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가 없는 미국

조회 수 2946 추천 수 341 2005.05.11 05:34:21
지금은 라스베가스가 종합 위락단지가 되어 사정이 많이 바뀌었지만 한 10년 전만해도 도박 중심 도시였다. 그래서 모든 호텔이 손님을 많이 유치하겠다는 속셈이자 도박으로 돈을 탕진한 손님들에게 일종의 서비스로 숙박과 식사를 아주 염가로 제공했다. Las Vegas Strip(한복판 중심도로) 가에 있는 어지간한 최고급 호텔도 주중의 평일 하루 숙박비가 20-30불, 뷔페식사가 5불 정도로 해결되었다. 숙식에선 심지어 손해가 나도 도박에서 많은 이익을 내면 된다는 뜻이었다.  

언젠가 연말 휴가 시즌에 예약 없이 들렀더니 호텔마다 최소 200-300불을 달라고 했다. 바가지라도 그런 바가지가 없었다. 왜 평소보다 10배 이상이나 받느냐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따졌더니 카운터에서 돌아 오는 대답은 비싸면 딴데 가보라는 식의 완전 배짱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바가지가 아니었다. 10배 정도는 바가지 축에도 안 든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는 바가지라는 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상거래가 자유화 되어 있어 당국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이민 온 첫해(1991)가 마침 일차 걸프 전쟁이 한창일 때라 그 여파로 자동차 기름 값이 계속 올랐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주유소마다 내리기 경쟁을 하더니 급기야 갤런(약3.8리터)당 약 95센트까지 내려 갔고 당시 원화 환율이 750원대로 기억하니까 한국과 비교하면 거저였다. 전쟁의 승리가 확정되고 국제 원유 시가가 안정세로 돌아서자 간선도로 사거리에 두세 개씩 몰려 있는 주유소가 옆 주유소 눈치 봐가며 거꾸로 낮추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주유소의 높다란 기둥에 달려 있는 가격표시판을 주유소 주인이 기다란 장대를 이용해 아침마다 1-2센트 씩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륙 쪽의 중소도시에 사는 동안 청과 조합에서 10불 미만에 20통 정도 담긴 박스로 배추를 사다 김치를 담그곤 했는데 하루는 30불을 달라고 했다. 주산지인 캘리포니아에 폭우가 쏟아져 제때 공급이 안 되는데 찾는 사람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몇 주 후에 다시 가니까 원래대로 10불로 내려 팔았다. 이제 날씨가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공급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한번 오른 물건값이 내리는 법이 거의 없지만 미국은 부동산 가격을 포함해서 시도 때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모든 상품 가격은 가게 주인이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알아서 부치면 된다. 휴가철에 호텔방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렵다면 그만큼 비싸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억울하면 한가한 시즌의 주중에 오면 얼마든지 싸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손님이 많이 몰리면 디스카운트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정반대다.

물론 공급이 무한정이고 대량으로 파는 것이 낫겠다 싶으면 세일도 자주 한다. 그러나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다 싶으면 말하자면 바가지 씌울 찬스가 생기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올려 버린다. 마이클 조단이 NBA에서 한창 전성기일 때 플레이오프 게임의 경우 간혹 주에 따라 불법이 아닌 암표 한 장이 이삼천 불에 팔리는 것은 예사였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고발하지 않고 메스컴은 흥미거리로 보도한다. 미국에는 바가지가 수도 없이 많지만 아무도 바가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비싸다 싶으면 싼 곳을 찾아가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대국이 된 것이 풍부한 천연 자원과 비옥한 국토 때문만은 절대 아니다. 관심 있게 이 사회를 살펴 보면 오히려 더 중요한 다른 원인이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경제에는 완전한 까막눈인 순수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분석해보면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이 자유경쟁 즉 모든 경제 활동을 경제인의 재량과 시장의 자율화 기능에 맡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말은 한국도 경제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자유 경쟁 체제가 되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자원과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었으니 자유 경쟁을 할수록 유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후진국들은 당장에 선진국들의 경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경쟁에 여러 제한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골프 시합에 핸디를 인정해 주듯이 후진국에게 한 수 접어주고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싸움 잘하는 데는 태권도, 합기도, 유도 등 어떤 무술의 유단자가 아무 소용 없고 정작 싸움의 고수는 따로 있지 않는가? 실전 가라데로 전세계의 강호를 차례대로 쓰러뜨린 최배달도 온몸을 무기로 만들어 모든 신체 부위를 다 사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게임의 룰이란 원래 동일한 게임을 할 때 그것도 체격조건이 비등한 자에게만 적용된다. 유도는 유도끼리 체급별로 할 때에 룰이 필요하지 태권도와 유도가 실제 사생결단으로 붙는 데는 아무 룰이 필요 없다.  

지금 국제 경제의 현장이 과연 유도의 체급별 경기인가 아니면 최배달식의 사생결단 싸움터인가? 그러면 어떤 전법이 가장 유리한가? 한가하게 룰 타령하고 자꾸 젖 먹는 어린아이처럼 핸디를 인정해 달라고 징징거릴 여유가 있는가? 골프에 핸디를 인정 받는 것은 처음부터 한수 수그리고 들어가는 것인데 핸디 받는 것에 익숙한 자는 평생가도 상대를 이겨내지 못한다.  

자유경쟁에선 한 마디로 실력이 없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 그 실력 안에는 가격, 기술, 품질, 디자인, 내구성, 친절, 신용, 유행, 심지어 상술, 어학 실력, 매너 등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자기가 가장 자신 있는 요소를 가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비자의 마음에 이끌림을 끌어내는 능력이 실력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이 뒤지는 것은 천연 자원 하나 뿐이고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얼마든지 실력을 갖출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자원은 오직 인적 자원뿐이다. 흔히 한국인은 잔머리 굴리는 데는 세계 최고라고 하는데 좋은 뜻으로 바꾸면 임기 응변에 능해 세계 최고의 융통성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나아가 세계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살아 남는 잡초 같은 끈기와 아침 저녁으로 별 보기 운동을 할만큼 성실성까지 갖추었다. 말하자면 타고난 싸움꾼으로서 재질은 다 갖추었다는 뜻이다. 덩치가 큰 상대와 요리조리 피해가며 싸우려면 그 좋은 머리를 사용해서 제 맘대로 날고 기도록 완전한 자유를 주어야 한다.

성경에도 어린 소년 다윗이 정식 전쟁의 룰에 따라 사울 왕의 갑옷과 창을 입고는 골리앗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몸 움직임이 둔해선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자기가 가장 자신 있는 몰매돌로 갑옷으로 가려져 있지 않는 골리앗의 정수리를 날렵하게 한 방에 명중시켜 이겼다. 우리도 고유의 강점을 가지고 날렵하게 거인들의 급소를 노리며 틈새를 파고 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이제는 한국 기업들도 정말 날고 길 재주들을 가졌고 직원들도 아주 우수해졌다. 싸움판만 제대로 붙쳐 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에선 회사 설립 절차는 회계사와 의논해서 며칠 만에 간단하게 끝낼 수 있다. 또 Tax ID(납세번호-사업자 등록증) 같은 것은 I.R.S.(Internal Revenue Service-한국으로 치면 국세청)에 심지어 인터넷이나 전화로 신고만 하면 그 즉시로 발급해 준다. 정부로선 법인 체계로  사업하면서 회계의 정확성과 투명성을 유지하고 돈 벌어 세금 내겠다고 하는데 마다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부정회계나 탈세는 나중에 천천히 따져도 되고 실제 전사회적인 시스템이 쉽게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인허가 내주는 것은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언제든지 오케이다.

망하려고 사업 시작하는 이 아무도 없으니 정부는 사업가에게 제 마음대로 춤 출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 준 후 가만 놔두는 것이 오히려 세금도 많이 걷히고 자체적으로도 경비 절감 효과가 난다는 사고방식이다. 사업 수행과 공직 수행에도 바가지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대신에 미국 정부는 부정 부패가 성행할 수 없도록 기초구조(infrastructure)를 완비시키고 사후관리만 철저히 하면 된다는 주의다.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이 아직도 정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규제를 새로 만들거나 계속 고집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규제가 많아야 기업보다 정부쪽의 재량권이 많아지고 그에 따른 부수 이익이 발생하리라는 기대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도 개발후진국 시절의 낡은 관습에 젖어 있어 혁신적인 사고의 발상을 하지 못하고 있거나…

자유 경쟁이란 선진국에게 모든 가능성을 열어 주는 단점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후진국도 모든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다. 사고를 조금만 전환해보자. 후진국이 선진국을 이기려면 모든 수를 다 써도 겨우 이길까 말까다. 그런데 스스로 온갖 규제로 자신의 수족을 묶어 놓겠다면 처음부터 져도 좋은데 선진국이 알아서 슬슬 때려 주기만을 기대한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 온지 15년이지만 한국 같으면 공적 자금으로 반드시 살려야 할 대기업들도 얼마든지 도산하거나 자율적으로 서로 인수 합병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반면에 금방 망할 것 같은 회사들도 어떻게 하든 끝까지 견디며 되살아 나는 것도 심심찮게 보았다. 델타항공사, 유나이티드 항공사, K-마트(월마트 버금가는 대형 유통사) 같은 것들이 그 좋은 예다. 무슨 수를 써더라도 정부의 간섭 없이 자기 실력으로 스스로 살아 남는다.

현재 한국에서 국제 경쟁에서 그런대로 버티는 사업이 무엇인가?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와 동남아 지역에서 한창 유행하는 한류(韓流) 아닌가? 우연찮게도 둘 다 정부의 간섭이 가장 적은 부분으로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마음껏 제 실력을 발휘한 분야가 아닌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한국 경제가 살아날 것인지 그 대답도 자명하지 않는가? 정부와 기업 둘 중에 전자의 재량권이 많을수록 후진국 반대로 후자의 재량권이 많아지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이치다.

현재 한국에서도 최고로 인기 끌고 있는 미국의 스타벅스 커피를 보라. 커피는 미국의 천연 자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물품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미류(美流)의 하나가 되었다. 일년에 반은 비가 오는 우중충한 시애틀은 시내 곳곳에 한 집 건너 커피집이다. 어려서부터 커피에 익숙하고 그 많은 커피집에서 바가지 없는 무한 경쟁에서 이겨내다 보니 세계적인 브랜드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작금 기업인들이 정부만 가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고 하는 탄식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싸움은 싸움을 많이 해본 자만이 싸움을 잘하며 또 싸움을 잘하려면 어려서부터 싸움에 닳고 닳는 수 밖에 없다. 한국이 그냥 중진국에서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겠다면 정부 선도의 규제와 보호 무역의 장벽 아래에서 버텨도 된다.

그러나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 일본이 속한 선진 7개국(G7)에 버금가는 수준이 되려면 그래서 중공과 일본에 당당하게 큰 소리 치고 독도 문제를 영구히 해결하려면 전면 자유화 말고는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실전 가라데로 싸우는데 익숙하게 만들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정말 선진국 문턱에서 평생 주저 앉아 버릴 수 있다. 절대로 시간과 국제 경제 환경이 한국만 바라보고 기다려 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4/1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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