고, 가축도 자산인지라 함부로 죽이지 않고 기본적 생존은 보장 받았다. 반면에 노예들은 인간임에도 주인의 화풀이나 조롱과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되었고 심심찮게 파리 목숨처럼 죽임을 당했지 않는가?
미국으로 실려 오는 도중에 반이나 죽었지만 강인한 노예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로만 그 혹독한 과정을 이겨냈을까? 종교적 의식을 취했던 안 취했던, 혹은 본인이 의식했던 안 했던 틀림없이 모두가 절대자의 도움을 간절히 소원했을 것이다. 절대적 절망 가운데 빠진 인간이 의지할 데라고는 절대자뿐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그들이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육체적 강건함뿐 아니라 영적으로 아주 겸비한 자세도 함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독교 영성 훈련의 첫 단계를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농장에서 온갖 박해를 견디어 나갈 때 그 영성도 점차 자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도나 말씀에 능한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탁하는 겸비한 자세가 더더욱 강해졌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분 앞에 엎드려 항복하는 모습이 갈수록 더 낮아지는 방식으로 성숙되어 갔다. 추하고 더러운 인간 세상에선 도무지 기대할 것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죽음으로만 내몰기에 그들 심령의 맨 밑바닥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보는 소망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성경지식이 부족하고 구색 갖춘 예배나 기도를 제대로 드리지 못해도 역사상 가장 영성이 풍부하고 성숙된 자들이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갈증에 못 이겨 그분의 긍휼만을 소원하는 것이 참된 영성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에 지어진 흑인 영가들이 지금도 듣는 이의 심령을 파고들어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것이 그 증거이지 않는가?
올바른 기독교 영성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만이 절대적 진선미이기에 어떤 더러운 것도 그분과 공존이 안 된다는, 그래서 온전히 거룩해진 바탕 위에서만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힘도 발휘될 수 있다는 철저한 확신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저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선행되었기에, 죄인인 인간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그분의 부활이 따라 올 수 있었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저주한 후에 그분의 은혜를 기대해야만 올바른 영성이 형성될 수 있다.
남북전쟁과 관련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가 독립전쟁, 1,2차 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쟁의 미군 사망자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당시 흑인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참전하지 않았다. 결국 죽은 자 모두가 백인들이었다는 뜻이다. 직간접으로 노예 제도에 참여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렀던 극명한 표본이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상태는 어떠한가? 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에 대해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는 정치가, 아니 신자나 목회자가 너무나 드물다. 그들도 포악한 공산정권하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남한의 같은 민족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지 않는 한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전쟁을 제외하고는, 강구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식인들과 정치가를 필두로 거의 남한 전체가 철저하게 그 참혹한 실상을 무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이유는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 농장주와 같이 오직 하나다. 자신들의 돈 벌이 때문이다. 북한 동포가 남한의 풍요로움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통일이 되어도 오히려 손해만 끼칠 것이라는 철저한 금전적 손익계산이 바탕에 깔려 있다. (참고로 얼마 전에 시행된 미국의 여론 조사에서 정부의 정책은 최우선적으로 국익을 정진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져야 한다고 나타났는데, 전통적 보수복음주의 기독교자들의 결과마저 그러했다.)
남북전쟁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동일하게 한국에도 적용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북한 동포들의 노예 같은 참상을 외면한 당국자들, 나아가 그들을 성경 말씀으로 계도할 책임이 있는 신자와 목회자들부터 어떤 형태로든 심판 내지 징계를 받지 않겠는가?
어제 오늘 시시각각 확대되고 있는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미국 정부의 정책 잘못과 관리 소홀이 근본 원인이 결코 아니다. 모든 돈 가진 자들이 오직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법적 규제와 인간적 양심을 넘어서는 온갖 무리수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공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기에 인간들이 제 멋대로 행한 당연한 결과이자 그 자체로 그분의 엄정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서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조건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엄정하고도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정말로 겸비해져서 우리의 참 모습을 제대로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빛 안에 온전히 들어와 그분의 빛을 받아 영성을 거룩하게 바꾸고 또 그 바뀐 영성으로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라는 것이다.
영성 훈련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뭔가 경건하고 거룩하고 신령하고 그래서 따뜻하고 포근하며 평안한 심령의 상태만 유지하려 들어선 안 된다. 그것도 반복된 훈련의 힘에 의지해서 말이다. 그 전에 근본적인 죄부터 없애며 그분과의 관계에 굽어진 부분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일은 하지 않고 일단 따스하고 부드러운 관계만 유지하려드는 것은 종교적 사치놀음에 불과하다.
요컨대 작금의 우리 세대가 얼마나 죄악에 관영해 있는지 제대로 깨닫고 그에 은연중에 물들어 가는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그분 앞에 새롭게 겸비해질 수밖에 없다. 또 그럴수록 그분의 긍휼만을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 영성이 바로 서고 자랄 수 있는 길은 절대 없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바로 거짓 선생이요,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사이비 영성일 뿐이다.
9/17/2008
북한! 김정일위원장의 건강 악화설에 그땅 영혼에 대한 긍휼함보다 통일에 대한 불안감(?)을 잠깐 가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리대로 깍아 만들고 부어 만들지 않겠다 했지만 내 상황에 따라 깍아 만들고 부어만들고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지금의 모든 정치와 경제의 상황들은 가진자들 기득권자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며 나라위해 깊이 기도하지 않은 것 회개합니다...
나의 크기와 생각에 하나님을 한정짓지 않고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뜻안에 겸손하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