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젊은 한국의 연예인이 자살했습니다. 채 서른 셋도 되지 않은 배우이자 가수인 박용하. 재작년인 2008년도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 그를 처음 보았는데 (정작 그를 유명하게 해준 “겨울연가”는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생김새와 풍기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 후 관심을 두고 지켜 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자살이라니. . . . 관련 기사를 훑어 보아도 그가 왜 자살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 시원한 답이 없습니다.
그 또한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는데, 근자에 들어 왜 이렇게 제 목숨을 끊는 기독 연예인들이 많은 걸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 또한 박용하의 자살 기사를 보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나랑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던가 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 왈가왈부 말고 우리의 믿음을 돌아 보자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경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의 입장에 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죽 했으면 제 목숨 제가 끊었겠습니까. 부모와 형제와 친구들이 애통해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전엔 나도, 죽을 용기로 살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삶이 더 큰 용기를 요구했을 겁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시며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셨는데, 그들 눈엔 그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물 위를 잘 걷다가 밀려 오는 파도에 와락 겁을 먹고 빠져 든 베드로처럼, 그들 눈에 여태 잘 믿고 따르던 예수님보다 그들에게 닥친 인생의 파도가 더 크고 무섭게 들어 왔나 봅니다. 그때 그들은 왜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까? 풍랑에 죽게 된 제자들이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살려 달라 애원함으로써 평안을 되찾았듯이, 그들도 그때 예수님을 찾아 살려 달라 애원했다면, 그들 생의 풍랑을 잠재워 주셨을 것이 아닌가.
아마도 매달렸을 것입니다. 감당키 어려운 이 상황 넘기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들은 실은 겉만 신자였지 속은 불신자였다고, 지옥의 자식들이었노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두신 거라 간단히 치부하고 말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요? 그들은 예수님의 응답을 듣지 못했거나 예수님의 응답에 신뢰가 부족했을 것이라고. 불신자들에게도 햇빛과 우로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설령 그들이 불신자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 손으로 제 목숨 끊을 것 뻔히 아시면서 모른 척하셨겠습니까? 분명히 말리셨을 겁니다. 타이르셨을 겁니다. 피할 길을 알려 주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귀엔 그 음성보다 죽음을 부추기는 악마의 음성이 더 크고 달콤하게 들렸던 게지요. 맞닥뜨린 풍랑이 너무 크고 심해 공포심과 절망감만이 가득했던 게지요.
얼마 전 친구가 보내준 우스개 소리가 떠오릅니다.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으나 절벽에 붙은 나뭇가지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목사가 위를 향해 살려 달라 소리를 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살려 줄 터이니 나뭇가지를 놓고 아래로 떨어지라고 대답했다. 목사는 도대체 누구신데 그런 황당한 말씀을 하시냐고 물었다. 하나님이라는 대답이 돌아 왔다. 목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기 하나님 말고 누구 다른 분 없소?!
이와 아주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 교회 다닐 때 함께 제자훈련 받던 친구가 보내준 일홥니다. 한 겨울에 홀로 암벽등반을 나선 등반가가 정상을 정복하고 아래로 내려 오는 도중에 줄이 엉켜 버렸다. 그 줄을 풀려고 애를 쓰는 동안 그만 날이 어두워져 별빛 외엔 아무런 빛도 없다. 줄은 완전히 엉켜 도무지 풀릴 가망이 없고 아래는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는 칠흑이 깔려 있다. 그는 더 내려오지 못하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는데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얼마 못 가 동사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리쳐 구원을 요청했으나 들리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뿐이다. 평생을 독실하게 하나님을 믿어 온 그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 전심을 다 해 기도를 드린다. 갑자기 머리 속에 음성이 들린다. 아들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너를 살려 줄 것이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만 하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칼을 꺼내어 네가 매달려 있는 그 줄을 끊어라 그러면 살리라. 등산가는 그 말에 다시 아래를 내려 보았다. 도대체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짙은 암흑이 가득하다. 무얼 망설이느냐, 빨리 줄을 끊지 않고. 머리 속의 음성이 재촉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손에 쥐었다. 그리곤 다시 아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짙은 암흑이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 다음날, 그곳을 찾은 등반가들은 눈덮인 지상에서 겨우 25피트 가량 떨어진 곳에 매달린 채 동사한 한 등반가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가 왜 손에 든 칼로 그 줄을 끊지 않았을까 궁금해 했다.
한창 제 신앙의 열정이 뜨겁던 무렵이었음에도 제 믿음이 이 일화 속 등반가의 믿음에 비해 낫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암만 재어 보아도 그 믿음이 제 믿음의 수준이었습니다. 크게 부끄러웠었는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부끄럽게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합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래서 응답이 왔는데, 그 응답이 내 상식을 벗어 나 있다면,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은 그대로 있다면, 아니 두려움은 더 커져 있다면, 아가리를 더 크게 벌리고 어흥 소리까지 내며 달려들고 있다면 . . .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면, 죽어 버리면, 그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하늘나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엔 아무런 근심 걱정도 고통도 눈물도 없다 했는데 . . .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죄송하지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이고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잘 돌보아 주시려니 . . .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의 믿음은 의외로 약한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을 때엔 어떤 시련이 닥쳐도 다 이겨낼 것 같은데, 막상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 혼비백산하여 머리 속이 하얘지고 두렵고 힘든 생각만이 들게 마련입니다. 기도조차 제대로 되질 않거나 또 할 힘도 없습니다.
박용하의 영혼이 예수님 품에서 위로를 받기를, 그의 가족과 친구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죽고 싶으리만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하나님께서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고, 무엇보다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다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 들을 수 있는 귀와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종의 믿음을 더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2010년 6월 30일
저는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목사님과 조금 견해를 달리 합니다. 언젠가 틈을 봐서 제 견해를 피력하겠습니다. 아무튼 자살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에 대해 오해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