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제가 독일 한마음교회 찬양대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을 여기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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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2 sunny lee
찬양대원 여러분, 이선우 집사입니다. 지난 주의 한○○ 집사님과 조○○ 자매님의 귀한 나눔에 이어, 이번 주에 제가 나름대로 받은 은혜를 이곳에서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일에 제가 집중 묵상한 내용은 눅24장에 나타난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였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낙심과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이야기이지요. 이 장면을 골몰하면서, 제 가장 큰 관심은 이들의 속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4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이어 엠마오 마을에 두번째로 나타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그 이전에 무덤으로 달려간 수제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다 제쳐놓고, 무명의, 그것도 도망치듯 예루살렘을 떠나버린 이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일까? 글로바라 이름하는 그 제자는, 이후의 성경 기록에 어디 갔는지 흔적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시점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손수 찾아가실 정도로 그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왜 예수님은 첫번째로 그녀에게 나타나신 것일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20:17) 부활하신 직후 아버지에게 올라가지도 않은 그 상태에서, 무엇이 그리도 급하시다고, 예수님은 서둘러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을까? 무덤에 함께 간 다른 두 여인들은 제쳐두고 말입니다. 혹시 그녀에게는 예수님이 만나주실 만한, 특별한 뭔가가 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말씀 속에서 이들 세 사람(막달라 마리아 및 엠마오의 두 제자)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5초만이라도 지금 생각을 한 번 해 보십시요.
예수님이 이들을, 나아가 우리를, 발벗고 찾아오실 만한 그 '특별함'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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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찾은 그 특별한 무엇은 슬픔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요20:11)
(엠마오 두 제자)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24:17)
예수님을 붙든 강력한 힘, 그분이 스스로 발벗고 찾아오시게 한 원동력- 그것은 다름아닌 슬픔이었지요.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 깊은 곳에서 흐르는 슬픔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때, 주님은 발걸음을 멈추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시는 것보다 더 급한 것- 그것은 바로 크나큰 슬픔의 눈물에 젖어있는 마리아에게 다가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1 제자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더 큰 슬픔에 젖어있는 엠마오의 두 제자를 만나 주시는 것이었지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약4:9)
왜?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갈갈이 찢는 나의 애통인 것이지요. 내 얼굴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만큼 주님을 향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슬픔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주 우리 찬양대에 부어주시는 눈물이 가득함에 정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렇게 감히 선포하고 싶습니다. 찬양대의 몇몇 분들이 흘리는 애통의 눈물이 은혜의 도화선이라고..
몇가지 예를 더 들어 볼까요?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통곡의 기도 때문이었을 겁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 슬픔과 통회의 고백으로 세리는(바리새인이 아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 베드로는 슬픔에 가득한 고백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요11:32) - 마리아(마르다의 동생)의 슬픔에 가득한 눈물의 엎드림이 주님의 위대한 눈물을 촉발시켰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4:8-10)
2주전 주일 예배 설교 본문이었지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위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아시나요?
1) 내가 스스로 열심히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법
2) 나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한테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달라고 손을 벌리는 방법
내가 움직이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겁니까?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방법이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명확하지요? 하나님과의 거리는 내가 줄인다고 해서 줄어지지 않습니다. 왜?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무한대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55:8-9 참조) 어찌보면, 1)의 방법은, 창11장에 표현된 바와 같이 하늘(하나님이 아닌!)에 닿기 위한 바벨탑을 쌓는거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까와지기 위해서는 나를 오히려 낮춰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낮춰진 나에게 주님이 거꾸로 찾아 오십니다. 즉, 가까움의 거리는 주님이 줄여 주시는 것이지, 내가 아무리 해도 줄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은 그 거리를 늘리는 것입니다! 즉, 나를 낮춤으로, 주님과의 거리를 늘릴 때에야, 주님은 비로소 움직이신다는 거지요. 따라서, 가까움의 비결은, 역발상적으로 '거리를 늘림'이 주님을 움직이게 하는 트리거(Trigger)가 된다는 것입니다.
멈-가까움, 죄-깨끗함, 두 마음-성결한 마음, 애통-웃음, 근심-즐거움, 낮춤-높임. 말씀의 순서를 따라서 대비어들을 모아 봤습니다. 이 단어의 나열을 보면서 느낌이 오시나요? 앞의 단어가 나의 현재 또는 나쁜(?) 상태라면, 뒤의 것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이지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가만히 보면, 앞의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가 바로 나의 현재 모습이요, 내 바탕이기 때문이지요. 즉, 앞의 상태야말로 '나의 정체성'인 셈이지요. 이 말씀은 나에게 "네 꼬라지를 제대로 알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자꾸 개선된 방향(뒷쪽의 단어들)으로 스스로의 노력을 기울여서 가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내 현재의 모습과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지요.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 있는 곳에서 아예 주저 앉으라, 엎드려 버리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니까. 나는 죄인이요, 매 순간 두 마음을 품는 존재이니까. 그러니까 죽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주님이 다 하신다는 겁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 내 죄를 사해 주시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을 고백하면 성결케 해 주시고, 애통하면 위로해 주시고, 근심하면 즐거움을 주시고, 낮아지면 높여 주시는 거지요. 잘 보십시요. 나는 '주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만이 '주는 분'인 것입니다.(그래서 주님?^^) 스스로 이것저것 주려고 하지 마십시요.
내 상태를 극악하게(?) 표현해 주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1) 나는 거지다 - 가진 것이 없되,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요, 상거지임.(마5:3)
2) 나는 노예다 - '종'이라는 표현은 약함. 죄의 노예이든지, 의의 노예이든지 둘 중 하나인데, 어쨋든 노예임.(롬6:16)
3) 나는 시체다 - 죽었다, 죽었다 하는데 진짜로 죽었다면, 나는 시체가 맞음.(갈5:24)
이것이 내가 처한 상황이요, 나의 진정한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분' 또는 '공급자'가 없으면 나는 한시라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출 수 있습니까?
앞에서 이미 그 답이 나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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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9절)
슬픔과 애통과 눈물, 이것이 낮춤의 전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엠마오의 두 제자와 같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이렇게 오직 나를 채우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주님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의 전권을 맡기면 됩니다. 스스로 난체 하지말고 성전의 세리처럼 먼저 내 가슴을 치겠습니다. 스스로 웃지말고 먼저 울겠습니다. 스스로 높이지 말고 먼저 낮추겠습니다. 내가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주님이 날 위해서 움직이시도록 먼저 그분의 도움을 갈구하겠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눅18:13) - 베드로와 세리의 공통된 고백이 이것임을 발견합니다.
"주 예수님, 이 죄인 괴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것이 이번 주간, 아니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샬롬~
이선우 드림.
2012/6/29 sunny lee
한집사님, 반갑습니다.
브라질에서의 생활도 영육간에 강건하시리라 믿습니다.
○○ 자매님, 귀한 나눔 감사합니다.
모든 일정을 잘 소화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찬양대에 복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즘 저희 한마음 찬양대의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호흡인 것 같습니다.
몇주전 저희는 시편 84편 2절 말씀에서 찾은 "술 피아토"(Sul Fiato) –
내 영혼, 즉 루아흐(호흡)을 실어서 드리는 찬양을 감동으로 나누었습니다.
선형 자매님의 체험처럼 하나님은 영이시요(요4:24),
영은 루아흐(호흡, 숨)요,
피아또(Fiato)인 것입니다.
지휘자 집사님이 늘상 강조하시는 호흡에 이런 깊은 뜻이 있음을 아셨나요?^^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며 드리는 찬양....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아, 하나님의 호흡으로 움틀거리며 용솟음치는 생명의 약동을 느끼십니까?
한집님도 그러셨지만, 제 가슴도 먹먹합니다.^^
주일날 뵙지요.
서울에서, 이선우 드림.
2012/6/26 한○○ 집사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루 종일
아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의 표현에 감사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며
남은 호흡을 살겠습니다.
한 ○ ○.
2012. 6. 26. 20:01
안녕하세요. 소프라노 조○○입니다.
바로 인사를 드렸어야하는데..
늦게나마 메일로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요.
리사이틀에 와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성가대 식구들의 기도의 힘 팍팍!!! 느끼면서 끝까지 했어요..
그날 노래하면서..또 한번 느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난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걸...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이상하게...
노래하면서 노래 하는중에 제가 계속 기도를 했어요.
전 보통 노래하러가면 들어가기전 , 그리고 마치고 나와서 기도를 하거든요..
처음으로 노래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호흡했어요.
성가대 식구들의 기도가 제 가슴에 확확 와 닿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사이틀을 마치고 한국에서도 연주 마치고
지금은 러시아에 있어요.
바로 스페인과 이태리,독일거쳐 다시 한국으로 연주가게 됩니다.
성가대는 8월말에 복귀할것 같아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항상 부족하지만 엄마같이.. 아빠같이.. 언니 오빠 같이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전 하나님이 특별히 더 이뻐하시는것 같아요..히~^^*
항상 건강하시구요.
축복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우리 한마음 성가대 쵝오!!!
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