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너무나 허무한 이유

조회 수 2165 추천 수 133 2009.10.03 14: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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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너무나 허무한 이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傳導者)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1:1-4)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제로

전도서를 기록한 자는 본문에 나와 있듯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아주 지혜로워 이스라엘을 역사상 가장 부강하게 만들었던 왕입니다. 성경은 보좌를 상아로 만들어 정금으로 입혔고, 궁전 기물은 전부 금으로 만들어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으며, 그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왕상10:14-29) 세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그가 지금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에는 영어의 better, best 같은 비교급과 최상급식 표현이 없습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면 더 세다는 비교급, 세 번 반복하면 최고로 세다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헛되다는 말을 몇 번 했습니까? 무려 다섯 번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은 오직 헛된 것으로만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되다고 했습니다. 해 아래라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천진난만하게 요람에 누워있는 갓난아기 때부터 수명을 다해 땅 속에 묻히는 순간까지 어느 한 순간도 헛되지 않은 순간이 없으며 또 그 일생에 했던 모든 수고가 다 허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쾌락을 다 즐겨 봐도 온전한 만족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금으로 만든 기명들을 무덤까지 들고 가지 못해서입니까? 후비가 칠백이요 빈장이 삼백인데도 참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혹은 그 많은 왕비들에게서 난 아들들 가운데 자기가 일궈놓은 위업을 계승발전 시킬만한 영민한 왕자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까? (실제로 그가 죽자 왕권다툼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두 쪽이 났습니다.)

물론 그런 이유들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話者)의 생각을 독자(讀者)가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고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 나고 죽는 일을 계속 되풀이 하는 동안에도 땅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전(以前) 세대(世代)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11절)고 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전 세대를 후대가 어지간해선 기억해주지 않으니 너무나 허무하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말한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해 아래서 한 모든 수고 자체가 전혀 의미나 가치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도록 일해 열매를 맺어도 죽고 나면 그 열매를 자신은 누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살아남아 그 열매를 영원토록 누리겠다는 소원과 열심을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오는 세대에 큰 유익을 남겨 주고 떠나는 것도 분명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단지 자기가 죽으면 이 땅의 인생에서의 의미와 가치는 자기에게 더 이상 남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한탄입니다.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인생에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겨도 막상 인생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죽음은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과제 중에 마지막 하나 뭇 풀고 마친다고 99.9% 성공한 인생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인생이  헛되다는 탄식을 다섯 번이나 반복한 까닭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모든 수고가 죽음을 극복하는 데는 전혀 무력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99.9%의 수고가 마지막 남은 0.1%의 문제조차 해결치 못했으니까 그 0.1%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또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나면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요람에서부터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언제 어디를 가나 항상 따라 다닙니다. 매일 매순간으로 따져도 인간을 가로막는 궁극적인 장벽은 죽음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일 뿐입니다. 살아갈수록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뿐입니다.

결국 죽음은 인생에서 최후의 과제가 아니라 출생부터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기에 최초의 문제이자 항상 있는 문제입니다. 거기다 계속 미제(未濟)로 남아 있기에 헛되다는 고백이 절로 다섯 번이나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보려는 두 가지 방안

최근 이전보다 수명이 많이 늘고 솔로몬 같은 왕족이 아니라도 그가 누린 것보다 더 양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반드시 넘어야만 할 마지막 장벽입니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죽음에 대한 해결책들을 가만히 따져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집약 됩니다.  

첫째 부류는 아무리 죽음이 앞을 가로 막아도 이 땅에 사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려는 자세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최대한 풍성하고 화려하고 재미있게 살려고 합니다. 이는 좋은 일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정말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물질의 풍요와 안락만을 구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취미와 선호를 충족함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는 성취감으로, 혹은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가치 있는 일에 봉사하는 충만감으로 자기 인생을 풍성하게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이런 인생의 자세는 노년에 갈수록, 그것도 자신의 뜻대로 다 이뤄져도 허무감이 더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국 최고의 S 재벌의 L 회장이 죽기 직전에 그렇게 허무하다고 발버둥 쳤다는 일화가 전해지지 않습니까?

본문의 솔로몬의 고백도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정말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대로 양껏 살았고, 목표했던 일도 다 이루었고,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모든 열심을 다해 살았습니다. 성전과 왕궁을 지었고 왕국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들을 서로 차지하려는 두 엄마의 재판에서 보듯이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린 성군이었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솔로몬처럼 또 그 재벌 회장처럼 자기 목표를 다 이루면서 사회에도 큰 업적을 남길 만큼 인생을 보람차게 살 수 있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설령 그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말년에 이 두 사람처럼 헛되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자신이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답은 ‘No'일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적은 일에 자족하며 검소하게 살았던 인생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 고백이 백 프로 진심인지는 의심 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보지 않았던 자는 단 한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진짜로 더 허무해지기에 어쩔 수 없이 인생에 만족하는 척하는 눈물겨운 몸부림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선 몰라도 심령 깊숙한 내면에서 솔로몬 같은 실토를 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숙제를 해결하는 두 번째 부류는 아예 처음부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치부하는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어차피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지은 바탕 위에 사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도 죽음은 뛰어 넘을 수 없고 아무리 보람차게 살아 보려 노력해도 결국은 헛된 짓이니 미리부터 그 헛됨이라도 최소한으로 줄여보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무소유나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을 삽니다. 도덕적으로 의로워지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으며 전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는 이타적인 삶도 삽니다. 아니면 아예 평생을 수도하는 사상가 내지는 종교인이 됩니다. 철학이나 종교에 귀의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현실적 문제에 묶여 평범히 사는 자들도 불가지론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가 되어서 인생의 제반 문제를 회의적, 비평적, 무가치적, 무의미적으로 그야말로 관조하며 삽니다. 어쩔 수 없이 세상 안에 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울타리 밖에서 일종의 국외자 내지 방관자가 되어서 서성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서 찌지고 볶고 사는 자들을 물질에 매인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멸시하거나 열등하게 간주합니다. 썩어빠진 까마귀들이 노는 골에 자기 같은 고상한 백로는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솔로몬의 이 한탄을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생은 헛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따져 볼 문제는 인생의 근본적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생은 아무 의미 없다고 판정 내렸으므로, 그렇게 살았던 결과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 털어 궁극적 진리를 찾아 구도했던 시도는 한 결 같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결론은 무(無)라는 한 마디도 아닌 한 글자뿐입니다. 대표적 예로 한국의 성철 큰 스님을 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법어가 한 때 회자되다가 불교계에서 급히 부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시에 지옥을 고무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문적 구도자가 아닌 불가지론적 소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 앞에선 인생에 대한 궁극적 해답 내지 가장 적절한 대책을 얻은 양 행세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결과가 허무일 뿐이라는 것을 본인은 잘 압니다. 나아가 항상 회의적으로 사느라 인생의 참된 깊은 맛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합니다. 괜스레 헛수고만 한 셈입니다.

이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헛되다고 결론짓고 살았기에 인생에서 가치와 보람이 생길 리 만무합니다. 그 결론도 당연히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구도하는 과정 자체가 보람 있었다고 말해도 열매가 없기에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그 진실은 어쨌든 헛된 것입니다. 자신을 억지로 위로해보려는 궤변일 뿐입니다.  

구도(求道) 실패의 원인

죽음의 장벽을 뛰어 넘으려는 이 두 가지 해법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지성이 덜 떨어진 것입니까? 수도하는 열성이 부족하고 사색의 깊이가 얕기 때문입니까? 겉으로 인생을 달관한 것 같아도 돌아서선 먹고 마시는 쾌락에 탐닉하여 허송세월한 것입니까? 그 모두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성, 교양, 철학, 사상, 도덕, 종교 모두 뛰어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 원인은 의외로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과제를 해결해보려 했지만 사실은 아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짐짓 외면하고 비켜갔습니다. 전자는 골치 아픈 죽음에 신경을 쏟느니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열심히 재미있게 살려 했습니다. 후자는 아예 죽음은 해결할 수 없다고 전제를 하고선 그 부정적 영향을 최대한으로 줄이려 노력했을 뿐입니다. 둘 다 죽음을 당당하게 직면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출발부터 그러하니 당연히 어떤 해결책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무병장수 약을 발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담력을 키우라는 뜻도 아닙니다. 죽음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서 그에 적합한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죽기 직전에 가서야 자기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닌 헛된 것이었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사태를 미리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뜻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땅에서의 육신적 생명의 종결입니다. 무엇보다 인간 스스로 통제 조정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시기를 연장하려는 시도조차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인간이 통제를 못하면 죽음은 인간의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당하는 당사자는 인간이지만 죽음 자체는 인간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치 아닙니까? 죽음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인생에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해 일찍 죽겠다고 자살하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는 헛된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이 정말로 헛된지 여부를 따지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당하긴 하지만 죽음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 가능성은 둘 뿐입니다. 죽음을 주관하는 진짜 주인이 따로 있든지, 아무런 조건 전제 의미 가치 없이 그냥 다 죽게 마련이든지 말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그저 우연히 왔다가 그저 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헛되다는 탄식을 다섯 번이 아니라 수백 번도 더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인생이 헛된지 아닌지 여부를 따져본 지금의 논의는 결국 어디로 귀착됩니까? 무엇과 함께 따져 봐야 합니까? 인생의 출발입니다. 인간의 탄생도 인간이 절대 통제 조정하지 못한다면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 진짜 주인이 따로 있든지 아니면 우연히 태어난 것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인생의 시작과 끝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제 삼의 존재에게, 우연도 하나의 힘이라고 가정해서,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시공간으로 전혀 제한 받지 않아 인간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세상 밖에 있는 힘입니다.

그럼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세상 안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의 장벽은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필연적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최고의 지성, 도덕, 사상, 종교를 동원해 죽음을 극복하려 노력했어도 모두가 인생이 헛되다는 고백과 함께 실패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인생에 참 의미를 부여하려면?

요컨대 솔로몬이 탄식한대로 과연 인생이 헛된 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출생과 죽음의 주관자가 따로 있는지 아니면 우연히 생긴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기원이 창조냐 진화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진화가 옳다면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며, 그전에 인생도 우연히 지내온 것이며, 아예 출생마저 우연히 이뤄진 것에 불과합니다. 우연이란 사전에 고안된 의미, 가치, 보람, 기쁨, 목적, 방향 등이 전혀 내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 뜻 없이 시작 된 인생에 인간이 아무리 어떤 의미나 목적 등을 부여하려 노력해 봐야 헛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컨대 길가다 우연히 주은 조금 이상한 모양의 돌멩이를 두고 아무리 천하제일 가는 보석이라고 우겨봐야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으며 실제로도 보석이 아닌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돌멩이로 시작되어 돌멩이로 끝날 뿐입니다. 우연히 원숭이 후손으로 이 땅에 와서 또 우연히 인간과는 다른 이상한 후손을 만들어 놓고 갈 뿐입니다.

물론 진화론자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어떤 특정한 일을 한 결과로 잠시 생긴 것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인생 자체가 즐겁고 보람 찬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일어난 좋은 일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더 화끈하고 재미있는 일이 없는지만 찾아다니게 됩니다. 자기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이미 결론지었으니까 말입니다.      

반면에 창조가 옳다면 출생과 죽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생에 대한 뜻과 계획을 알아봐야 합니다. 창조주 그분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부모이자 내 삶과 인생의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당연히 그분을 경배하며 그분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분 앞에 진정으로 겸손해져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자녀로서 육신의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창조주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바도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종교적 신념으로 창조나 진화 중에 선택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또 지금껏 말씀 드린 것이 논리적 추론이나, 철학적 사변에 그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인간이 출생하고 사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거나 우연히 일어나거나 둘 중 하나만은 때려 죽여도 엄연한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동의 수긍 확신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가 절대적 사실과 진리이면 다른 하나는 절대적 허위와 비진리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아무리 창조와 진화 중에 특정 입장을 명백히 택하려 들지 않거나, 짐짓 모르겠다고 외면 부인해도 자기 인생의 의미는 자연히 둘 중 하나의 입장에 서게 되고 또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진화는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스스로 어떤 최선의 수고와 노력을 최대한 경주해도 그 헛됨을 없앨 수는 절대 없습니다. 출발과 종말이 이미 헛되다고 전제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탄식을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인생은 너무나 보람차고 복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확정하여서 그에 적절히 대비하는 인생을 산다면 말입니다. 어떻게 죽을지 미리 정해 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영원하신 하나님 품 안에서 출발하고 종결지어야 합니다. 비록 육신은 잠시 이 땅에 머물지만 자신의 전부를 영원한 존재와 연결시켜서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럼 솔로몬의 음울한 한탄이 기쁨의 노래로 바뀔 수 있습니다. “복되고 복되며 복되고 복되니 모든 것이 복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얼마나 유익한고. 비록 땅은 영원히 있는 반면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오더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기에 영원히 복되도다.”

솔로몬도 다섯 번이나 강조한 탄식으로 시작한 전도서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3,14)

아무리 해 아래서 하는 수고가 헛되 보여도 하나님 안에선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면 은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바만 뜻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자신의 인생이 죽음으로 헛되게 끝날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에 이 땅의 인생에서 의미와 가치가 더 생긴다는 뜻입니다.  

정작 더 중요한 과제

그런데 더 중요한 과제는 정작 따로 있습니다. 이 모든 논의를 여전히 기독교의 교리로만 간주해 어디까지나 종교적 사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것은 네 신념이지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주관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과 진화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고 그러면 한 쪽 인생은 보람 찬 것이요, 다른 한 쪽은 헛된 것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음에도 불과하고 말입니다.

자신은 진화를 믿으니까 아예 하나님과 창조는 거론도 하지 말라는 반발은 그리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진화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어떤 이론이 더 과학적이고 개연성이 있는지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짓는 가치론적 선택에 해당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진화를 믿으면 아무리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상에라도 의미를 부여하려 해도 출발과 끝이 아무 의미가 없기에 그야말로 헛된 짓입니다. 비유컨대 큰 공원에 보물은 하나도 숨겨두지 않았는데도 보물찾기를 시작하여 열심히 찾다가 빈손으로 마친 것과 같습니다. 물론 보물을 찾으려 쫓아다니는 동안에는 친구들과 장난도 치며 재미있겠지만 끝내 보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공원에 보물이라곤 하나도 숨겨 놓지 않았는데 즉, 시작과 끝이 없는데 그 과정이 아무리 신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정으로 진화를 믿는다면 어떤 일에도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됩니다. 본인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릴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렇게 할 이유나 근거가 애당초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자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위선자가, 최소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됩니다. 또 종국에는 예의 재벌회장과 큰스님처럼, 러셀이나 니체 같은 불신자 사상가처럼, 해 아래서 했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과 함께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솔로몬이 내린 결론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인생은 헛되지 않다는 것이 절대 인간이 묵상, 수도, 추론, 고안해낸 종교적 사상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일생에 일일이 간섭하십니다. 개인의 출생과 죽음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와 모든 일의 선악 간을 주도하십니다.  

정말 진정으로 겸비하게 되어 하나님을 구하여 보십시오. 그분을 체험적,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각 자에게 가장 적합하며 고유하되 하나님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그 겸비한 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인생이 절대 헛되지 않음을 절감케 해줍니다. 자신이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우연한 물질적 산물이 결코 아님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갈 수 있다는 교리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구원 얻는 여러 방도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권능과 은총을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서부터 맛보고 누리는 참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모든 인간의 주인 되시는 분입니다. 출생과 죽음을 절대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겸비하게 그분 앞에 엎드려서 그분의 구원을 구해야 합니다. 그럼 자기가 그분을 알고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이미 나를 알고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해줍니다.

구원을 주시는 방식이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르기에 보편적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본인마저 구체적으로 인식하여 조리 있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이 그분을 분명히 만나서 너무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이전과는 자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은 후에 이 땅의 공과를 따져 점수만 매기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도 나의 삶과 인생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바꿔주려고 우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당신의 열심과 의지로 우리가 무릎 꿇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알기를 원하고 당신의 은혜를 구하는 겸비한 자의 기도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는 솔로몬이 전도서 서두에 토해냈던 탄식만 했던 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믿고 따르며 살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26-31)

하나님 없는 솔로몬의 영광은 하나님 있는 들풀이나 참새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자라면 더더욱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으로 덧입혀 주실 것이므로 세상의 인간적 일들에 염려를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이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있기에 인간의 본분도 반드시 그 거룩한 통치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추석

오늘 추석으로 오랜 만에 형제들이 모였습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일에 감사하고 정말 동기간의 우애를 더 아름답게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풍성한 음식이나, 부모 산소를 찾아 뵌 일이나, 형제간에 사랑을 나눈 것들이 기쁘고 보람찬 일이긴 하지만 사실은 그 일이 주는 기쁨과 보람에 그칠 뿐입니다. 추석이 끝나면 다시 복잡한 세상 일로 돌아가야 하고, 심지어 추석 연휴 가운데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추석이 주는 기쁨은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의 근본적인 만족과 기쁨과 안식과 평강과 자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새나 백합화도 열심히 생존과 번식을 위해 힘쓰지만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에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추석은 한갓 민족의 전통이요 연례적인 가족행사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추석으로 인해 형제간의 우의가 깨어지거나 세상 환난과 고통에 파묻혀 아무 의미나 기쁨은 없이 오히려 상실감과 절망으로 추석을 쉬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런 특별한 날일수록 정말 자신의 근본부터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 지낼 추석도 20 여 차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추석을 지내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경건하게 추석예배를 드려야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추석은 매년 똑 같은 모습으로 잠시 기쁘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추석 같은 기쁜 일이 생기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환난이 겹치면 추석이라도 괴로울 뿐입니다. 인간의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근본 과제가 미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당신의 먼 미래를 상정해 보십시오. 죽음에 다다랐을 때의 모습을 가정해 보십시오. 과연 해 아래서 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 하는 고백을 하지 않으리라는, 정확하게는 저절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와 권능 아래 붙잡혀 있었던 의롭고 풍성한 인생이었기에 세상에선 비록 들풀 같았어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나았다고 기꺼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죽음 이후의 영원도 그분의 의로운 손아래에 맡길 담대한 자신이 서있겠습니까?

창조가 옳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선택했다, 예수를 믿었다, 등등이 절대로 특정한 종교 사상을 수긍하여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을 헛되게 살고 치울 것인지 진짜 보람차고 기쁘게 보낼 것인지가 달린 문제입니다. 그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다 마치는 인생과,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삶을 이끄시고 나중에는 선악 간에 심판을 하실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인생 중에 어느 쪽을 살지 택하는 일입니다. 과연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미 후자를 택한 자는 영원을 바라보며 정말로 자신의 전부를 그분에게 걸고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종교적 행사나 의식으로 어영부영 끝내게 해선 절대 안 됩니다. 도덕적 반성과 수양에 그칠 문제도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했기에 죽음을 뛰어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런 죽음 이후가 이미 보장되어 있기에 이 땅에서부터 영광스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배를 이 땅에 옮겨와서 심어야 합니다. 위에 있는 모든 거룩하고 선한 것을 진정으로 사모하며 그분의 거룩함에 자신을 의탁하여 거룩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주일날 자기반성으로 그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라는 참 생명을 지닌 자는 그 참 생명이 정말로 세상 앞에 빛이 발하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아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는 자는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향방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다시 가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즉,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 중간 과정을 아무리 나름대로 성실하게 산다고 한들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요컨대 죽음의 문턱까지도 현실의 일에만 묶여 그저 흘러갈 것인지 아니면 한번 뿐인 짧은 인생에서 나라는 존재의 근본부터 다시 따져볼 것인지 결정하시라는 것입니다.      

10/3/2009 추석가족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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