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전체를 통해 히브리어 식 표현으로 최상급의 찬사를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그런데 조그만 깊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좋은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간이 하나님을 최상급으로 찬양한 것은 천국 보좌 앞에서 뿐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찬양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항상 하나님에 대해 불만과 의심과 불신 투성이었다는 뜻이다. 고통과 염려 중에 도움을 구할 때만 조금 애타 했을 뿐이다. 그것도 비교급 수준에 불과했다. 성경 기록으로 따질 때에 인류는 전 역사를 통틀어 이 땅에서 제대로 찬양 다운 찬양을 한 적이 없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우리를 찾을 때에는 최상급으로 찾으셨다. 그저 불안과 염려에 사로 잡혀 참다운 찬양을 하지 못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것이 비교급 수준이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 것은 최상급 수준이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출애굽기 6장 1-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로라(2, 6, 8절)”라고 세 번이나 거푸 말씀하셨다. 모세가 애굽에서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라는 소명을 받고 바로를 찾아가 첫 대면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켜라고 요구 했지만 완전히 소 귀에 경읽기로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이 더 가중되는 벌을 받았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하였고 모세는 이런 형편을 하나님에게 불평을 섞어 고했을 때에 그 응답으로 주신 말씀이다.
세 번씩 강조하는 것은 히브리어 식으로 최상급의 표현이지만 모세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으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이다.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약속의 보증으로 하는 맹세는 몇 번 하는가? 삼 세 번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대답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너희 식으로 맹세까지 해 줄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다. 삼 세 번을 다짐해주마.”
모세의 불평과 불신에 대한 하나님으로선 얼마든지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거참! 내가 내라니까, 몇 번씩 말해야 알아 듣겠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아직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없는 긍휼로 참으시고 자신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6장 3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이것도 3번 강조한 최상급에 해당한다. 3대 연속으로 절대 중단 없이 계속해서 신실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이다. 영원한 하나님이다. 너희가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믿는다면 나는 아무리 세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으며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동일한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에게도 나는 여호와였고,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나는 변함 없이 여호와였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찾기만 하면 비록 우리가 찾는 것이 최상급의 열심과 진정은 아닐지라도 거짓이 없고 가식만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최상급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으로 대하신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동일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어떤 속성에서나 항상 최상급을 유지하신다. 유지라는 말도 틀린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칫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비교급이나 보통의 수준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항상 최상급 그 자체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우심의 모든 측면에서 영원토록 완전하시다. 완전의 상태에서 단 한치도 단 한 순간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품성에서 가감이나 변동 상황이 있다면 벌써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 분에게는 눈곱 만한 변동이 개입되면 그 순간 자동적으로 가변적, 상대적, 불완전한 존재로 변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영원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가변적, 상대적, 불완전한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한 전심으로 찾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 최상급의 상태로 나올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니 평생을 가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최상급의 찬양을 할 수 없고 천국에 가서야 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우리의 믿음과 진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보잘것없고 완전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만 다만 겸비한 마음으로만 나아가면 된다. 하나님과의 대면과 임재가 아무리 서치라이트처럼 순간적으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빛처럼 보일지라도 그 빛이 우리의 심령과 육신을 만지는 순간 우리에게는 최상급의 은혜로 풍성하게 넘치게 된다. 마치 12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 가장자리만 만져도 순식간에 완전히 치유가 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데 반해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열심보다 그 강도가 세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만약 우리의 열심이 더 크다면 이미 그 열심마저 인간의 공로요 하나님의 복을 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그 열심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양이 달라지거나 최소한도 복을 이끌어 내는 원인과 전제라면 이미 그 축복은 진정한 은혜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더 복을 많이 받으려면 더 많은 열심과 치성을 동원하면 된다는 뜻이 되고 그런 열심은 주문과 마법의 수준으로 전락한다.
천국 보좌 앞에서 거룩, 거룩, 거룩하다 최상급으로 하나님을 찬양 할 때에 이어지는 찬송가의 가사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이다. 여기서도 3 번의 강조다. 최상급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완전하신 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초림하셨을 때나, 골고다 언덕에서나, 재림하실 때나 전능하신 이일 뿐이다. 우리가 갖는 믿음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을 찾는 열심보다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열심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또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찬양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