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문법에 비교급, 최상급의 표현 방법이 없고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최상급은 세 번 강조하는 데 흥미롭게도 천국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만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또 이 땅에서는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적이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려 아홉 번이나 같은 의미로 반복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이 그랬다. 세 번 반복이 최상급식 표현이라면 아홉 번을 강조한 것은 최상급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말인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하나님에 대해 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하나님,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고 찬양했다.
너무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 물론 구약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에는 강조하는 뜻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단순 반복으로 암송하기 좋고, 시적 표현의 운율을 맞추고, 또 예배 때에 기도문이나 찬양으로 부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나의 힘이나 방패로 한 두 번만 찬양해도 될 텐데 어찌 보면 우리 같은 동양인 사고 방식으로는 좀 방정 맞기도 한 것 같다. 서양 남자들이 자기 아내한테 그저 “하니(Honey), 다링(Darling), I love you” 입에 발린 말로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님도 입술로만 주여 주여라고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지 않은가?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한 것에 대해 감사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수도 없는 환난을 겪었고 평생의 대적 사울에게서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은 다윗이 그 모든 시련에서 구원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께 드린 찬양이다. 한 사건에 벌렁 뒤로 나자빠질 정도로 크게 감격한 것에 관해 호들갑을 떨듯이 최상급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겪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마다 대적도 다 다르고 위급한 상황이 각기 달랐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고 보호해 주신 방법과 모습 또한 각기 달랐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윗 본인이 체험하고 인식한 은혜의 감동도 달랐다. 어떤 때는 산성이다가 다른 때는 방패 였다가 또 다른 때는 구원의 뿔이었다는 것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4절 이하에 표현한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땅이 진동했고, 산이 요동했고,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 불이 내렸고, 번개로 파하고, 뇌성을 발하고, 많은 물에서 건지셨다고 했다.
실제로 다윗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구약 전체 아니 인류 역사에도 드물 것이다. 그가 평안하고 영광스러웠던 적은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와 그 후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히기 직전까지 정말 시간적으로 전 평생에 극히 일부분이었고 그 나머지는 단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그를 붙들어 주셨다. 대적의 아들이 도와 주었고, 대적의 딸이자 자기 아내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했고, 동굴 속에서 대적이 나타나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원수를 갚자고 했지만 성령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불어 넣어 주었고, 적국에 가선 미친 척하는 지혜를 부어 넣어 주셨고, 완전히 사로 잡힐 지경에는 적국이 이스라엘로 쳐들어 와 사울 군대가 물러서게 했고, 나발을 죽이려 할 때에 현명한 여인 아비가일을 만나게 했고, 밧세바와 불륜의 죄를 범했을 때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씻을 수 있게 했고, 언약궤를 잘못 옮기며 당한 불행을 결국에는 웃옷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춤을 주면서 찬양을 드릴 정도로 그 은혜를 회복시켜주셨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서도 건져 주셨고, 그 와중에 피난 길의 고난 가운데 시므이의 저주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영적으로 더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 갈 수 있었고, 성전 건축을 하고자 하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적인 열심도 나단 선지자를 통해 고침을 받았고, 심지어 죽기 직전 인구조사를 하는 죄를 범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을 때도 그는 은혜로 받아 들였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단 하나도 쉽고 가볍게 넘어갈 성질의 것은 없었다. 우리 같은 범인은 평생에 한 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사건을 그는 매일 만나고 겪었다. 한 번의 사건만으로도 우리의 영적인 능력이 소진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단했다. 한 번도 그의 영혼이 메말라 탈진해 버린 적이 없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뼈가 마를 만큼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는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한 사건으로 인해 좌절되거나 최소한 다음 사건을 감당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주저 앉아 있지는 않았다. 놀랄만한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인내의 인생이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찾으면 찾을수록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맛 보았기 때문에 또 찾고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방에 막히는 경험을 매번 했기에 매번 하늘만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 주셨다. 다윗이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시편의 후반에 결론지어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30,31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34,35절)
우리의 삶이 다윗 만큼 군급한가? 한 두 번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전 평생을 걸쳐 생사의 기로에 서서 보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찾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영적 에너지가 과연 그처럼 끊임 없이 솟아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아홉 번 이상 부를 정도로 찬양하겠는가? 미사여구는 그 보다 더 길게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모든 상황에서 각기 다른 은혜와 권능의 체험을 생생하게 겪고 기억해 내고 입술로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겠는가? 지금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이 다윗이 겪은 가장 작은 시련보다도 더 크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다윗은 평생을 쉬지 않고 고난을 겪었어도 하나님의 보호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다윗이 그 많은 고난 가운데도 한 번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가운데 살았다면 우리 이 보잘 것 없이 작은 고난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나님이 작은 고난에는 은혜를 작게 주고 큰 고난에는 큰 능력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법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동일하게 인간이 감히 감당조차 못할 정도로 크고 넘친다. 우리 고난들이 다윗이 겪은 것보다 하나라도 더 중하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단 한마디의 불평도 꺼낼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밤새 침상을 눈물로 적셔 본 적이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붕어가 낚시 미끼에 걸리는 이유는 기억력이 기껏해야 3초 이상 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몇 번 건드려 보다가 진짜 먹이가 아닌 줄 알아도 다시 돌아 오면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 기억력이 나쁘면 삶이 고달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산을 잊거나 지갑을 잃어버리면 처음부터 우산을 들고 나갔던 장소부터 훑어서 왔던 길을 다시 가야 한다. 무슨 일을 할까 잊으면 처음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정했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생활의 기억력이 나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이 신앙 생활에서 기억력이 나빠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없으면 매번 새로운 시련이고 고난이다. 그 종류와 질,양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꼭 태어나서 시련이라고는 처음 겪는 것 같이 그 시련을 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과거에 어떤 시련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으니 신앙으로 이겨내는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이전에 겪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새 고통을 분석, 이해, 판단, 인내, 소망, 간구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신앙기억력이 나쁜 신자는 무슨 일만 생기면 당장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주위에 전문가를 찾아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강구한다. 그래도 별 수 없으면 항상 하던 대로 새벽기도에 출석하기 시작한다. 울고 불고 떼를 쓰다가 어쩌다 해결이 되면 금방 얼굴 색이 180도로 바뀐다. 언제 하나님을 찾은 양 또 잊어 먹는다. 그런데 환난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으니 큰 일이다. 또 다른 일이 생기면 또 똑 같은 절차를 거친다. 새벽기도에 나왔다 안 나왔다 하니까 그런 신자를 보면 목사는 또 급한 일이 생겼구나 가슴이 철렁한다. 한 번이라도 느긋하게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기쁨으로 간구하는 법이 없다.
다윗이 9번씩이나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 때마다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이지만, 다윗 쪽에서 보면 그 만큼 신앙의 기억력이 좋았다는 뜻이다.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눈도 깜짝 하지 않을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근거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 기억력이 좋았다는 것이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무심코 그냥 넘겨 버리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한다. 넘치고도 풍성한 은혜를 발견하지 않고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무리 하지 않는다. 신자의 실력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슨 일에나 풍성하게 넘치고 단지 그것을 볼 줄 아는 시력이 트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시력은 신앙의 기억력이 좋은 자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모두 다윗처럼 이 땅에서 9번 아니라 90번 900번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천국에 가서 최상급의 찬양을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받은 복을 헤아려 보고 감사하고 찬양하자.
그렇네요.
마찮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기억력이 나쁘면....ㅋㅋ
천국에서 최~~상~~급의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기를
이 땅에서부터 연습하고 훈련하도록 도우시는 손길에
감사밖에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