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려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삼상23:16,17)
고달픈 신자의 인생
인생살이가 점점 더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세계적 불경기의 여파가 크긴 큽니다. 이제는 경제활동이 한 지역 사회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하나로 묶일 만큼 서로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기에 더욱 그 회복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구조적 실업이 해소될 만한 뾰족한 조치가 단시일 내에 창안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장래 소망을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1-5)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미국 월가가 금융상품 운용을 잘못해서 이런 사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와 돈만 사랑한 결과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만의 책임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잘 믿으면 세상에서 크게 형통한다고 계속 소리쳐온 교회들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일등공신일 수 있습니다. 신자마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여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데 불신자야 새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물론 개중에는 정말 의로운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다 보면 평소에도 손해를 보기 십상인데 이런 불경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동일한 고통을 당하면 그리 억울하지도 않으련만 돈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재산을 눈 덩이처럼 굴릴 호기로 삼고 있으니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마저 들기도 합니다.
신자가 기댈 곳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눈물로 눈앞에 닥친 사정을 아룁니다. 그러나 상황은 호전될 기미는 없고 여전합니다. 아니 때로는 더 큰 곤경이 밀어닥칩니다. 영악하지 못하니 현실적 적응력도 떨어져서 더 코너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도 아무 수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자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여전히 더 뜨겁게 기도하면서 더 인내하는 것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는 길 말고는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섬겼음에도 장인이자 왕인 사울에게 아무 죄 없이 쫓겨 다녀야했던 다윗이야말로 억울함의 대명사입니다. 가까스로 황무지 수풀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찾아와 “그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만 힘들어 하는 우리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다윗이 더 위급하고 또 도망 다니느라 제대로 뜨겁게 기도할 짬도 없을 텐데 어떻게 그 믿음에 힘이 있어졌을까요?
기도해도 두려운 까닭은?
우선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너무 입에 발린 위로 같습니다. 두려우니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까 더 힘을 내어 뜨겁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이 위로가 가장 많이, 어떤 통계로는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성경과 설교로 이런 위로를 그렇게나 많이 접하고도 우리가 여전히 두려운 까닭이 과연 무엇입니까?
요나단의 위로를 더 살펴봅시다.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이 아무리 추적해 와도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요나단 자신도 다윗을 왕위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자기는 그 신하가 될 것이니 그 점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확약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비슷한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이번 환난으로 절대로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현재 처한 사건과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습니다. 그 위로에 힘을 얻고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뜨겁게 기도하고나면 두려움이 조금 가신 것 같지만 잠간뿐 금방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하나님만 바라보려고 더 뜨겁게 힘차게 기도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기도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믿음은 힘 있게 세우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둔 채 기도하는 종교 행위 자체에만 힘을 실은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기도를 간절하고도 뜨겁게 했으니 응답이 더 빨라지겠거니 기대하거나 믿는다면 기도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 응답의 질과 양과 시기가 달라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응답 잘 받는 특별한 기도방식이 생깁니다. 역으로 하나님은 그 방식에 무조건 따라야만 되는 종(?)으로 전락합니다.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주권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신자의 모든 기도는 의도적인 헛된 욕심이 들어가지 않는 한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각 개인에 따라, 또 한 개인도 경우에 따라 각기 다르게 당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하실 뿐입니다.
신앙이 조금 나은 사람도 실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힘이 있어야 한다니까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믿음에만 힘을 보태려 듭니다. 꼭 기도를 간절하고 뜨겁게 하지 않더라도 믿는 것은 간절하고 뜨겁게 믿으려 합니다. 울부짖으며 뜨겁게 기도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약한 반증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하나님을 더 열심히 믿어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심과 불만이 생겨도 의지적으로 부인합니다. 온전히 믿어지지 않아도 진짜 더 믿어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잘못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려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속에 없는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려 해서 생기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잘 믿어지지 않지만 진심으로 온전히 믿어보려 하니 하나님더러 내게 그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온전하고도 겸손한 믿음의 태도입니다. 심지어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해도 됩니다. 요컨대 잘 믿어지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이 더 좋은 믿음이요 온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힘이 생기려면?
믿음에 힘이 생기려면 진지하고도 정밀하게 환경과 하나님을 진짜 실제적으로, 관념상의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비교해야 합니다. 부친 사울의 손이 다윗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그의 손과 하나님의 손 중에 어느 쪽 능력이 더 큰지를 정말로 엄밀히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는데 사울의 손에 잡히면 하나님이 일개 인간에게 진다는 뜻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발생 가능한 일입니까? 다윗의 생명이 아니라 온 천지가 없어져도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일어난 현실적 환난이나 혹은 못살게 괴롭히는 인간들이 하나님보다 클 리는 절대 없습니다. 아니 지금 일어난 사건이나 처한 환경 자체를 하나님이 직접 계획은 안했어도 최소한 허용했으며 당신의 완벽한 권능과 섭리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끄는 궁극적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거나 그분이 보시기에 신자에게 무익하거나 손해되는 쪽은, 우리가 판단하는 현실적 형통과는 다를 수 있지만, 결코 아닐 것 아닙니까? 그럼 뭣 때문에 염려합니까? 하나님 그분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쪽으로 반드시 이끄시고 말 것인데 말입니다. 미처 그런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이전에 받았던 그분의 간섭, 은혜, 권능 등을 다시 회상해서 그것과도 비교해서 곰곰이 묵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뜨겁고도 힘차게, 또 끈질기고도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에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없는 믿음에 자신의 의지력을 보탠다고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행한 뜨거운 기도나 의지적인 다짐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 세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일어난 환난에 비해 그 힘에서 밀리고 있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힘을 보태주려 시도한 꼴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빨리, 그것도 내가 기도한 방법과 시기대로 응답해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른 것 아닙니까? 저의 이 굳센 믿음을 보시고도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자신이 지금 신앙행위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하나님 앞에 자랑한 것에 불과합니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건, 사건, 사람들과 하나님의 권능을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뜨거운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대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보답만 바라며 열심히 바친 자기 치성을 뜨거운 믿음이라고 혼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의심과 불만이 조금이라도 들면 그 자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제대로 깨닫는 것부터 믿음을 힘 있게 세우는 첫 걸음이자 거의 유일한 비결입니다. 정말로 눈앞에 직면한 상황을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그분의 나를 향한 마음, 뜻, 계획과 엄밀하게 비교해 봐야 합니다.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라는 요나단의 권면 그대로, 과연 “지금 이 문제와 고난의 힘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나를 완전히 삼킬 수 있을지?” 따져 봐야 합니다. 이 질문의 답이 예스입니까 노입니까?
아직도 불안하십니까? 요나단의 마지막 충고를 들어봅시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다윗의 가장 큰 대적인 사울도 결국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종국에는 패배하리라 이미 각오하고 있는 적과 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적국의 사령관의 최측근이 우리는 현재 패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미리 귀띔을 해준 꼴 아닙니까? 지금 쫓고 있는 것은 패배하기 전 마지막으로 용이나 한 번 써보자는 것에 불과하니까 조금 고생되더라도 잠깐만 더 참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천군만마의 응원군보다 이 한 마디는 더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로가 다윗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모시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위로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최고 대적 사단은 자신이 패배하리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패배했다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통해서, 아니 그 전에 영계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습니다.”(유1:25)
그래서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예수님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했습니다. 제발 지금 바로 완전 멸망시키지 마시고 그 시기를 조금만 더 연기해달라고 사정사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소원대로 돼지 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돼지는 물에 빠져 몰살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려버린 것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단 스스로 예수님에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자인했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단이 자기에게 미혹된 인간들을 총동원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발악해본 것입니다. 신자는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창3:15)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사단의 패배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제 십자가 후인지라 그 완전한 승리를 주님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사단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는 신자
그럼 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자를 속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쫓겨났을 때에 이미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상태라서 아담과 이브에게조차 사기밖에 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 속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주위 환경이 더 강하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신자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 현혹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이전에 하나님보다 인간의 생각과 길이 더 우위에 있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하나님을 배역하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심어주고 나니까 선악과가 죽도록 먹고 싶어지게 즉, 보이는 것에 완전히 흔들리게 되었지 않습니까?
오늘의 주제에 적용하면 신자마저 내가 기도한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줘야 한다고 기대, 예상, 믿는 것이야말로 바로 사단에게 가장 먼저 속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고 나니까 자꾸만 보이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에 대입하려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 믿음이 힘이 빠지게 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미 예수님에게 자신의 모든 권세를 빼앗겼으므로 사단 스스로는 절대 신자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그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신자를 미혹하는 힘이자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역으로 따져 신자가 만약 이 사실을 알기만 해도 사단은 절대 신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대적은 패배를 인정하고 있는데 막상 우리는 우리가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단은 신자가 기도만 제대로 해도 곧바로 하나님께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혹시 신자가 속아 넘어가 주기를 바라며 농간하려 듭니다. 신자로 자신의 대적이 이미 예수님께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모르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대적마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절대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두 번 거푸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 문제와 환난이 미치는 부작용 내지 악영향에 파묻히게 만듭니다. 사단을 포함해 세상 어떤 것이라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선한 능력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지금 닥친 문제보다 그분의 권능이 더 약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선으로는 어떤 악도 이겨낼 수 있는데도 신자는 정작 그분의 거룩과 의로 무장해서 삶에서 실천하기보다는 자기는 가만히 있고 오직 초자연적인 간섭만 일어나서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기만 초조하게 또 고집스럽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믿고, 아니 소망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하기 시작할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당장에 힘이 빠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현혹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마저 줄어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눈물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면 기도를 마칠 때는 그분의 승리를, 다른 말로 사단은 이미 패배해 있음을 확신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다윗의 시편의 내용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기도는 거의 하나님에게 대놓고 하는 넋두리요, 불평이요, 떼쓰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신자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정확히 알면 금방 사단이 이미 패배했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니까 어떡하든 그분을 묵상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자꾸만 신자더러 자신의 종교적 능력과 현재 닥친 문제를 대조시키게 만듭니다. 기도, 말씀, 헌금, 봉사 같은 신앙행위로 하나님의 능력이 늘거나 줄 거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 얼마나 신자가 사단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는 꼴입니까?
기도 응답이 되지 않는 이유
다시 말하지만 패전 준비를 하고 있는 대적 앞에서 승리를 이미 확보한 승자임에도 스스로 패배했다고 여기거나, 패배할 줄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것이 대부분의 신자가 갖는 믿음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승리에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못합니다. 아니 손에 쥐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내가 원하는 식의 승리만 빨리 편하게 달라고 고집하는 것이 대부분의 신자들이 행하는 거의 유일한 신앙행위가 되어 있습니다.
대적이 패전 준비를 하고 있다면, 나아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와 항상 함께 동행 한다면 남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신자의 죄악과 욕심을 제거시키는 일, 그야말로 진짜로 힘 있게 세워야 할 믿음뿐이지 않습니까? 뜨겁고도 간절히 가도하고 또 억지로 믿으려 하기보다는 더 급선무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신자들마저 무정하며 돈을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없애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왜 빨리 내 식으로 응답해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사단이 미혹시켰겠지만 우리 속에 뿌리 깊이 남아 있는 바로 그런 마음 아닙니까? 신자가 이러니 이미 말세인 셈이고 또 말세를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결코 그리 녹녹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패전 준비를 하고 있어도 그 수완의 교활함과 역사하는 힘은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또 마지막 발악할 때에 힘은 더 강하고 무섭습니다. 사단의 진짜 노림수는 신자더러 자신의 의로움에 속아 넘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정욕으로 구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거룩한 신앙행위를 했으니 아주 잘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요구하는 기도 응답의 방식과 때는 하나님께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신자의 기도를 그대로 응답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기도하는 내용 때문 아닙니까? 선하고 의롭다고, 최소한 신자스스로는 얼마든지 간구해도 된다고 믿는, 내용이지만 그분이 보시기에 흡족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기도 응답이 더딘 것 아닙니까?
요컨대 사단이 진짜로 힘을 온전히 발휘하는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곳입니다. 십자가 형상이나 물건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악과 정욕을 그분의 십자가에 매일, 매순간마다 못 박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안에 이미 들어온 자는 절대로 사단에게 지지 않는다는 진리가 실제로 삶에서 구현될 수 있는 통로는 단순이 무엇을 요구하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 속의 죄악과 정욕을 낱낱이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미리 다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또 당신의 나라와 의를 확장하는 데에 충성된 종으로 동참할 소원과 열정이 생기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일의 위해서 먼저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당신의 너무나 큰 영광을 반드시 보고 맛보도록 해주십니다. 이 길 외에 믿음이 힘 있게 서는 방도는 없습니다.
4/8/2010
종교행위를 믿음으로 착각하는 일들에서 깨어나야겠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자신을 돌아보고 혹여 자기의 배만 채우는 속내에서 비롯된 거룩으로 가장된 일이
아닌지를 섬세하게 살펴야겠습니다.
또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일을 감격하며 감사하는 일이 종일토록 찬양을 쉬지 않는
이유가 되어야겠습니다.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