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해야할 사랑의 비밀
“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룻2:15,16)
신자는 이웃을 더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세기와 크기만 늘리려 듭니다. 시간과 경비를 손해 보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많이 나눌수록 하나님이 더 많은 복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물론 다 옳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단지 그 베푸는 양으로만 따지면 자칫 형식적 의무적으로 흐르다 못해 도리어 가난한 사랑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요? 아무래도 여유가 많은 사람이 양적인 사랑은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참된 사랑을 하면 자연히 남에게 더 많이 베풀고 싶어지며 그렇지 못할까봐 안타까워집니다. 사랑에 양적 제한이나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도 사실은 부족합니다. 그런 표현 자체도 엄밀히 따지면 어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동기의 순수함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해타산이나 다른 목적이 개입되면 이미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사랑을 많이 뜨겁게 하라고 독려하기보다는 단순히 사랑을, 참된 사랑이라는 의미로, 하라고만 하면 됩니다.
본문을 볼 때도 보아스가 룻이 이삭을 더 많이 주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만 해석하고 치웁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상당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에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참으로 아름다운 측면과 또 아주 영적인 의미가 우리 생각보다는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석탄회사 사장과 할머니
어떤 석탄 회사 근처의 철도로 매일 몇 대의 화물열차가 지나다녔습니다. 그 사장이 종종 철길을 따라 석탄 덩어리를 뿌렸습니다. 한 직원이 왜 그렇게 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대답인즉 이랬습니다.
“건너편에 연금만으로 살아가는 한 할머니가 있네. 나는 그녀가 너무 가난해 땔감과 난방용 석탄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기차가 지나간 뒤 철길을 따라 걸으며 흩어진 석탄을 주어다 사용했는데 그녀는 증기기관차가 디젤기관차로 전부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네. 할머니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 철길 너머로 몰래 석탄을 던져 준다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사용해봐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석탄회사 사장에게 그 양은 이미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더 많이 도와주려고만 했다면 아예 한 트럭을 갖다 주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할머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 배려했습니다. 할머니 알지 못하게 몰래 석탄을 던져 주었습니다. 사장이면서도 한 번에 할머니가 주을만큼 조금씩만 던져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짜로 주는 것인 줄 알았다면 할머니는 쉽게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 호의를 받아드렸다 해도 은혜를 갚지 못한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에 항상 괴로웠을 것입니다. 할머니의 자존심과 체면까지 감안해 전혀 상처 받지 않도록 조처했습니다. 그것도 변함없이 꾸준하게, 나아가 사장이란 직책이라면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순수하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큰 베품이라는 차원까지 넘어선 사랑이지 않습니까?
지금 보아스가 룻에게 보인 사랑이 바로 이 예화의 사랑과 동일합니다. 보아스는 종더러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 이삭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룻이 보는 앞에서 생색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 모르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룻의 아름다운 성품으로는 사전에 그런 줄 알면 줍지도 못했을 것이며 어쩔 수 없어 주었다 해도 마음 놓고 양껏 줍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아스의 호의는 더 많이 줍도록 따로 더 뿌려주었다는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구걸하는 자나 가진 것이 없는 약자일수록 더욱 자존심이 셀 수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유별나게 더 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자존심이 센 사람일수록 가난해진다는 이상한 논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구걸행위나 현재 처지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약자의 열등감이 이상하리만큼 억센 자존심으로 거꾸로 반동(反動) 하기 때문입니다.
석탄회사 사장이나 보아스는 도움을 받는 자의 자존심까지 세밀하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도와주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위를 더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물론 믿음이 좋은 자도 포함해서, 어쩔 수 없는 썩어빠진 본성입니다. 선한 일을 함에도 죄는 얼마든지, 어쩌면 더 많이 더 교묘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서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온갖 꼴불견을 연출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기도나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지 말라고 야단 친 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먼 옛날의 가식적 종교지도자에 해당되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그것도 교회에서 봉사 잘한다는 사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돈이 많이 생기면 은밀하게 사람들을 구제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은밀하게 한 것을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실토했습니다. 구제한다고 구태여 생색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은밀한 속내는 자신이 은밀하게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남들이 알아주길 바란 것입니다. 그럼 구제에다 은밀하게 했다는 것까지 합쳐져 곱절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없다고 솔직히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치사하고 유치한 인간의 본성입니까?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동기가 선하고 구태여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른 손으로 밥 먹고 왼손으로 물건을 잡는 식으로 몸에 익은 습관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구제가 아예 생활방식이자 삶 자체가 되어서 전혀 기억치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선행이라면 당연히 상대도 자신이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도 간에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지 말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특별히 물질적 도움을 줄 때는 받는 자의 마음까지 세심히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현실적 관심은 물질에 가있기에 물질과 연관된 일로 인해 모든 상처와 죄악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원죄 이전에 자존심
오래 전 서울에 홍수가 져서 가장 부촌인 강남 압구정동 쪽에 물이 넘친 적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수재민구호품을 나눠주어야 하는데 모두가 잘 사는 동네여서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자기 집 자가용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당시 가장 소형인 포니 차를 갖고 있는 학생을 골라 모포나 라면 박스 등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일에 자존심이 너무나 상한 한 여학생이 자살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바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먹고 마시는 것만 해결되면 그만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공동체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즉, 일종의 자존심을 지키는 싸움을 벌이긴 하지만 여전히 생존과 번식의 문제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모자란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 괴롭긴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남들에게 얕보이는 것을 더욱 싫어합니다.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값싼 동정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죄의 발단이 바로 자존심이며 또 그 결과로 자존심이 더 견고하게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존심이 원죄의 발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원죄 이전에 자존심이 먼저 생긴 것이지 원죄 때문에 자존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죄가 개입하기 이전에 자존심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존심을 부여했다는 것이며 또 그러기에 자존심은 아주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단적 사설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이 보기에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심히 좋은”(창1:31)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대신하여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했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은 그래서 에덴동산의 동식물에 이름을 붙였습니다.(창2:·9) 동산 안의 모든 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사단에 넘어가 죄악으로 타락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시공간으로 제한되는 물질적 피조세계 내에서 자신이 그 어떤 것과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존재임을 스스로도 충분히 인식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그분과 교제하며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 된 이 세계는 인간이 없다면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을 베풀며 교제할 대상으로는 인간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없는 나머지 피조세계에선 그분의 사랑이 온전해지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생존과 번식에만 초점이 맞추어 창조되었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인간만이 당신과 영적 교통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4-9)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가꾸려는 자존심 자체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드신 바에 나쁜 것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만물 중에 유일하게 자존심을 인식하여 가꿀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그분의 뜻을 잊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진 사실에 만족하기에 앞서 그렇게까지 인간을 귀하게 여기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부터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보이는 영역 안에선 자기를 앞설 존재가 하나도 없음을 알고는 그 자존심의 도가 넘어서버렸습니다. 자존심을 너무 가꾸다보니 그것이 자기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여 심지어 자기에게 자존심을 심어주신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려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절대 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권위마저 짓밟은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눈에 안 보이는 영적 세계에서 가장 귀한 천사로 만들어졌던 사단이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했던 전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필요 없고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자신감이 생기게 된 배후에는 바로 사단의 거짓 농간이 작용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유일하게 자존심을 인식하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 그 교만이 더욱 견고한 진으로 그 내면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자존심이 상하면 절대 못 견디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인간관계의 모든 상처와 죄악도 바로 이 자존심 세우기에서 기인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 자존심까지, 아니 “까지”가 아니라 자존심 “부터” 배려해주어야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남의 자존심만 세워준다고 참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선 자존심 세우는 것 때문에 도리어 시기 질투 다툼 분쟁이 더 생기고 심하면 원수사이가 되지 않습니까? 예컨대 남에게 기죽기 싫어 그럴 듯하게 살려다보니 부정부패를 예사로 저지르며, 이웃사람들 앞에 체면 상하게 했다고 부부싸움하다 이혼으로 도지지 않습니까?
또 단순히 남들의 자존심부터 세워주려 들면 자칫 아부가 됩니다. 나아가 남의 체면을 감안해 사려 깊게 행해도 나중에 그 전후사정을 알게 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체면 상했다고 덤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 자존심은 내가 세우는 것이지 삼자가 세워줘야만 겨우 살아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예의 할머니가 사장이, 룻이 보아스가 자기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해 몰래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배려해 준 것에 대해선 정말 감사할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그런 배려까지 받아야할 만큼 남에게 불쌍하게 비춰졌는지 싶어 더 괴롭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자존심은 완전히 땅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 것입니다.
원죄 하의 인간은 오직 자기 자존심을 최고로 높이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하나님도 절대 그 위에 위치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보이는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높은 존재란 있어선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원죄의 실상이자 결과입니다.
다른 말로 원죄하의 인간에게 상대의 자존심만 세워주려 들면 오히려 원죄의 타락상을 더 확대시키는 결과도 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사랑은 상대의 자존심을 살려주되 하나님 뜻 안에서만 살려야 합니다. 타락 이전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심히 좋았던 자존심으로 되돌려져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되었는지, 그래서 그분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만큼 귀한 존재인지부터 확신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3-6)
신자는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해서 남들과 주먹질하는 유치한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불신자는 항상 복싱만 하는 이상한 자들이 됩니다. 육체란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가치관과 사고를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의 뜻입니다. 바로 자기만 높이려는 자존심인데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것을 높이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마음속에 남은 견고한 진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자도 육체에 있다고는 합니다. 여전히 물질계 안에서 자존심이 펄펄 살아서 그것이 상하면 여간해선 못 견디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에 신자가 싸워야 할 싸움은 그 자존심을 그리스도 안으로 복종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은 전부 다 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불신자는 오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지만 신자는 그 반대로 자존심을 죽이는 싸움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예수의 진짜 닮은 점
그런데 그 일은 성령의 강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과연 성령이 어떻게 역사해야 합니까? 성령의 역사라고 해서 어떤 초자연적이고도 신비한 역사가 영혼에 일어나야 한다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사랑은 양으로 측정하거나 동기의 순수성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히려 상대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체면만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심이 아름답게 회복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자기 육체대로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전부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이런 싸움을 싸울 줄도 모르며 그런 싸움이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모든 인간이 정작 싸워야 할 싸움이 이것이라는 진리는 아예 알지 못합니다. 또 신자라도 여전히 자존심 살리는 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자 스스로 자신의 믿음만 믿고 남을 사랑하려 해선 아직도 남아 있는 자존심의 찌끼와 상대의 자존심이 서로 부딪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신자로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자란 항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녹아들게 해서 그 사랑을 삶에서부터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상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으니 자신의 자존심부터 죽여 달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채워주고 그 사랑으로만 남들을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기보다 상대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미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죽고 상대를 살리되 그 살리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상대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낮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온전한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되어야 합니다. 다. 그래야만 성도 간에 혹은 성도와 불신자 상호간에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자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 참 사랑이라는 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자존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내가 죽고 상대를 살려야 하는데 상대를 완전히 살리려면 나의 죽음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전혀 남아있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끝까지 완전히 죽이는 것이 선행 되어야만 상대를 진정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랬지 않습니까? 당신의 자존심은 성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이 땅의 죄인을 자신을 온전히 죽이고 상대를 온전히 살리는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해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물론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심에도 당신의 자존심이 살아 있어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오직 종의 형체로 채웠습니다.
당신의 자존심이라고는 하나 남김 없이 완전히 없어진 모습이 십자가의 굴욕적이고도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철두철미한 죄인을 살리려고 그랬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 또한 온전히 죽어야만 하는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는 온전히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아스가 룻에게 양적으로 풍부하며, 동기 또한 순수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또 그가 당시의 의인이며, 율법규정대로 온전히 지켰고, 예수님의 선조가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그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은 자신의 자존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룻을 살리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룻의 생애를 끝까지 온전히 책임져 주었습니다. 한 가련한 여인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자기로 인해서 다시 온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그것도 온전한 여호와 신앙 안에서 말입니다. 보아스의 자존심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죽이고 룻의 자존심은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의도했던 상태로 바꾸어주었습니다.
신자라고 자꾸만 양적으로 더 큰 사랑을 하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자칫 가랑이가 찢어지고 쉽게 지칩니다. 또 순수한 사랑을 하려고 억지로 보상을 외면하려 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럴 정도로 사랑하는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부터 낮추고 깎고 부수십시오. 날마다 순간마다 또 낮추고 또 깎고 또 부숴야 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부터 세우고 높이고 싶은 너무나 자연스런 습성부터 없애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은혜와 권능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자신의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부터 하나 남김없이 꺼내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깨트릴 수 있는 성령의 역사만 간구하십시오. 주님의 사랑 앞에 온전히 항복하고 엎드립시오.
그래서 오직 당신의 보혈의 은총으로만 자신을 온전히 채워달라고 눈물로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자연히 사랑하려는 상대도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함께 데리고 나가고 싶은 너무나 간절하고도 자연스런 소원과 열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상대의 자존심까지 배려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참 사랑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생길 것입니다. 나는 죽되 상대는 끝까지 살리겠다는 의지와 헌신이 따를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사랑을 자신에게 채우는 것만이 신자가 주님 닮은 사랑을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신자가 육체에는 속하되 육체대로 행하지 않는 싸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9/23/2009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