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아버지 갈증(Father Hunger)
로버트 맥기라는 심리학자가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버지에 대한 갈증(Father Hunger)”이 있다고 분석했다. 정말 자상하고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며 자기 삶의 모범과 기준으로 삼을 만큼 의로워 존경할 만 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가 되는 그런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참 흥미로운 분석인 것 같다. 세상의 어머니는 누구나 다 좋다. 나쁜 어머니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아버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너무 엄했거나, 술주정뱅이 폭군 아버지였을 수 있고, 무능력해 전혀 의지가 안 되고 어려서부터 자식들 고생만 시킨 경우도 있고, 심지어 가족을 내팽개치고 딴 살림 차린 아버지도 많다. 반면에 어떤 어려운 일이 발생해도 자식 곁에 진정한 사랑으로 끝까지 남아 있는 쪽은 항상 어머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꼭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자식을 사랑한다고 쉽게 단정해선 안 된다. 어머니는 직접 자기 배가 아파 자식을 낳았고 집안에서 항상 아이와 부닥치며 양육하는 것이 주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세상에 나가 사회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히 그럴 수 있다. 자식을 양육함에 있어 서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지 아버지가 더 나쁘고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가정을 가지게 하신 섭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미국에 처음 와서 고속도로 휴게실 같은 곳의 남자 변소에 아기 기저귀 가는 선반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여자 변소에도 있는지 안 들어가 봐서 모르지만 미국 남자들이 한국 남자보다 더 자상한가 아니면 모두 공처가인가 의아해 했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의 젊은 부부도 아빠가 목욕시키고 기저귀 갈고 다 한다. 아이들도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너무 엄하고 무서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좀 더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과 기대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절대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심지어 아빠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신자가 기도할 때에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고 실제 기도할 때에 우리 모두 그렇게 부른다. 그럼 기도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로 생각하며 기도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기독교 특유의 종교적 호칭으로만 간주하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에 여러분은 어떤 형상, 특성, 성격을 연상하는가? 여전히 너무 완고하여 잘못하면 벌만 주는 아버지인가? 아니면 요즘 식으로 기저귀까지 갈아 주는 아버지인가?
아마 거의 모두 후자의 이미지를 떠 올릴 것이며 그렇게 된 배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때문일 것이다.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고 언제 어떤 모습에 처해 있든 받아 주시며 무한한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감싸 안아 주시며 무엇이든 간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정답으로 갖고 있다.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100점 만점으로 치면 50점도 채 안될 수 있다. 예수님의 복음을 너무 사랑 중심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버지로 부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어머니’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하나님마저 요즘 풍조를 닮아 여성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당기는 손자
십자가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 각자 한 사람을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제가 “우리를 대신해”라고 하지 않고 “각자를 대신해”라고 말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셔야 한다. 단순하게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하면 모든 인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하셨다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만을 뜻하고 또 그렇게만 이해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을 그 교리를 배우고 이해하여 스스로 수긍하고 동의하여 믿기로 결단 내리고 교회에 나와 열심히 신앙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국한시키기 쉽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 무더기로 몽땅 바겐 세일하듯이 누구나 용서하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신자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볼 때 십자가에 수십 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행동으로 지은 윤리적 죄 몇 가지를 가지고 나와 용서 받는 정도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것으론 신앙을 갖게 된 것조차 전혀 아니며 기독교와도 완전히 무관하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의 육신, 지정의, 영혼을 다 합친 전 인격체, 전 존재가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내 세우고 자랑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오직 썩고 추하고 더러운 냄새가 진동하는 버러지 같은 자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곤 형벌뿐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무슨 수를 써도 피할 길이 없었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빠져 나갈 수 없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 죽음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려 감당하심으로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자기 전인격을 걸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 싸구려가 아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 준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절망과 죽음과 끝이었다는 절실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깨달음만이 아니라 실제로 앞뒤 분간이 안 되는 흑암 속에서 눌리고 메여 있었고 죄악과 사단과 사망과 짝하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빛과 의와 거룩과 생명의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개인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마치 완전히 칠흑 같이 어두워 향방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터널 같은 삶을 살다가 그 터널에서 벗어나 광명 속으로 나오면서 “휴우! 이젠 살았구나”라는 자기 전 존재를 건 안도감, 평강함, 자유함이 있는 새 인생을 시작하여야 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터널 같았던 옛 생활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중생 이후에도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의 기쁨이자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혹시 죄를 짓더라도 무조건 용서해주시겠지 하는 뻔뻔한 마음을 갖고 교회 나와선 안 된다. 십자가의 용서를 마치 할아버지 수염을 아무리 잡아 당겨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알아 챈 손자의 응석처럼, 아무 때나 어떤 모습이라도 받아 주시는 그런 종류로 오해해선 안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괴로워 하고 회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심령이 죄 자체를 죽기 보다 싫어하는 것으로 바뀌고 죄와 피 흘리기 까지 싸워 이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야 한다.
신앙생활을 실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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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런 기쁨과 감격이 없이 승리하지 못하고 맥이 빠지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이자, 어쩌면 그 원인의 전부가 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이 십자가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중생하는 체험을 겪을 때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충만한 감격을 누려놓고는 갈수록 그것이 퇴색되거나 망각되버린다. 예수님의 죽음은 잊어버리고 부활만 생각한다. 참으로 아이러니칼 하게도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신앙 생활을 실패케 하는 첫째 원인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분명히 사랑이시다.(요일4:8) 그러나 기저귀까지 갈아주는 아버지처럼 너무 사랑 일변도로만 생각해 버리면 우리 믿음이 필연적으로 힘을 잃고 기쁨이 상실되는 결과가 따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당당히 아버지 혹은 아빠로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그에 걸 맞는 대접을 신자에게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모든 신앙 생활의 밑바탕에 끊임없이 흐르는 본심이 되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만한 특별한 관계에 들어섰으니 이제 특별한 대접을 받겠다고 덤빈다. 이는 아주 잘못이다.
요한 복음 6:31-33으로 가보자. “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다시 그런 떡을 달라고 요구했다. 모세 때에 자기들의 선조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같은 떡을 주되 34절에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듯이 매일 달라고 한다. 만나처럼 자기들은 노력도 하지 않고 하늘에서 뚝딱하고 내려 와 입에다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 백성이니까 특별 대우를 해주어 매일 먹고 사는 문제만은 걱정 없도록 해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흔쾌히 오케이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므로 매일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없게 해주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로 온 여러분 모두 그러한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신앙 생활 20년의 영원히 풀리지 않는 딜레마다. 습관적으로 마지 못해 되풀이 되는 교회 생활이자 메마르고 풀 죽은 삶이 된지 이미 오래다. 완전히 예수님 약속 따로, 우리 믿음 따로다.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사이다.
저와 아주 가까운 분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셨는데 그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여름 방학 중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도보로 서울서 대전까지 걸어가는 여행을 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발은 여러 번 불어 터지면서 몇 주가 걸린 일종의 극기 훈련이었다. 하나님이 신자와 ‘아버지와 그 자녀의 관계’로 맺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하고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길 가다 목이 타면 시골의 구멍가게에 들어가 사이다를 한 병 사서 나눠 마시는 관계다. 같이 피곤하고 발이 불어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업고도 대전까지 갈 수 있고 아니면 택시를 불러 타고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신자의 고난 가운데 묵묵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당신의 발이 불어 터거나 얼굴이 타지는 않지만 신자를 가만히 지켜 보셔야만 하는 그분의 심령은 타 들어가신다. 능력이 모자라 당장 구원하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59:1)
그러나 그 사이다 한 병은 지금껏 마셨던 어떤 음료보다 더 시원하며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사이다다.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어려울 때 더욱 곁에 함께 해주시는 아버지와 같이 나눠 마시기 때문이며 하루 종일 메마른 길을 걷고 난 이후라 더 달다. 그들이 포장도 안 된 시골 길을 걷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꽁보리밥에 된장찌개, 열무김치를 고추장과 함께 버무려 나눠 먹는 그 맛을 한 번 상상이라도 해 보라. 얼마나 꿀 맛이겠는가?
물론 간혹 너무 힘들어 깨끗한 여관이나 화려한 호텔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며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고 단 잠을 청한 날도 있었을 것이고, 또 다른 날은 다 떨어진 여인숙에서 모기 떼에 뜯겨 가며 밤새 설친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아이 평생에 그 때만큼 행복했던 때도, 또 아버지와 그만큼 친밀하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했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는 분명히 아주 특별한 관계다. 하나님에게 신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살만큼 소중하고 천하를 다 주고 그 영혼을 건질 만큼 귀한 존재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만, 수백만 배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신자를 다루는 섭리와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은 특별한 대우를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취급을 하신다. 영어로 따지면 ‘Special ‘한 관계가 아니라 ‘Unique’한 사이다. 특별한 대우는 아주 특별하게 귀한 손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손님, 격이 높은 손님에게 하는 대접으로 식사는 요정, 차는 리무진, 숙박은 최고급 호텔로 모시는 것이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특별 대우다. 그러나 그런 특별 대우는 사실 속을 뒤집어 보면 서로가 무엇인가 그런 대접을 통해 찾아 먹을 이익과 지켜야 할 체면이 최고 목표이지 그 안에 진정한 사랑과 섬김은 없다. 정말 친한 친구들끼리는 호텔가서 스테이크 썰지 않는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면 족하다. 만약 부모가 자식을 끼니마다 호텔 부페에 데려가서 먹인다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망치게 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 그런 대접만 받고 자란 자식은 거의다 망한다.
여러분이 아까 예를 든 그 아버지보다 더 자식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야 없겠지만 오직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여 그런 고된 훈련을 감히 시킬 수 있는 부모는 별로 없다. 놀라지 말라. 그 아버지는 몇 대 독자였고 그 아이는 집안의 장손이었다. 얼마나 자식을 사랑했으면 그런 훈련을 시켰겠는가? 훈련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참으로 깊은 속내에 아들과의 관계를 이제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완전히 새로운 차원, 진실된 모습으로 바꾸려는 뜻이 없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관계
독특한(Unique) 취급은 특별한 취급과는 다르다. 일대일의 둘 만이 아는 관계, 제 3자가 전혀 알 수도 없고 짐작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동안에 그 부자간에 일어난 숱한 일들은 도저히 남이 알 수 없다. 세상의 어떤 다른 사람, 사건, 힘이 그 둘 사이에 개입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서로 간에 아무 허물과 격의가 없기에 보리밥에 된장 찌게, 집은 침실 하나 겨우 있는 반지하 아파트, 차는 지하철을 함께 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진정한 사랑과 보살핌과 영혼의 교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이렇게 취급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를 바라는 것은 오직 보상과 응답에만 관심이 있는 신자다. 왜 호텔의 스테이크나 벤즈를 안 주시는가 만이 항상 불만이다. 독특한 취급이란 오직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신자가 구하는 대상과 신앙 생활의 모든 초점이 달라진다. 어떤 이야기든 함께 나눌 수 있고 둘이서 만 통하는 비밀이 있기에 대화가 되며 또 바로 그것 때문에라도 다른 사람과는 대화가 안 된다. 이제 둘은 서로 주고 받는 대상과 내용물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이든 함께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그 관계에 모든 초점이 모아진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사이를 끊을 수 없으며 나아가 그 사람이 아니면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도저히 없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라는 주님의 뜻이다. 또 그런 관계로 들어가는 길은 기도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테이크와 벤즈 만 구한다면 바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올바른 기도이며 그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신자와 하나님 두 사람만의 독특하고도 깊은 관계로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자와 하나님은 아까도 얘기 했듯이 아주 특별한 관계다. 꽁보리밥에 된장 찌게도 나눠 먹는 그런 특별한 사이다.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는 무조건 가난하고 검소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된장찌개를 먹든 스테이크를 먹든 그 음식의 종류로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뜻에서 특별한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완전히 절대적으로 서로 신뢰하는 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사랑한다, 믿는다, 약속한다, 보증한다, 미안하다” 등의 한마디 말이 전혀 필요 없다. 서로 믿고 사랑하는데 단 한치의 틈새도 없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의심도 없다.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말 한마디 없이 불쑥 찾아가도 언제든지 반갑게 맞아 줄 수 있는 사이다.
요한 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이 만나를 매일 먹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에 예수님이 사실은 그러마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분명히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떡 자체를 주신다고는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신이 떡이고 생명이니 자기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의 모든 갈급함과 주림을 채워 주시되 그 분만의 독특한 방법과 때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만나 같은 떡도 간혹 주실 때 있지만 안 주실 때도 당연히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인류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신자로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개인을 대신해 죽으셨다는 중생의 체험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과 일대일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신자를 독특한 관계를 맺자고 초대한 것이다.
서두에 예를 든 로버트 맥기의 “아버지 갈증(Father Hunger)”의 근본적인 뜻도 사실은 육신적인 아버지의 이상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구세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갈증이다. 우리 심령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죄 사함에 대한 소원과 영원에 대한 사모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은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인간이 참 인간다워질 수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고 있다는 의미다. 피조물이 갖는 창조주에 대한 그리움이다. 자기의 근원과 출발을 찾아 뿌리를 캐 나가는 작업이다. 평생을 두고 풀어야 하고 채워야 하는 구원의 숙제다. 바로 그 아버지에 대한 갈증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정답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얻었고 주께로 나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게 된 것이다.
영원 속에 정지된 시간
자식을 여럿 둔 부모는 그 자식을 각각 따로 일대일로 사랑한다. 형제간에 서로 모르게 따로따로 사랑하는 일이 더 많다. 그러나 절대 형제에 따라 사랑하는 정도가 다르고 차별 대우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은 없다. 그러나 열 손가락의 굵기와 모양과 길이는 다 다르다. 부모와 자기와 관계를 형과 아우가 모를 수 있고 형과 아버지, 아우와 아버지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를 때도 많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차별 대우 받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버지 쪽에선 그 나눠주는 사랑은 누구에게나 한결 같다. 어떤 면에선 꼭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힘들어 하고 골치 썩이는 자식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대한다. 세계 60억명의 인구 모두 지문과 DNA 같은 자 하나 없다. 지금 당대뿐 아니라 전 역사를 통틀어, 앞으로 이 땅이 살아 숨쉬는 동안 태어날 수도 없는 그 세대 가운데도 나와 똑 같은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바닷가의 모래 알 같이 셀 수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은 일일이 한 사람씩 무한한 자비와 긍휼로 상대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그 순간은 전 인류 역사 아니 우주의 전 시간을 통틀어 똑 같은 순간이라곤 단 한 번도 없다. 영원 속에 잠시 정지된 하나님과 나만의 만남이다. 힘들고 지쳐 정말 개미만도 못한 누더기 같은 한 인생이 무릎 꿇고 엎드려 있는 바로 그곳에 우주의 근원과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와 계시고 우리의 한숨을 듣고 눈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너무나도 엄청난 은혜 가운데 잠길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에 보혈을 흘리셨다는 것 외는 아무 것도 없다.
또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기저귀까지 갈아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절대 우리를 평생 기저귀만 차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기저귀를 안 갈아 주실 때가 훨씬 많고 믿음이 깊어질수록 아예 갈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다. 하나님에게 특별한 취급을 기대해선 절대 믿음이 자라지 않고 신앙 생활에 힘이 없고 승리를 맛 볼 수 없다. 예수님 당신과 비밀스런 관계를 쌓아 나가야 한다. 꽁보리밥을 나눠 먹는 그 큰 은혜와 사랑과 권능을 맛 보아야 하고 그런 감격을 소원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서울서 대전까지 주홍 카펫 깔아 놓고 리무진으로 모시고 가는 법이 없다. 역사상 그런 대접을 받은 성도도 단 한 사람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대접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다. 대신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고 이 땅에 주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비춘 믿음의 선진들 치고 생명이 오락가락할 만큼 불 같은 시험과 연단을 거치지 않은 자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큰 일을 맡기는 자일수록 그 인생은 고달프다.
성도들이 자꾸 돈 달라, 벤즈 달라 기도하는 것은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돈을 가지고 오로지 자기 일을 하겠다는 욕심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킬지 거기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번 이일을 성공시킬 만큼의 돈만 주시면 두 번 다시 귀찮게 굴지 않겠습니다”라고 공갈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가? 삼척동자라도 그 답은 알 수 있다.
재벌 회장 같은 특별한 아버지는 혹시 그런 요구도 들어줄지 모른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터벅터벅 함께 걸어가 주실 뿐이다. 포장 길이든, 자갈 길이든, 황토 길이든, 강과 계곡이 가로막든 오늘도 내일도 성도의 신발이 헤어지고 발이 부르터도 그 당장에 택시를 불러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칠 때마다 돌아 서면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띄고 바로 곁에 서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실수로라도 못 보는 경우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기만 한다면 말이다.
여러분은 과연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와 주님 제가 왔습니다라고 할 때에 주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지금 그 분과 정말 독특하고 신비하며 비밀스런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직도 확신이 없는가? 육신의 아버지라도 찾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물며 천부께서 그럴 수는 더더구나 없지 않는가?.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독특한 관계다. 그 이상 요구하는 것은 탐심이자 우상 숭배일 뿐이며 실현도 되지 않는다. 아버지 하나님은 신자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언제든 이 세상에서 제일 시원하고 달고 맛있는 사이다를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루 종일 메마른 땅을 걷고 난 후에는 꽁보리밥에 된장을 미리 준비해 놓고 식탁에서 말 없이 기다리고 계신다. 이 감격을 소원하는가? 그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는가? 또 그것만으로 다윗 같이 내 잔이 차고도 넘친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