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을 뒤 좇는 자는 군중 밖에 되지 못한다

조회 수 2803 추천 수 349 2005.05.11 05:23:15
미식 축구의 결승전(39th Super Bowl)이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지난 2/6(일)에 열려 패트리어츠가 이글즈를 3점차로 제압하며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슈퍼볼은 어쩌면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우리로 치면 추석)보다 미국 사람들이 일년 내내 더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다른 종목과 달리 결승전이 한 게임 승부로 끝나기 때문에 모두 손을 놓고 TV 앞에 모인다. 심지어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 중에라도 게임 스코어를 알려 주기도 하고 이날만은 교회를 빠져도 눈 감아 줄 정도다.

미국의 4대 프로 스포츠인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미식축구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미식 축구다. 포지션에 따라 날렵해야 하는 몇 사람을 빼고는 체중이 250-300파운드(약 125-175키로)가량 나가는 거구들이 육탄전으로 맞부딪치는 것이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다. 상대 진영을 향해 정교한 작전에 따라 한 칸씩 진전해 나가는 것이 인디안과 땅을 다투던 서부개척 시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거기다 워낙 게임이 격렬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게임씩 팀당 정규 시즌에 기껏 17번 밖에 게임이 없는 것도 인기를 더 보태는 요인이다. 당연히 입장료도 최하 백불이 넘을 정도로 가장 비싼데도 모든 팀의 전경기가 매진 안 되는 법이 없다.

특이한 것은 결승전에 오른 두 팀의 연고지가 아닌 제 3의 장소에서 슈퍼볼이 열린다는 것이다. 리그 소속 팀들의 연고 도시를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개최지를 정하기 때문인데 올해도 그래서 보스톤과 필라델피아와 상관 없는 잭슨빌에서 열렸다. 그런데도 비행기 삯 호텔비를 지불해가며 팀 당 몇만 명의 응원단들이 불원천리 멀다 않고 달려간다. 그야말로 승패를 떠나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슈퍼볼이 끝나면 도대체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슈퍼볼의 열기는 광적이다.

슈퍼볼이 끝나면 반드시 따르는 뒤풀이 행사가 하나 있다. 포스트 게임 쇼(Post Game Show)나 우승 축하 퍼레이드 같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메이저 게임의 결승전에는 없고 슈퍼볼에만 있는 것이다. 일년에 한 번 있는 게임이라 모든 프로를 통틀어서 TV시청률이 년 중 최고치를 기록한다. 올해도 AC Neilson사의 조사에 따르면 8천6백만 명이 넘게 시청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미국 전체 인구가 작년 7월 기준으로 2억9천3백만 명이었으니까 전국민 3-4명당 한명 꼴로, 어린이나 노인을 제외하면 성인 남자는 거의 전부 이 게임을 봤다는 뜻으로 그 열기가 광적이라고 말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세계적인 대기업들은 이 게임에 광고를 올리려고 혈안이며 시간당 광고 단가도 최고로 높다. 신제품을 소개하거나 새로운 컨셉의 광고를 선보이는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 성인 남성이 주시청자이다 보니 대개 맥주, 자동차, 크레딧회사 같은 광고주 간에 경쟁이 격심하다. 말하자면 슈퍼볼 이면에선 TV 광고의 세계적인 각축장이 열리는 셈이며 다음 날 방송국마다 어떤 새로운 광고가 가장 소비자에게 인상적이고 영향을 많이 미쳤는지 보도한다. 각 채널에선 경쟁적으로 자체적으로 선정하거나 넷티즌의 직접 투표를 받아 광고 Top-10을 발표한다.

세계 최대 맥주회사 Bud Weiser는 이 컨테스트의 단골 손님으로 항상 기발 난 아이디어로 주목을 끌곤 했는데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방송국의 인기도 조사에서 상품에 대한 설명 하나 없이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 오는 미국 군인들을 보고 공항에 있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두 일어서서 박수로 환영하는 장면만 한참 내 보낸 뒤 마지막에 Thank You!와 회사 로고만으로 자막 처리한 광고로 일등을 차지했다.

미국인들은 굉장히 개혁적일 것 같지만 의외로 한 번 정해 놓은 규칙을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는다. 슈퍼볼도 정해진 주일에 거행하고 개최지도 순차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며 슈퍼볼 다음날 광고 컨테스트가 이어지는 것도 수십 년째 하고 있는 연례 행사다. 가장 좋은 예로 매년 11월 첫째 화요일은 Election Day(선거일)로 정해져 있다. 경찰서 보안관부터 시작해 지방자치 단체의 단체장, 지방의회의원, 연방 상.하원 의원, 대통령까지 각기 임기가 다른 선거를 모아서 매년 이 날에 한다.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 특정 정당에 유리한 날이다, 날씨에 맞추어야 한다는 등의 논란이 있을 수가 없다. 매년 선거하다 보니 공휴일도 아니다. 직장에선 2-3시간의 외출만 허가해 줄뿐이다. 수십 년간 근본 골격이 전혀 바뀌지 않는 대학입시 제도도 또 다른 좋은 예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 선조인 유럽에 비해 역사가 짧아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전통이 없는 것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 때문이다. 경제, 군사, 정치에선 앞섰을지 몰라도 문화, 예술, 관습에선 항상 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말 보잘 것 없는 것도 반드시 기록해 두고 관련되는 물품은 아무리 허튼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 자기들 하는 일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어떤 새 일을 오랫동안 정말 빈틈 없이 계획을 세워 테스트 해보고 완벽하게 준비하여 일단 시행해본 후 별 다른 문제가 없이 잘 진행되면 하나씩 전통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계속해서 분명히 드러나는 결점만 보완하지 여간해서 그 기본구조는 안 바꾼다.

이에 반해 한국은 조변석개(朝變夕改) 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모든 행사 제도 법령을 아주 손쉽게 허물었다 새로 지었다 한다. 그래야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잘 적응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변화를 선도하는 개혁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뜯어 고친다고 해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밖에 안 된다. 귀가 얇은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 실력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다. 군중을 뒤 쫓아가다 보면 군중 속에 휩쓸리기 밖에 더 못한다.

변화를 선도해 나가려면 자기가 가진 실력이 탄탄해야 한다. 가진 실력이 많으려면 오랫동안 검증되고 실험되어진 분명한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좋은 전통이 많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꾸 바꾸기만 하면 아무리 새로운 것이 좋다 하지만 전통 자체가 생길 시간과 여유가 없지 않겠는가? 스스로 내세울만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을만한 가치 있는 전통이 얼마나 많은가가 그 사회의 건강도를 가름하는 것이지 자꾸 뜯어 고친다고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보다는 검증된 좋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가꾸는 것이 시간과 경비로만 따져도 훨씬 손쉬운 길이다.

미국민들은 당장 금년 슈퍼볼 다음날부터 내년의 슈퍼볼에 진출할 팀을 알아 맞추기 게임을 하며 일년 내내 내년 슈퍼볼을 기다릴 것이다. 내노라 하는 기업체와 광고회사마다 벌써 내년 슈퍼볼에 올릴 새로운 광고의 기획 단계에 돌입했을 것이다. 전통을 존중하되 더 소중하고 발전적으로 키워나가는 나라에게 겨우 한두 달의 형식적 조사나 지도자의 즉흥적 발상으로 맞서선 평생 가야 못 이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내년 슈퍼볼 광고 컨테스트 Top 10 리스트에 현대 자동차나 삼성 전자의 이름도 버젓하게 올라가는 것이 필자만의 헛된 꿈이련가?  
                
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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