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을 이기는 최고의 비결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사단의 최고 무기
마크 부캐넌이 지은 “보이지 않는 것에 눈 뜨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단이 자기 집에 있는 중고 가정용품을 팔았다.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위협할 때에 써먹었던 도구들을 탁자 위에 배열해 두었다. 각각의 도구에 값이 매겨져 있는데, 탐욕, 수군거림, 교만의 순서로 값이 아주 비쌌다. 그러나 가장 볼품없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낡은 물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사단은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고 했다. 시기, 탐욕, 나태, 정욕 심지어 교만마저 신자를 꺾지 못할 때에 이것은 신통하게 재주를 부려 신자를 꼼짝 못하게 넘어뜨린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낙심이었다.”
고질병을 비관하여 자살한 한 경찰서장의 이야기를 일전에 한국 뉴스에서 접했습니다. 육체적 질병, 아니 피곤만으로도 우울증으로 도질 수 있습니다. 거기다 온갖 현실적 고난이 겹치면 담대하게 맞서 싸우는 것은 둘째 치고 당할 대로 당한 후에 재기할 기력과 의욕마저 상실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형통해 보이는 자라도, 나아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 같은 자라도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심(傷心)까지는 괜찮지만 낙심(落心)으로 떨어져버리면 곤란합니다. 상심은 외부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환난이든 질병이든 인간관계 상처든, 자기 내면에 생기는 즉각적이고도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반응입니다. 힘든 일이 생기는데도 웃고 있는 자는 바보일 뿐입니다. 반면에 낙심은 상심에 사로잡혀 완전 바닥까지 내려가는 바람에 아예 아무 일도 못하거나 다른 일에 큰 방해를 주는 것입니다.
일단 상심이 되더라도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자기 마음을 의지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깊이만큼 올라오는 데 힘이 더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완전한 바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어선 절대 안 됩니다. 자꾸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머무르거나 그곳에서마저 아래를 바라보면 인생을 포기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럴 의도까지야 없다 쳐도 그 부작용이 만만찮고 원상으로 회복하는 데만 엄청난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바닥이란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좁은 공간의 맨 아래를 의미합니다. 사방이 툭 터인 넓은 곳에는 나아갈 곳도 많으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자기만 바닥에 떨어졌다고 실감하지 못합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도 남들도 다 겪는 일이거니 하면 그만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같이 어차피 누구나 겪는 일이라면 크게 관념하지 않지만 자기만 특유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되면 낙심이 더 도지게 마련입니다.
그럼 당장에 낙심을 이겨내는 실제적인 비결이 하나 생겼습니다. 모든 낙심의 결과는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떨어진 것도 자기이며 올라올 자도 자기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 낙심을 대신 져줄 사람은 없습니다. 무조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자기가 짊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은 남의 고난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더 나빠질 경우도 있지만 조금만 세밀히 살펴보면 주위에 자기보다 더 어려운 자가 의외로 많음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형편이 더 어렵고 불쌍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고난을 잊거나 낙심의 정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최소한 나 혼자만 겪는 어려움은 아니라는 위로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자의 낙심은 다르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아픔과, 그 아픔을 헤아릴 재간이 없다면 최소한 욥이 당한 고난과라도 비교해보라고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는 말씀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됩니다. 때로는 사단을 대적하며 물리치는 기도도 하라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여 낙심을 극복하려면 너무 늦고 그 동안에 낙심으로 인한 폐해가 쌓일 대로 쌓인 후입니다. 또 이미 고난이 끝났는데 낙심하고 있을 바보도 없습니다. 신자도 의지적으로 낙심에서 일단은 빠져 나오고 봐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로 훌륭한 권고입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졌으면 신앙 유무와는 별도로 그 다음에 할 일이라고는 위로 올라가는 일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지각과 분별이 있다면 누구나 깨우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는 그리 관계없습니다.
인간은 네 발로 기므로 항상 땅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두 발로 걷기에 항상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늘에 계신 분을 향해 두 팔을 크게 펼쳐들어야 합니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만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그 시작부터 끝까지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쉬지 말고 간구하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겐 기도보다 낙심을 더 쉽게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낙심뿐 아니라 피곤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또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쉽게 간과해버리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낙심을 갖게 된 원인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현실적 환난, 질병, 실패 등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중에 온 것입니다. 정말 참된 선을 행하고 있다면 구태여 낙심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본문 말씀대로 열매가 자기 예상만큼 빨리 맺히지 않는 경우를 빼고는 말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신자더러 바라는 것이 피곤하여 낙심이 생길 때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낙심은 열매가 빨리 생기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것일 뿐이어야 합니다. 또 선을 행하는 중에 겪는 불편과 고통은 물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비방, 멸시, 핍박까지 전혀 문제될 것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긴 낙심도 때가 되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줄 것을 하나님이 보장하니까 곧 바로 거기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항상 선을 행하고 있으면 그 지연되는 열매에 대한 염려 빼고는 따로 낙심이 생길 이유나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는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살아가다 부닥치는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한 낙심과는 차원이 다른 낙심입니다. 지금 성경은 비유컨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에만 초점이 모이고 심지어 그 고치는 일로 또 걱정하는 신앙과는 전혀 다른 신앙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의 관심이 어떻게 하면 빨리 낙심에서 빠져 나올지 노심초사하는 것으로 그치니까 교회들도 치유와 회복의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강습소로 전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선을 행하면 악을 쉽게 이긴다고 합니다. 악을 뜯어고쳐 이겨야 할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선을 바로 행하는 것이 더 손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정작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겪어야 할 낙심도 선을 행하는 중에 하나님의 열매를 맺으려는 소망과 열정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낙심이 생기더라도 간절히 기도해서 이겨내기 보다는 하나님 그분을 소망하면 곧 바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행할 선(善)의 본질
그럼 신자는 구제와 선행에 큰 열심을 내어야만 합니까? 모든 시간과 여유를 동원해 손해 보고 희생하며 이웃을 섬겨야만 합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자선 행위가 바로 신앙은 아닙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선(善)의 개념 즉, 하나님이 신자가 행하기를 바라는 선의 본질은 차원을 달리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 사도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바로 신자가 행할 선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라는 열매를 반드시 거두게 되니까 미처 결과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도 너무나 당연한 뜻 아닙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의 열매가 어떻게 당장 눈앞에 열리겠으며 또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선을 행하는 신자 자신에 대한 보상도 하늘에 쌓이며, 그 선을 받은 상대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성령으로 구원되어 그 이름을 언젠가는 하늘의 생명책에 올려질 것 아닙니까?
오히려 신자가 선의 열매를 금방 자기 눈으로 보겠다는 것이 더 이상하고도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낙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열매를 전혀 보지 않겠다고, 아니 볼 수 없다고 확신한 후에 선을 행하면 아예 낙심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선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은밀히 알려질 뿐이며 그 보상도 그분의 때와 방식으로, 물론 천국에 가서야 이뤄지는 것까지 포함해서, 은밀하게 이뤄질 뿐입니다. 신자로선 자기가 미리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므로 필연적으로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적 삶의 안일과 형통만을 위하여 세상의 것에 집착하며 사는 것입니다. 더 풍요롭고 화려한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먹고 마시고 입는 일로 인해 낙심이 더 생긴다는 것이 육체로 거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 땅의 물질계 안에서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살면 기다리는 것이라곤 사망뿐임을 확신하는 자입니다.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옮겨와 살려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당부대로 그런 것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광채를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통해 이 세상 앞에 비춰야 합니다. 자기에게 알려주신 주님을 위한 구체적 소명에 헌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소명에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도덕적 선행도 마땅히 포함되지만 그것조차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참 사랑을 증거하고 베풀어서 모든 이로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한 후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들이 모여서 온전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고 더 확장시켜야 합니다. 선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일을 이루는 수단과 통로가 될 뿐입니다.
육체의 두 번째 뜻은 로마서에 주로 육신(Flesh)으로 번역되었듯이 죄의 본성에 묶여 있는 인간성 전체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인간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모든 일을 판단, 결정, 실행하는 것을 뜻입니다. (참고로 헬라 원어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선 육체를 위해서 육체로 심는다고 했으니 위에서 설명한 첫째 의미가 더 가깝긴 합니다. 또 육체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당연히 육체 스스로가 판단 결정 시행하게 될 것입니다. “육체로 심는다”는 표현 자체가 인간의 독단적 주권행사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육체의 이 두 가지 의미를 복합하면 물질적 가치관에 묶여서 자신의 안일과 형통만을 위해서(육체를 위하여) 인간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하는(육체로 심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반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위하여 성령으로 심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간단히 말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서만 시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해 자기가 판단하여 자기 것에만 의지하면 낙심은 피할 길이 없는 반면에 주님을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전적으로 주님 뜻대로 행하면 아무리 피곤한 일이 생겨도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당연히 열매가 열리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이 주님 당신의 일을 했지 않습니까? 그분 역사의 통로밖에 안 되는 인간 신자가 낙심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확약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진짜 속내
그런데 성경이 말하려는 바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불신자가 아닌 신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신자도 스스로 속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어떻게 속는다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 안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그 구절로 돌아가 봅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본문대로 믿고 행하면 속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과 반대로 생각하고 행하면 속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자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진리를 믿는 일에 속고 있을 리는 없습니다. 성령을 위해 심으면 성령을 거두고 육체를 위해 심으면 육체를 거둔다는 원리 자체를 틀렸다고 믿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실제 삶에서 자기는 성령을 위해 심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육체를 위해 심거나, 성령의 열매가 열린 것 같은데 사실은 육체의 열매가 열린 것도 모르고 속는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려는 숨은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상대의 없음을 업신여기면서도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려는 선행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선행의 열매도 아무리 상대가 현실적인 도움을 받았어도 실제로는 감사는커녕 오히려 반감만 더 키우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흔히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는다고 더럽고 추한 곳을 피해 다니지만 사실은 자기는 이미 백로가 되었고 참 사랑의 섬김이 필요한 자들은 까마귀로 매도했지 않습니까?
또 종교적으로 큰일을 이루기만 하면 다 성령이 함께 했다고 착각합니다.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조직체계도 일사불란하게 구성하고 온갖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빠지면 그 어떤 일도 성령을 위한 것이 아니며 자칫 인본주의적인, 심하면 사단의 열매를 맺을 때도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얼마나 자주 싸웁니까?
성령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세상 앞에 더 복음답게 드러내고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그 복음의 은혜와 권능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십니다. 성령을 위해 심는다는 것이 단순히 경건한 모습으로 종교행위를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확실하게 드러나고 또 더 높여져야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뿐입니다. 그분이 받을 영광을 다른 것이 대신 받거나 혹은 더 높이 드러나는 모든 일은 육체를 위해 심어서 육체의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신자 개인도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얼마든지 속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뜻은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변하여서 빛과 소금으로 세상 앞에 서며 복음이 더 확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기가 처한 그 위치와 신분과 직무를 통해 주님의 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일과 형통을 위하는 속내와는 상관없이 교회 활동만 열심히 하면 성령을 위해 심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신자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우선적인 관심사입니다. 신자가 그분 앞에 거룩하게 서있으면 됩니다. 신자 주변의 환경을 풍성하게 혹은 궁핍하게 바꾸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으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는데 가장 합당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당신께서 이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자신은 뒷전이고 자기 주변 여건만 바꿔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래서 무슨 내용이든 기도만 하면 다 성령을 위한 일인 줄 압니다. 나아가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 두 가지를 내놓고는 하나님더러 더 축복해줄 일 하나를 꼭 골라내라고 윽박지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거룩해지는 것 외에는 실제적 관심이 없으며 또 신자가 그러면 나머지 모든 일은 당신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텐데도 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일을 위해 하나님을 부려 먹을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일이 제대로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낙심에 빠져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고 성화와 재촉이 대단합니다. 감히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서 운행 섭리하시는, 그것도 자신의 죽음마저 주관하는 절대자에게 말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성경의 진술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성경이 “스스로 속지 말라”고 하지 않고 대신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속는 것은 속이는 주체가 따로 있어 신자는 피동적으로 당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속는 것입니다. 사단이나, 환경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이해하기 힘든 역사로 인해 신자가 육체를 위해서 심는 줄도 모르고 성령을 위한 것인 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단과 환경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신자보다 오히려 불신자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능동적으로 속이는 주체가 바로 신자이며 속이는 대상은 감히 하나님입니다. 본문이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진짜 속내는 자기 안일과 형통이면서도, 도덕적 종교적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을 포함해서,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드리기만 하면 다 성령을 위해 성령을 심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심중을 꿰뚫어보지 못할 리 만무합니다.
또 자기 본성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대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자기 안일만 챙기고 자기를 높이려는 의도는 감추거나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선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했으니 성령을 위해 심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몰라서 착각하고 있다면 또는 목사가 그렇게만 가르쳐 순진하게 그대로 믿고 있다면 크게 탓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에 능하고 기도 많이 하고 헌금과 봉사도 남들보다 앞서니 자기는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이며 반드시 교회에서 그만큼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없거나 아주 부족한데도 자기는 믿음이 좋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니까 하나님께도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하거나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속이려 드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저 단순히 착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의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잘못 가르치는 교회라도 스스로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사실은 그런 자기 생각이 틀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왕에 자기가 누리고 있는 교회 내의 권세나 평판을 깨기 싫어서 지금까지 행했던 종교적 인식과 모습의 틀을 깨지 않으려 드는 것입니다. 유대 관원 니고데모가 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겠습니까? 바리새인을 비롯해 예수님과 교제하며 따르는 자들도 꽤 있었지만 결국 종교적 특권을 과감히 포기한 자는 아리마대 요셉 외에는 성경기록에서 발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자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스스로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그것 이상을 달성하면 믿음이 좋아졌다고 자기가 자신을 평가합니다. 예수님과의 실질적인 대면과 진정한 교제는 없이 자신의 종교적 행위만 중요시 여깁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으면 제대로 자기 마음도 추스르지 못하는 수준의 신앙입니다. 일종의 자기 수양이자 마인드 컨트롤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신자더러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성령을 위해서 성령으로 심어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낙심할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열매가 빨리 맺히지 않아서 혹은 세상의 훼방으로 피곤해지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열매를 맺혀 주실 것이므로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령을 위해 성령으로 심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거나 못하고 단지 열심히 믿고 있는데도 자꾸 힘든 일이 생겨서 낙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된 신앙입니까? 또 어떤 방안을 동원해서라도 그 낙심된 상태만 벗어나려는 것도 너무나 모자란 신앙 아닙니까?
사단의 더 강력한 무기
물론 어떤 수를 동원하든, 세속 쾌락이나 죄악에 의존하지 않는 한, 낙심의 바닥에서 탈출해 다시 위로 올라오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후약방문 식으로 그런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 낙심에 떨어지기 전에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낙심으로 떨어지게 되는 근본 원인에 대한 분석과 그 해결책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 방향이 다른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참된 선을 피곤할 정도로 행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또 그렇게 행했는데도 다른 어떤 것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열매가 빨리 열리지 않아서 낙심하는 경우는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신자답게 살아서 세상으로부터 손해보고 자신이 희생당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기꺼이 행합니까? 바울은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까?
사도의 너무나 정교하면서도 놀라운 진술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선을 행하여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은 단지 “피곤할 뿐”입니다. 피곤하다는 것은 괴롭거나, 힘들거나, 억울하거나, 분노가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조금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선을 행했기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보상은 전혀 바라지 않았기에 더 그렇습니다. 세상의 핍박은 얼마든지 감수했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열매를 보고 싶기 때문, 즉 상대가 빨리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만이 소원이자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신앙 수준은 너무나 저급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성령으로 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행사에 결석만 안 하면 신자로서 할 바를 다 한 양 생각합니다. 자기 코가 석자라 주위에 선을 행하는 것은 완전히 뒷전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을 속이지 않으면 또 그래서 자신도 속이지 않으면 유지조차 안 되는 신앙입니다.
그 초라한 신앙 모습 가운데는 낙심을 심리적 의지적으로 무조건 이겨내려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자신의 안락과 형통을 구하다 실패한 어려움을 가지고 매번 사후약방문격의 신앙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그것도 심리적 방편을 이용해서, 스스로 속이고 있는 일이지 않고 무엇입니까? 교회나 신자가 그런 일에만 관심을 다 빼앗기고 또 열심히 그러고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그 원인과 과정이 어떠했던 결과적으로는 어떤 모습이든 치유와 회복은 일어나니까, 실제로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단이 누구입니까? 거짓의 아비이지 않습니까? 거짓의 아비가 되려면 도무지 거짓인지 모르고, 아니 선하고 거룩한 일인 양 완전히 착각하게 해서 속아 넘겨야 하지 않습니까? 신자더러 선을 행하여 낙심해야 한다고는 교회들이 거의 가르치지 않으며 신자 스스로도 잘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술보다 전략으로 맞서라.
교회는 신자더러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염려를 가능한 아주 많이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어떤 훼방도 기꺼이, 아니 사도처럼 그렇게 당하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자체를 기뻐할 정도로 십자가 복음으로만 살고 죽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머리가 되어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해야 합니다. 신자더러 낙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에만 교회가 붙들려 있으면 사단에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이 신자 주위에 일어나는 골치 아픈 잡다한 일들을 몇 가지 인간적 지식을 가지고 전술(tactic)적으로 맞서서 처리하는 기법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로 찌들어 있기에, 아니 죄를 스스로 즐기려 하고 있는 총체적 실상에 성령의 권능으로 전략(strategy)적으로 맞서 싸우는 전면적인 전쟁입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일생 모두를 걸고 매순간을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육체를 위해 육체로 심으려는 본성이 없어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그 믿음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고 순수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박학다식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모든 것을 이해 판단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주신 너무나 거룩하고 엄위하고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자신의 실상이 진짜 어떠한지 똑똑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런 영적 각성을 바탕으로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따르는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 방식을 자꾸만 훼방하여 이전 모습으로 돌리려는 사단의 음흉한 속임수를 분별해내어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신자로 현실 문제로 낙심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사단의 최고급 전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낙심을 이겨내는 일에 신앙의 힘을 다 소진하게 하여서 선한 일을 피곤할 때까지 할 수 있는 신앙의 진짜 본질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비밀스런 일급 전략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바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신자는 자신을 거룩하게 바꾸어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똑 같이 따라가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자기 주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동행해 주시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피곤할 때까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벽기도마다 눈물 뿌리며 이겨내려는 모든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절대로 낙심에 붙잡히지 말되 전략적으로 덤비는 사단을 전략적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전술 몇 가지 이겼다고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입니다.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자꾸만 주위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신경을 쏟아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신자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질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11/13/2009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주위의 자질구레 한 일들이 자질구레 하게 보여야 하는데
이게 온통 큰 산처럼 보이니,
아직인가 봅니다.
더 기도하고 더 자숙해야 할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