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04
동독을 방문한 미국 작가
미국 작가 필립 훅이라는 분이 자유화 되기 전 공산 동독의 베를린을 방문해 그곳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여행,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가 전혀 없고 심지어 마음대로 거주 이전도 못하는 그들을 보니 참으로 불쌍하게 여겨졌다. 물질적으로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이 부족하고 기껏 있어도 품질이 너무 천박해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세계에서 최고로 풍족하게 살면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 받고 모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미국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가슴이 메였고 반면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선 저절로 감사가 솟구쳤다.
그러나 조금씩 대화를 진행해 가며 그들의 삶을 더 깊이 관찰해 보자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차츰 자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실제로는 그들이 오히려 자기보다 더 자유로웠다. 동독 청년들은 물질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일상 생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그에 대한 기대는 아예 포기해 버린 대신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남북한이 공식적으로 상호 교류를 시작한 것이 제 3공화국 말기로 벌써 근 30여년이 흘렀다.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이 풍족하고 자유로운 서울을 한 번 다녀가면 저들의 폐쇄된 사고가 바뀌고 북한 정권이 금방 뒤집힐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없으며 오히려 공산 독재 체제는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사실 여부는 알 길 없지만 남북 교류의 초창기 시절에 서울을 구경한 북한의 한 고위 관리가 “한 마디로 썩었군 썩었어”라고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반면에 한 때 북한의 평양이 미국과 구라파의 부자들이 찾는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로 뽑힌 적도 있었다. 공해와 문명의 소음이 없고 시간에 재촉 당하는 복잡한 일정으로부터 탈출하여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떡으로만은 절대 살 수 없다. 그렇다고 단순히 세상을 포기한다고 해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세상 속에서 주위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오직 세상과 사람을 진정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대하는 길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과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세속적 욕심의 충족과 자기 증명을 위한 치장을 위해 세상에 있는 것과 사람의 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사람들 그 자체와 그것들이 나와 맺는 관계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할만한 고귀한 가치와 의미를 세상과 사람에게서 분명히 발견해야 한다.
간혹 자유롭게 되기 위해 세상과 사람의 관계를 가능한 끊어 버리려는 자가 있다. 세상과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얽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자는 차라리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다. 자기가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자 하는 대상이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이만한 이기심이 따로 없다. 나아가 그들은 자유롭다 착각할지 모르지만 소유를 버리고 항상 절제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얽매임이 될 수 있다.
동독 청년들이 정신적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세상살이를 아예 포기하고 혼자서 절해 고도에 들어 갔거나 독재에 항거하여 완전한 무저항주의로 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 고생스럽게 살았지만 자기들의 힘든 삶 자체를 귀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삶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히 살았다.
사랑의 출발은 다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의지를 동원해 항상 낙관적,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남에게 모든 것을 베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꾸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려 해서 그렇다. 아무 이해 타산을 따지지 않고 상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잘해 주려 노력한다. 세상을 보라. 그 속에 과연 정말 사랑할 만한 것만 있는가? 이웃을 보라. 얼마나 꼴불견에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많은가?
신자가 사랑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먼저 내 속에서부터 아름답고 성스러운 마음이 생성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내면이 감정적으로 그럴 수 없이 은혜로운 상태가 되고 영적으로도 신령하고 온전한 믿음 위에 서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선 백이면 백 다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의 본질은 훨씬 다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성적이고 의지적이다. 일상적 감정 상태로는 남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억지로라도 사랑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랑은 오직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만 출발할 수 있다. 이것 외의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어떤 사랑의 시도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내 쪽에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충만해져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어 사랑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이란 나의 내면을 고상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장 먼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상대를 용납할 수 없는데도 무조건 사랑하려 하거나 내가 사랑할 태세가 되어 사랑하려 해선 일시적, 간헐적으로는 성공할지 몰라도 절대 계속해서 참 사랑을 할 수 없다.
연애할 때의 상태를 생각해보라.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들여 주었지 않는가? 곰보면 어떻고 째보인들 상관했는가? 내가 상대를 변화시키려 노력한 적은 없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오케이였다. 상대는 자기 일상적 모습 그대로 기분에 따라 행동 했어도 내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사랑으로 다함이 없다. 더 이상 채워 넣을 것이 따로 없는 최고로 고상하고 거룩한 사랑이다. 점수로 치면 완전히100점 만점(Perfect Score)이다. 대신에 인간이 하는 사랑은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워도 하나님의 그것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 그래서 흔히 사랑에는 질적 차이가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이란 완전하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점수로 10점짜리, 30점 짜리, 90점짜리 식으로 나눠지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오직 100점이라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이자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조건이 붙어 있으면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미련과 욕심이 남아 다 베풀지 않으면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랑에는 완전한 사랑인 진짜 사랑과 불완전한 사랑인 가짜 사랑 둘 뿐이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지는가?
주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다. 기독교 교리를 공부해 그 가르침 대로 경건하고 고상하게 살면 자유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상과 신념과 철학을 아무리 최고 고상한 경지로 끌어 올린다고 해서 물질에 대한 욕심과 모순된 인간 관계의 상처를 완전하게 초월할 수는 없다.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실된 관계를 맺는 길 뿐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신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결실된 모습일 뿐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은 그 보다 훨씬 이전 상태에 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시고 용납해 주셨기에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죄인 된 인간 심지어 원수 된 자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출발이자 핵심이었다.
주님은 인간더러 변화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억지로 바꾸지도 않으셨다. 우리를 있는 상태 그대로 인정하셨을 뿐이다. 십자가를 도덕적, 종교적으로 거창하게 희생이나 자비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완벽하게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또 참 사랑이기에 당연히 십자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과 사람 쪽에 사랑할 만한 구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 세상은 죄악과 악령이 설치며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 찬 곳임을 받아 들여라.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의심하고 불만을 가지면 세상은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의 고난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까지는 동일한 모습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도 하나님은 의인을 감찰하시고 당신의 뜻과 목적은 반드시 이루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비록 세상이 겉으로는 더럽고 추해 보여도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생명력이 미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음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의로운 자녀들을 통해 세상을 향한 당신만의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세상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 절대 자신의 명철만으로 세상을 미워하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
또 언뜻 주위를 둘러 보면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혈연 관계라 별다른 노력하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집안 식구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자꾸 상대에게서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을 찾거나 내가 무조건 참고 희생하고자 해서 그렇다.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참아 넘겨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가치는 오직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다. 극도로 제한된 시공간에서 찌지고 볶으며 살아야 할 인간은 하나 같이 연약하고 불쌍하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서로 상처와 사랑을 교대로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한다.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산 속으로 고고하게 은거하면 혹시 혼자선 자유로워질지 몰라도 세상과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는 없다.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비겁하게 회피한 것이다..
사랑스럽지도 않은데 상대를 변화 시켜가며 억지로 사랑해보려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다. 상대의 잘못이 있어도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대해야지 노력하는 것도 나를 변화시키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상대나 나나 하나님의 참 사랑 없이는 똑 같이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이 예수를 믿어 찬양하고 기도하면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실현된 사랑의 진리를 알기 때문에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숭고하게 생명까지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모순과 잘못 투성이인 세상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사랑할만한 구석이 단 하나 없음에도 용서하셨던 주님과 동일한 출발점에 서서 그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이 길 외에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어느 시대 어디에도 없다.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보면서 알고 있는 것들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스크롤을 내릴 수록 기존에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과 달리 다가옵니다. 이웃사랑이, 사랑실천이 어렵다고 느껴질때마다 주님의 참사랑이 어떠했는지 망각할때마다 이글을 되읽으며 언젠가 저도 온전히 주님 닮은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