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지키면 복 받는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8-20)
너무나 바보 같은 육상선수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라는 영화로도 소개된 일화다. 영국의 에릴 리틀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100미터 달리기 금메달에 가장 근접한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당시까지 유럽 선수가 우승한 적이 없는데다 세계 기록 보유자였기에 영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인기 종목인지라 일요일에 결승전이 열리게 되었다. 신실한 신자였던 그는 단호하게 출전을 거부했고 금메달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
당연히 큰 충격을 받은 영국 국민들로부터 온갖 질타가 쏟아졌다. 조국을 배신한 자로 옹졸하고 편협한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4년에 한번 밖에 없는 기회를 헌신짝처럼 버린 어리석은 자라고도 했다. 손에 거의 다 거머쥐었던 개인적 부와 명예조차 단 하루 주일을 지키려는 보잘 것 없는 종교적 신념과 맞바꾼 바보 천치로 전락했다.
그런데 4백 미터 계주에 출전할 영국 선수 한 명이 갑자기 부상을 당했다. 코치가 비록 주 종목이 아니지만 평소에도 성실하게 연습하는 리틀 선수를 대타로 출전시켰다. 물론 경기는 평일에 열렸고 영국 팀은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 갑자기 그는 가장 훌륭한 영국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에서 단숨에 국민적 영웅으로 회복된 것이다.
신앙적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아무리 주일날이라도 4년에 단 하루 있는 기회였기에 출전해서 고국에 금메달을 바쳤어야 했는가? 돈과 명예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하루 정도 주일을 안 지켜도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기가 속한 사회 민족 국가는 뒷전이고 종교적 형식에 매인 너무나 옹졸한 신자인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라는 것을 만천하가 알기에 출전을 거부한 것이 옳은가?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는 올바른 신앙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세상에서 뭐라 하던 오직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그만인가? 또 그가 주일 성수를 지켰기에 하나님이 다른 종목을 통해서 다시 국민적 영웅으로 회복시켜 주셨는가?
에릭의 경우는 이 모든 논란과는 사실 아무 연관이 없었다. 단지 그로선 주일을 빠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서 예배를 보아왔던 삶의 단순한 연장이었다. 말하자면 만약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예 올림픽 출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주일 경기를 거부함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신자다운 신실성과 의로움을 과시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만 심해질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 않는가?
물론 그도 평생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두고 마음에 약간의 갈등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출전을 거부했던 것은 그런 갈등이 오래 가지 않았거나 최소한 그 모든 논란을 잠재울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듬해인 1925년에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중국선교사의 길로 떠났다. 자기 인생의 목표는 사실 딴 데 있었던 것이다. 달리기는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평소의 소질대로 육상부에 들어서 행한 취미활동 내지는 인생의 이차적인 목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돈, 인기, 명예는 물론 조국에 금메달을 바치는 것조차 그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자기 인생 전부를 온전히 바쳤던 것이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을 자꾸 특정한 행위로만 간주 내지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에릭이 주일성수를 위반하지 않은 것과 중국선교사로 과감히 떠난 것 같은 일이야말로 믿음으로 도달해야 할 전부 내지 핵심인양 생각한다. 그의 견고한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센 믿음으로 어떤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면 당연히 일이나 사건 중심이 된다. 외형적 결과가 우선이기에 그 행동의 주체도 인간이다. 신자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의롭고 경건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일을 제대로 지켰는가, 전도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성경은 몇 회나 통독했는가, 등등 신앙마저 외형만 따져, 그것도 수치로 측정해 그 수준을 평가하게 된다.
결과를 중시하는 것은 또 일정한 in-put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out-put이 따라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믿음에도 효율성이 중요 과제다. 기도를 이렇게 간절하고도 끈질기게 했으면 지금쯤 응답되어야 한다든지, 그만큼 성실하게 교회 봉사하고 과분하게 헌금했으면 축복은 몰라도 나쁜 일은 막아주셔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에릭 선수의 경우에도 우리는 주일을 지킨 파리 올림픽 결승전 그 날과 중국으로 선교하러 떠난 그날 하루만 기억하고 또 열광한다. 믿은 후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수많은 주일과 중국 선교사로 가기 전과 후에 겪었을 온갖 어려움과 누렸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선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믿음으로 위대한 행위를 했던 그 두 번만이 인생의 전부는 결코 아니지 않는가? 일 년 365일을 그가 산 햇수만큼 곱한 것 전부를 주님께 바쳤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는가? 본인 입장에서도 평생 동안 믿음으로 이룰 목표를 그 두 가지 일로만 정했을 리도 없지 않는가?
성령의 권능을 입은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유대인들이 믿고 구원을 얻었다. 점차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민간에 메시아로 널리 퍼지게 되자 제사장들과 유대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다 좋은데 절대 예수 이름으로는 증거 하지 말라고 닦달했다. 물론 사도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사도들은 위협을 받고 풀렸지만 예수 이름으로 전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다. 밤중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주자 다시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전했다. 또 다시 공회에 잡혀와 문초를 당했지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동일한 답변을 하면서 눈도 꿈적하지 않았다. 결국 채찍으로 맞은 후에 한 번 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엄한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런 기사를 보는 신자들의 반응도 대동소이하다. 유대 공회원들의 위협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모습에만 신경을 쓴다. 한 가지 사건에서, 한 가지 영웅적 행위가 믿음의 전부인양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을 형편없이 평가절하 한다. 나는 교회를 십년이나 다녔어도 왜 이렇게 비겁하고 치사한지,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한 일이 없다고 계속 자책한다.
그 후 사도들의 행적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1,42)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두 번이나 담대하게 핍박에 맞선 것이 아니다. 날마다 어디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아니한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들로선 평생에 해야 할 일인지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지라, 또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인생의 의미가 전혀 없는지라, 행한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아무리 유대 공회가 핍박을 가해와도, 감옥에 수도 없이 들락거려도, 풀려 나오기만 하면 예수를 증거 했던 것이다. 감옥 안에 잡혀 있어도 죄수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쉽게 말해 이미 자기들에게는 예수를 증거 하는 일은 밥 먹고 쉬고 누워 자는 일과 방불했다. 먹고 마시고 자지 않고는 아예 생존이 안 되지 않는가? 문자 그대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살았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전도에 열심을 내고, 핍박에 굴하지 않는 일 등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존재와 삶과 일생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는 믿음이 행동으로 자연적 결과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그런 행동이 믿음도, 믿음으로 이룰 목표도 아니었다. 자기들이 십자가를 통해 보고 들은 절대적 진리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모든 것을 걸만하다고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확신했기에 있는 그대로 전했던 것뿐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우리로선 그들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전한 사실에 열광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자기들에게 열광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로선 전하지 않는 것이 뭔가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런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핍박에 대항함에 현실적 어려움이나 두려움 등이 없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는,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게 여길 수 있는 더 뜨거운 열정과 소망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했기에, 또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권능을 절감했기에, 더 좋은 일을 성실히 한 것뿐이다. 요컨대 가장 좋고 신나고 기쁜 일부터 먼저 하지 않을 바보는 없다는 뜻이다.
에릭 리틀의 경우도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결승전에 불참해야지라고 따로 단단하게 결심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국 선교사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두고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중국 선교는 그 목표를 실천하는 수단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런 결단을 하는데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나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는 일이 최고로 좋았기에, 그래서 다른 모든 일은 무시할 수 있었기에 따른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십년 넘게 교회를 다녔는데도 왜 내 신앙이 아직 이 모양인가라는 자책이 들면 아직도 믿음의 본질을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믿음으로 뭔가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해드려야 하는데, 최소한 믿음으로 나에게 어떤 좋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믿음을 갖는 목적이 믿음으로 이뤄낼 결과에만 몰려 있다. 믿음이 좋아서 믿음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십년 동안에 주일을 성실히 지킨 믿음은 온 데 간 데 없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종교적 임무가 되어서 신자라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로만 머문다. 아니다. 신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서 지키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겠는가? 전자는 살을 찌기 위해 밥을 먹는 것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살려면 밥을 먹지 않고는 안 되니까 먹는 것과 같다. 전자는 믿음이 어떤 목표를 이뤄내는 수단이다. 후자는 믿음이 바로 삶 그 자체다.
더 쉽게 비유하면 유대 공회원들이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것은 사도들에겐 이젠 살지 말고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사도들로선 절대 죽을 수는 없었고 예수 이름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그 자체였다. 그들 속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해 있으니까 예수를 모르는 영혼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워 그냥 전했던 것이다.
십 년간 교회를 성실히 다닌 것도 세상에선 전혀 기대할 것이 하나 없기 때문이어야 한다. 동시에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좋기 때문이어야 한다. 어떤 믿음으로 결과를 이뤄내고 못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그분의 십자가에 비춰보니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연약하고 무지하고 무능할 뿐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죄와 세상과 사단에 넘어가 추하고 더러워졌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한다. 그래서 저절로 예수 앞에, 그 길 외에는 전혀 소망이 없기에, 엎드려져야 한다.
십년이나 교회를 다녔으면 선교사는 몰라도 장로는 되어 있어야지, 대표기도 정도는 술술 해야지, 새벽기도에는 빠지지 말아야지 정도로 자기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가난하고 초라한 기준이다. 하나님을, 특별히 십자가의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흔히 주일을 성실히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에릭 선수도 다른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 국민적 영웅으로 회복된 것이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일 수 있다. 본인이 의도는커녕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 배경에는 분명 하나님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킨 것이 조건이 되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복을 받고 있기에 당연히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주일은 신자로서 일상적인 복의 연장이다. 에릭의 경우 하나님이 만천하에 그와 기독교의 이름을 바로 세워줄 필요가 있어서 다른 종목에서 상을 받게 했더라도 그 마저 이전부터 신실하게 주님과 동행했던 결과다.
우상 제물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자유로웠던 바울이 만약 지금 살았다면 주일 성수 여부를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일 년 365일이 사실상 주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중국 선교사로 가는 문제도 믿음의 평가기준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가는 곳마다 선교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선교 대상이요, 하는 일마다 선교 사역이기 때문이다.
주일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면 자칫 복 받는 것이 일차적인, 최소한 부수적인 목적이 된다. 그럼 평소 기복주의를 거부하는 신자마저 은연중에 복 받을 것을 기대한다. 주일 자체, 아니 주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신자의 목적이자 평생의 일이다. 아니 삶이자 인생 자체다. 믿음은 예수님과 평생에 걸쳐 인격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문제이지 일회성 행동으로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아야지, 하나님께 순종해야지에 믿음의 초점을 두면 마찬가지 과오를 범하게 된다. 순종이라는 일회성 행동이 최우선 목표가 된다. 일회성 행동은 그 행동을 위해서 준비하고 훈련하고 단단한 의지로 행해야 한다. 물론 그래야 함은 맞다. 자꾸만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흔들리니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 있어야만 순종할 수 있다. 여전히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으로선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는 없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주 싫다고, 최소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고 철두철미 절감해야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종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의무감으로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것이 너무나 좋고 기뻐야 한다.
신자가 한두 번 순종했다고 하나님이 주인으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하나님 중에 오직 하나님만 온전한 주인으로 정해 놓아야 한다. 주인이 절대로 둘이 되거나 모호할 수 없으며 이전 주인에게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다. 주인으로 하나님을 모셨지만 때때로 순종하지 못할 경우가 있는 것과, 순종을 많이 해서 그분을 주인으로 삼아야지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순종의 횟수나 열성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주인이 정말로 누구냐의 문제다.
결국 다른 주인의 나쁜 점이 철저히 인식되고 동시에 새 주인의 좋은 점도 절감해야 한다. 한두 번 순종하고 핍박을 이겨낸 행위에 만족하면 자기가 해낸 일이므로 자기 자랑이 된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내세워도 자칫 종교로 흐르면서 자기 의가 더 앞장선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효율적인 업적을 비교하며 피터지게 싸우지 않는가? 세상과 죄악과 사단을 향해 그렇게 싸웠다면 벌써 지역사회 복음화를 완수했을 텐데도 말이다.
신앙으로 어떤 결과를 이뤄내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당연히 목표를 달성한 자에게는 믿음이 수단이자 능력이자 자랑이 된다. 사람이 삼시 세끼를 먹은 것으로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신자는 믿음 안에 있는 것만을 목표다. 자신의 존재가 바뀌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니 전체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열매는 자연히 나타나게 마련이다.
다른 말로 행동은 하나님의 몫이고 믿음은 신자의 책임이다.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나중 문제다. 믿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면 행함은 당연히 따라 나온다.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과만 연관해서 신자가 유지하고 있는 신분, 소속, 관계, 방향의 문제다. 예수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와서 그분의 손을 잡고 따라가고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뜻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자격, 조건, 공적으로는 절대로 그분의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없지 않는가? 신자는 이미 그분의 너무나 크신 은혜와 권능 안에 들어와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하다. 매순간 보고 듣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어야 한다. 사람의 눈치를 안보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가능하다. 사람 눈치 안보니까 하나님이 보상해주겠거니 기대하면 동행이 아니다. 사실은 사람들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눈치를 본 셈이다.
신자는 여전히 연약한데 반해 죄악과 사단이 너무 강력해 하나님과 동행해도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있다. 그래도 신자에겐 동행해주시는 예수가 있다. 그분이 손을 놓는 법은 없다. 혹여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놓아도 다시 담대하게 보좌로 나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십년간 교회를 성실히 다닌 것만도 대단하다. 임무로서가 아니라 주일이 너무 좋았다면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엄밀히 말하면 그랬는데도 열매가 맺히지 않을 리는 없지만, 된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은 반면에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기대할 것은 하나 없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에릭 선수가 주일에도 출천했든 안 했든 그 일 자체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다른 종목에서 금메달 따게 해주었든 아니든,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중국 선교사로 갔던 안 갔던 크게 문제 삼지 않게 된다. 요컨대 신자가 정작 부러워하고 따라야 할 것은 에릭이 평생을 두고 한 결 같이 온전한 믿음 안에서 살았다는 사실이어야 한다.
5/27/2009
본문 말씀이 주님과 동행함이 그 신앙이 우리의 실체적인 삶에서 어떠한 모습인지를 단순명료하게 너무나 잘 나타내어져 있어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세상것이 헛되고 헛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반대로 그분만이 좋아서 그래서 이제는 그분께 순종함이 기쁘고 즐거워 그분만을 소망함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무언가 결과를 찾아내려 하고 뭔가 이유를 붙이는 왠지 의무감에 타성에 젖은 그러한 행동들은 이제 벗어 던지고, 평소 호흡하며 끼니때 자연스레 밥먹는 것처럼 그분과의 평생 동행함이 그저 당연한 매일의 일상이 되는 우리 모든 자녀들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