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님의 “[문답]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를 읽고, 댓글로 처리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어, 별도로 올립니다. 현실교회의 고질적 치부를 터치하고 있는 질문의 속 내용이 너무 무겁기에, 사적인 견해 밝히기가 무척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용기 내어, 꾸밈없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토로해 보고자 합니다.
읽을수록 가슴 아린 이야기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체험이겠기에, 이렇게 제목 붙일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원인제공자인 목사들에게 하소연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변 성도들에게 상담해도 효과 없습니다. 교회 옮겨 봐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냥 홀로 끙끙대며 한없이 견뎌야 할 성도의 현실일 뿐입니다. 결코 해소되지 않을 성도들의 딜레마입니다.
“알아듣도록 가르쳐주고 고치도록 권면해 봐라.” “기도하며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라.”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권고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해 줘도, 이를 알아듣고 고치고 변화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변명이라도 한다면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대부분 분노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 옹호에 열 올릴 뿐입니다. 권고를 듣고 변화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결코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변의 좋은 교회 좋은 목사 찾아 옮겨보라.”
역시 비현실적인 권고입니다. 교회를 한 번이라도 옮겨 보고, 그 처절함과 쓰라림과 두려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말입니다. 또 그런 교회 그런 목사 없습니다. 없는데 옮기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허구입니다.
“전문가들의 개선책을 찾아라.”
교회개혁 관련 서적들 수십 권을 읽었습니다. 일부 공감되기도 하고 주목할 만한 제언들이 있기는 했으나, 무릎칠만한 대안은 없었습니다.
예로써, 진 에드워즈, 프랭크 바이올라, 로버트 뱅크스 등이 제안하는 ‘가정교회’는 보다 초대교회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정교회 또한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지속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제도교회에 계속 출석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가정교회란 마치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습니다.
“평신도 교회에 동참해 보라.”
인터넷을 통해 몇몇 교회들을 살펴보고, 김교신 선생이나 유영모 선생 등이 추구했던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봤습니다. 그러나 역시 온전치 못했습니다.
초대교회적 가정교회든, 평신도 교회든, 무교회주의적 교회든, 그 어떤 형식일지라도, 현대 제도교회의 대체 대안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허망하지만 솔직한 진단일 것입니다. 유대교를 개혁한 기독교의 변질과 천주교를 개혁한 개신교의 변질이라는 역사적 증거에 비추어,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14:13).
수 년 간의 방황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차라리 신앙’으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천주교와 개신교가 추구해온 신앙강령들이 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집요하게 강요했고 평신도들이 얼떨결에 수용했던 금과옥조들 말입니다. 『지도자들(신부와 목사)을 존경하고 잘 대접하라. 주일성수/새벽기도 철저히 하라.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힘에 닿도록 하라. 쓰러질만큼 봉사하라. 죽을 각오로 전도하라.』는 것 등입니다.
천주교 또는 개신교는 이것들을 죽기 살기로 준행했습니다. 목사 말은 한 마디도 거역치 않은 이, 평생 새벽기도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이, 십일조를 넘어 십이조 생활하는 이, 좁쌀 전도왕 타이틀까지 획득한 이, 등등…
참으로 어마어마한 신앙위인들이 무수히 배출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노력과 열정들이 정당한 것이었다면 천국은 이미 오래전에 만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의 교회(천주교회 포함)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라 하기 어렵습니다. 전혀 엉뚱한 것이거나 오히려 괴물에 가까운 변종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추구했던 신앙 강령들에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 강령들은 분명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학과 교리 중심주의’입니다! 신앙관심이 신학과 교리에 집중되고, 이것이 형식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외형주의’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정통 신학 및 교리를 따른다고 확신했으나 실제는 ‘자칭 정통’이라는 사상에 속아왔습니다. ‘자칭 정통’ 사상은 성경의 참 정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인간의 사고체계입니다.
천주교회/개신교회/가정교회/형제교회/평신도교회/무교회 등은 자칭 정통 신학과 교리를 기반으로 한 형식주의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외형을 중시합니다.
이제는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관심을 성경적 방향으로 변경시켜야 합니다. 지금껏 추구해 왔던 외형(신학과 교리에 기초한)을 포기하는 대신, ‘내면으로의 지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의식전환(패러다임 쉬프트)이며, 다시 ‘의식의 회개’로 발전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차라리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차라리 신앙’의 근거는 눅14:13절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껏 권장해 왔던 ‘높고 귀한 것(존재나 사물)을 향한 갈망(추종)’은 성경 원리가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반대로 ‘낮고 천한 것(존재나 사물)을 향한 관심(섬김)’이 성경의 요구라는 선언입니다.
‘차라리 신앙’이 추구하는 바는 ‘가진 자들에게 굴종하지 말고 못가진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앙’은 ‘어찌하든 강한 자의 편에 서라.’는 생존법칙 제1원리에 정반대되는 어리석은 개념입니다. 바보 같은 사고입니다. 미련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성경에 부합되는 유일한 삶의 자세입니다.
교회의 외형적 형식(천주교회든 개신교회든 가정교회든)이야 어찌되었든,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의식만 바꾸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차라리 신앙’입니다.
지금은, 지난 2천 년 간의 실패를 거울삼아, ‘여태껏 추종했던 신학과 교리의 견고한 뿌리까지라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처절한 각오가 요구되는 시점일는지 모릅니다.
현실교회의 난맥상을 일시에 해소시킬 특효약은 없습니다. 좀 미련한 방식이기는 하지만(원래 성경 자체가 미련한 것입니다.=고전1:18), 지금까지 맹종해 왔던 신앙의 금과옥조들(실상은 신기루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을 포기하고, 홀로 끙끙대며(이는 오직 성령님의 인도만 의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루하루를 ‘차라리 신앙’으로 살아 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숙명, 아니 맡겨진 사명일 것입니다. 끝까지 홀로 감당해야 할… ♣
아마도...쉽지않은 생각들이 교차 했겠지요...
망설임과 강권적인 선택의 기로에서서 멈칫멈칫 거렸겠지요...
그래도
누군가는 외쳐야 하겠기에...
긍정적인말
적극적인말
축복의 언어를 얼마든지 권장하는 이 시대속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절망을 노래하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예루살레아 예루살렘아...
그 성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
이스라엘을 보면서 탄식하시는 하나님....
모두가 이길로 가려할 때
그길에서 돌이키라고 하는 사람들....
어디서부터 무엇을 고쳐야 할지 막막한 이 시대여...
형제님의 깊은 그리고 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려봅니다...
제 댓글이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