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눅9장] 인사이더 vs. 아웃사이더

조회 수 862 추천 수 72 2012.08.05 14:44:19
QT묵상 2012.8.1 눅9:1-9 <인사이더 vs. 아웃사이더>
8월의 첫날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내가 '인사이더'로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이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얘기를 본문과 연결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본분의 전반부는 예수님과 함께 한 12제자들이 각 마을로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행하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그 소문을 들은 분봉왕 헤롯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너무나 다른 이 두가지 이야기를 대하면서, 인사이더(Insider)와 아웃사이더(Outsider)를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인사이더라면, 헤롯은 아웃사이더의 전형입니다.
인사이더도 아웃사이더도 바삐 다니며 살아갑니다.
인사이더도 아웃사이더도 '보스'가 있습니다.
둘다 보스의 명령은 '하늘'입니다.
인사이더의 보스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잡은 자요,
아웃사이더의 보스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그들은 보스의 명령을 따라 오늘도 바삐 움직입니다.
인사이더는 보스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만,
아웃사이더는 보스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따릅니다.
인사이더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지만,
아웃사이더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혼란스럼으로 방황합니다.

나(우리)도 아웃사이더로서 헤롯의 삶을 살다가, 인사이더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인사이더가 되었던 기준점은 무엇일까? 그 기준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설 때 나는 인사이더가 된 것입니다. 인사이더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더불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더불어 먹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인사이더도 두 차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예로 들어 봅니다. 베드로는 3가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순전한 제 이론이니까 신학적 백업은 전혀 없습니다^^) 제1기는 이웃사이더로서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의 모습일 겁니다. 제2기는 인사이더로서의 삶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어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3기는? 요21장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일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3기를 굳이 나눈다면, 저는 행1장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로 잡겠습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인사이더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이끄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저는 전치사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Beside -> Within, 즉 곁에서 -> 안에서..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기준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Beside Jesus - 이것이 베드로의 인사이드 전반기 삶의 모습이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의 곁에 있었던 거지요, 같이 먹고 같이 생활했지만, 예수님은 단지 옆에 계셨을 뿐입니다. 후반기는? Within Jesus - 그 예수는 베드로의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령 강림의 요체라고 믿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리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아, 보혜사 성령님.. 내 안에 계신 주 하나님..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18-19절) "너희는 나를 보리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이후에 나타날 일... 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육체에서 영으로, 곁(Beside)에서 안(Within)으로 다시 임하신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영'(행16:7)이 성령입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은혜시대를 사는 나는, 베드로와는 달리 1기와 3기만 있을 뿐입니다. 2기의 'Beside Jesus'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3기의 'Within Jesus'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인사이더로서의 삶을 사는 영광을 주신 주님을 이 아침에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부록)

QT묵상 2012.7.30 눅8:26-39 <두려움의 정체>
월요일 아침입니다. 거라사 지방에 내려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사람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과 그 지방 거주민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두려움"에 대해 묵상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세 부류의 등장인물(?)을 봅니다. 귀신과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지요. 세 그룹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신과 마을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서, 귀신 들렸다 놓임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예수님과 헤어지게 된 것이지요.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가만있고 예수님이 그들을 떠났던 것입니다.

귀신과 마을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공통점들이 많습니다. 귀신의 이름은 군대(Legion)였습니다. 로마 시대에 있어 레기온(Legion)이라 함은, 총 군사의 수를 대략 6천명으로 이루는 대규모의 군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귀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28절) 왜 '우리'가 아닌 '나'일까? 그것은 그들이 숫자는 많았지만, 인격적으로(?) 하나, 한 몸과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기온과 같은 대규모의 많은 인원이었지만, 예수님을 향한 이들의 생각은 한결같이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군대 귀신이나 마을 사람들이나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지요.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서 예수님이 떠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경원시했을까?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사람들도 예수님의 기적적 치유하심을 봄으로써 그 분이 적어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렇게도 멀리하려고 했던 것일까? 본문의 말씀 속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들이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벌벌 떱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이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돼지 떼에 대신 들어가 돼지들이 몰살 당합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어떤 두려움이었을까? 귀신들린 자가 치료받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본 사람들은 돼지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도망하여 마을과 성내의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본 것은, 이전에 귀신들렸다 이제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그 남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돼지 떼가 몰살 당함으로써 그들은 큰 재산상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웠던 것일까? 그러나 의외로 이들의 두려움은, 치유받은 그 남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음을 본 직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무게를 더 두고 싶습니다. 즉,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줄 경제적 피해는 이차적인 것이요, 진짜 두려운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도 귀신과 닮았습니다. 귀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28절)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이 그 앞에서 떠나기만을 간구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과 그들은 '상관이 없기' 때문이겠지요.(28절)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정체는 직접적으로 예수님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겠지요. 어제의 큐티 본문에서 저는 그 해답을 찾습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7절) 여기서 '장차'라는 시점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제게 이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점, 이 때야말로 숨은 것과 감추인 것이 다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빛으로 임하십니다.(요1:1, 1:4) 말씀이요 빛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아멘!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 환히 비추일 때, 우리 모두는 벌거벗음의 경험을 합니다. 그 때 일어나는 첫번째 감정이 부끄러움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좌자인 아담과 하와도 똑같았지요. 이어지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결국 두려움의 근원적 원인은 그들 안에 감추어진 죄 때문인 것이지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가 드러날 때, 그들은 두려움으로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 신기롭습니다. 내게도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이 신자인 나에게는, 두려움보다는 애통함으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같이, 나를 가릴 무화과나무 잎이 필요할까? 예수님의 보혈로 만들어진 가죽옷을 나는 주님에게서 이미 받았습니다. 주님 앞에 벌거벗은 내가 굳이 가릴 것은 없습니다. 단지, 나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슬픕니다. 아, 나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그 슬픔은 은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 받은, 나에게 값없이 주어진, 그 크나큰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손을 벌립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QT묵상 2012.7.31 눅8:40-56 <터치인가, 프레스인가?>
7월의 마지막 날.. 월말 마감에 바쁜 분들도 많이 있으시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오늘 큐티 본문에도 이렇게 인생의 막장, 그 막다름에 이른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둘다 12년의 세월에 공통점이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한 여인은 12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혈루증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었고, 다른 소녀는 12살의 나이에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한 이 둘 모두는 '손'으로 인해 살았습니다. 그 여인은 '손'을 대어 고질병을 고침 받았고, 그 소녀는 '손'이 잡혀 살아 났습니다. 아, 구원의 기적입니다..

45절을 NIV 영어 성경으로 보면 재밌는 대비구를 발견합니다.
"Who touched me?" Jesus asked. When they all denied it, Peter said, "Master, the people are crowding and pressing against you."
예수님이 말씀하신 동사와 베드로가 말한 동사를 주목합니다. 터치(Touch)와 프레스(Press)입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무엇일까? 당연히 사람이겠지요. 사람 중에서도 무엇? 예, 손(Hand)입니다.

수 많은 손들이 그 분을 찾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손으로 터치했고, 다른 이들은 그 손으로 프레스했습니다.
터치는 전치사없이 스스로 주어이지만, 프레스는 against라는 부정적 전치사가 따릅니다.
그렇습니다.
한 손은 터치했고, 다른 많은 손들은 프레스했습니다.
한 손은 조용히 뒤로 가서 몰래 옷자락 끝을 만졌고, 다른 손들은 마구 몸에 손을 댔습니다.
능력은 터치한 손에게서만 나갔지, 프레스한 손들에는 냉담합니다.
터치는 마음이 위주지만, 프레스는 행동이 위주입니다.
터치는 간절함으로 나오지만, 프레스는 급박함에서 나옵니다.
놀랍도록 섬세한 그 분은 나의 터치를 바라실까, 프레스를 바라실까?
프레스하려는 내 욕심 버리고, 터치하는 내 간절함의 사무침을 마음으로 드리게 하옵소서..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음을 아시겠지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주어진 진정한 공통점... 모든 성경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 바로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 이 공통점이 없었다면 본문의 모든 기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겠지요. 오, 주님....

병이 길면 고통이 잦아오고,
고통이 사무치면 무대뽀 짝사랑이 된다.
그 분의 옷자락을 겁도 없이 만진 혈루증 여인처럼.

나의 마음, 나의 간절함..
53년의 세월이 사무침되어,
나의 손도 그렇게 그분을 터치한다.

사무침은 어느 한 곳에 깊이 스며 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극한점이다.
그 막다름에 이르러 넘쳐 흐르고 끓어 오르다 못한 절절함이다.

사무침은 알알이 맺힌 내 가슴앓이를 비통스레 토해내는 아쟁산조이다.
내 가슴에서 그 분에게로 전이가 가능한 소통 수단이다.
죄인된 내가 거룩한 그 분을 만나뵐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사무침은 내 쪽에서 할 일을 다했다는 마침표이다.
아니, 사무침은 새로운 반전으로의 연결점이자 도약점이다.
그러기에 사무침의 끝자락에는 그 분의 옷자락이 놓여있다.

주님의 옷자락을 향한 내 손의 조용한 터치로
그렇게 주님을 향한 사무침의 손벌림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내리라.





QT묵상 2012.8.2 눅9:10-17 <주님과 내가 함께 먹을 때>
오늘은 5병2어 사건... 오늘도 먹는 얘기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3절)- 제가 오늘 붙잡은 말씀입니다.

어제의 큐티나눔- 'within Jesus' 인사이더로서의 내 삶은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이었지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작년 10월의 어느 주일 날, 이 말씀 속에서 너무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 주님의 음성이 바로 두드림이요, 두드림은 주님의 파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파동에 대한 나의 응답을 과학적 이해 속에서 '공명'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소리와 소리의 만남, 파동과 파동의 화합인 것이지요. 그리고, 위 말씀에서 주님의 최종 목적은 '먹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5병2어의 주제이기도 하지요. 그 때 제가 써놓은 이야기에 이후 오병이어에 대한 자세한 묵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발상이라,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파돌이가 나에게 들려주는.... 파동의 세계)

이선우님, 파동의 세계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나는 당신을 파동의 세계로 안내할 ‘파돌이’입니다.

파동은 물질(입자)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나 부피(질량)가 없습니다.
또한 파동은 물질세계처럼 ‘존재한다’는 표현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파동의 세계에서는 당신도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존재(being)나 대상(object)이 아닌 파동(wave)만이 이 세계에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도 초월합니다.
파동의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되, 돌며 회전하며 진동합니다.
그 움직임으로 상호 간섭하고 관계하면서 파동은 소통합니다.
입자의 세계가 그러듯이, 파동의 세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는 과학적 용어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사는 세계는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물론 입자의 세계 대비 파동의 세계는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요.
마이크로 세계의 원리를 아신다면 금방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자(물질) 세계의 최소 단위는 분자입니다.
각기 다른 분자의 조합으로 에너지와 질량이 다른 입자들이 형성됩니다.
이 분자를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지요.
전자는 빠른 속도로 원자핵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뭉쳐 있습니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물질을 쿼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쿼크는 입자가 아닌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쿼크는 입자로서는 할 수 없는 파동의 행동패턴을 보입니다.
즉, 입자를 이루는 가장 최소의 단위는 결국 파동인 셈이지요.
이같이 마이크로 세계로 들어가면 이 세계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세계가 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 세계는 파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입자와 파동의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입자 또한 파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빛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지요.
그러면서 빛은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갑니다.
나아가다 막히면 반사, 굴절, 산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만드신 창조물이기도 하지요.
사실 빛은, 파동의 세계를 실체화시켜 입자의 세계로 보이게 해 줍니다.
당신의 눈은, 빛으로 인해 파동으로 내재된 입자를 입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당신이 사는 이 세계는 모두 파동의 세계랍니다.

파동은 다이나믹한 세계입니다.
파동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쉼이나 멈춤이 없다는 얘기지요.
움직일 뿐만 아니라 회전하고 진동합니다.
이는 마치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끊임없이 도는 원리와 유사합니다.
당신의 존재영역인 지구가 자전하며 공전하는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태양이 속한 은하계를 포함한 온 우주도 회전하고 진동합니다.
그 움직임의 파동이 두드림의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파동은 파동끼리 서로 관계하고 간섭하고 상호 영향을 끼칩니다.

소리를 통해서 파동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진폭과 파장(주파수)을 가집니다.
진폭의 크기로 소리의 크기가 결정되고,
파장의 정도로 소리의 높낮이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이 그 소리의 파장을 맞추어 듣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파장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신도 같은 파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공명(共鳴)이라고 하지요.
당신의 귀에는 외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명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파동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파동의 세계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답니다.
파동의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인식했지요.
- 하나님은 말씀이시라
- 하나님은 영이시라
- 하나님은 빛이시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선우님, 파동의 세계에 오심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이상, 파동의 세계 안내자인 파돌이였습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시19:1-4)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아, 공명이다. 공명이야말로 한시적 소리를 온 땅에 보내고, 세상 끝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공명이 됨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 함께 하심의 결과가 무엇일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것은 바로, 먹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나와 함께 먹고자 함이었다. 사실 이 말씀은 조금 어이가 없다.ㅋㅋ 그렇게 열심히도 문을 두드리셨던 주님, 문이 열려 주님은 나를 만나시자마자 같이 한바탕 신나게 먹자고 하신다. 순서도 재미있다. 주님이 먼저 나와 함께 먹는다. 그리곤 나도 주님과 함께 먹는다. 이니셰이터(Initiator), 즉 일을 먼저 벌리신 분은 주님이시다.

이를 파동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떨까? 주님의 파동이 내게 몰려온다. 나는 공명으로 나의 파동을 주님의 파동과 일치시킨다. 주님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그렇게 만난다. 만남 이후엔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결합이다. 연합이다. 나의 파동이 주님의 주파수와 완전히 공명되어 결합하고 연합한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좋겠다. 파동의 결혼이다. 주님의 주파수가 변한게 아니다. 주님의 주파수에 내 파동의 주파수가 변화된 것이다. 연합이 되면 하나다. 한 파동이 되어 이후에는 같이 먹고 같이 즐긴다.

먹는 상상을 하니 오병이어 생각이 났다. 오병이어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먹되, 예수님과 함께 다함께 먹자는 것이다. 바로 계3:20의 목적과 오병이어의 목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닌가!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 만큼 풍성한 것이 있을까?
오병이어는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몇 안되는 사건 중의 하나다. 그만큼 이 시건이 중요하다는 시사점이 아닐까? 4복음서를 다같이 참조하여 대화록을 만들어 보았다.

주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제자: 여기는 빈 들이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주님: 그들이 갈 필요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 우리가 가서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주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
제자: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 그것들을 내게로 가져오라.
주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이후) 이제 이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 대화는 음미할 수록 재미있다. 주님의 제자는 바로 나다. 주님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얼마만큼 다른지 그 시작과 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그것은 무리를 먹이는 것이었다. 즉, 나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같이 염려하시고, 우리들을 한꺼번에 같이 먹이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이 바라보시는 쏘스(Source)는 단 하나다. 본문에서는 제자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바로 나다. 주님의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직접적으로 향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하라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내가 먹이라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파돌이가 보여준 파동의 세계를 음미한다. 파동의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주님의 주파수를 맞춰 내 파동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과정이요 프로세스이다. 내 파동은 끊임없이 꿍시렁 거린다. 여기는 빈 들이라니깐요? 200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이 내게 어디 있습니까? 오병이어 밖에 없는데 이게 도움이 되겠어요? 에게, 이거 고작 나눠줘서 이 사람들을 다 어떡해?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이 세가지다. 1) 네가 먹을 것을 주라! 2) 그것들을 내게로 가져오라! 3) 이제 이것들을 나눠주라!

주님께서 나를 향해 두드리시는 파동도 이렇게 세 가지다.
1) 첫번째 파동은 내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인가? 그것이 주님께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주님께 보여드리면 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오병이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 두번째 파동은 내가 가진 그것을 주님께 가져오라는 것이다. 아까와하지 말고 주님께 그대로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 파동의 변환이다. 내 것이 주님의 것으로 변화된다. 그 결과는 파동의 결합이요, 연합이다.
3) 세번째 파동은 이제 주님의 것을 실제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주님의 파동과 연합된 나의 파동이 움직이고 진동하고 회전하고 굴절하고 산란하여 나아간다. 이제 나는 주님의 파동의 사자(使者)이다. 요한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나는 주님을 따라 말씀이요, 영이요, 빛이요, 사랑이 된다. 그러할 때, 나의 파동은 다른 이들을 ‘먹이는’ 파동이 된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먹고자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삶인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과 떡을 떼는 것- 이것이 천국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초는 주님의 파동이시다. 주님의 두드림의 음성을 내가 공명함으로, 그 파동에 동조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나의 파동에서 주님의 파동으로.. 아, 공명의 은혜여.. 먹고 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QT묵상 2012.8.3 눅9:18-27 <죽어야 산다>
오늘 묵상의 주제를 '죽음'으로 잡았습니다. 제가 붙잡은 말씀은 24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많은 분들이 그러했듯이, 며칠전 올림픽 유도의 금메달리스트 김재범 선수의 쾌거는 제게도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결승 경기에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고, 인터뷰 때는 하나님께 영광... 정말이지 압권이었습니다. 제게는 그 이후에 한 그의 말이 또한 가슴에 남았습니다.
"(4년전 북경에서는) 죽기 살기로 했어요. 졌어요, 그때는. 지금은 죽기로 했어요, 이겼어요. 그게 답입니다."

죽기 살기로 하는 것과, 죽기로 하는 것- 그것이 무슨 차이일까? 우리 말의 '죽기살기'란, 생사를 개의치 않음, 생사의 초월, 즉 죽으나 사나 목숨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에 올인(all in)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4년 전에는 그 정신으로 했다가 졌습니다. 이제는? 죽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죽으나 사나'가 아니라, 그냥 죽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겼다고 합니다. 그게 답이랍니다. 굳이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경험한 '죽음'은 무엇일까?

예수님도 오늘 같은 말씀을 나에게 주십니다. 필생즉사요, 필사즉생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아,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잃는 것이지요. 사실상, 24절 말씀은 23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래서 23절과 24절은 한 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23절이 자기 목숨의 24절로 바뀌었습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죽음입니다. 어떤 죽음일까? 주님을 위하여,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4:16).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왕에게 사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나아갈 때 한 말입니다. 왕이 자신의 반지를 내밀어 허락하지 않으면, 왕비라도 죽음을 당하게 될 절대위기 상황이었지요. 이는 또한 안이숙 여사께서 쓴 책으로 유명해진 말이기도 합니다. 죽어도 좋다, 죽을 각오로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끝일까? 저는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출발점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넘어 실제로 죽음의 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말 그대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그 죽음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죽음의 강에 내 몸이 완전히 푹 잠겨서, 내 자아(옛사람)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참세례(침례)가 아닐까요? 그래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이 비로소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저는 ‘내려놓음’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그리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용규 선교사의 이야기를 깎아 내린다거나, 그 표현의 선한 뜻을 곡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내려놓으면 마치 모든 것이 다 되는 양하는 ‘나의 태도’가 밉상스럽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의 대상은 무엇일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나, 그 문제의 본질인 죄일 것입니다. 일례로 내게 큰 욕심이 있어, 이를 내려놓았다 칩시다. 그러면 다 되는 것일까? 아니지요. 실제의 근원적 문제는, 내 안에서 욕심을 일으키게 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해결하려고 한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욕심을 야기한 내 안의 '그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 무엇’이 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려놓아서는 절대 해결이 되지 않음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죄와 죄인의 차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죄가 심판 받을까, 아니면 죄인이 심판 받을까? 죄가 죽는 것일까, 아니면 죄인이 죽는 것일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죄의 대표는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나의 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 즉 정욕과 탐심은 스스로 그 자체로 그냥 죽거나 도말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육체 안에서 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와 같이 “육체와 함께..”입니다. 즉, 실제 못 박혀야 할 것은 나의 육체인 것입니다. 깃털(죄)이 아닌 몸통(죄인)이 나서야지요.^^ 따라서 내 죄가 심판받기 위해서는, 그 죄의 원천이 되는 내가 심판받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대신해서 지신 주님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에야 비로소 질 수 있는 '자기 십자가'일 것입니다.(본문 23절) 나의 육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을 때, 내 안의 정욕과 탐심도 같이 못 박히는 것이요, 내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나의 정욕과 탐심도 같이 죽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은 "FACT"입니다. 내가 할 일은,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내 가슴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1) 아는 것입니다.(롬6:6- 우리가 알거니와)
2) 믿는 것입니다.(롬6:8- 믿노니)
3)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롬6:11- 여길지어다)

그러기에, ‘내려놓음’은 근원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야기한 ‘나(자아)’ 또는 ‘옛사람’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옛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내려놓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나의 자아가 죽는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더 복잡하고 오묘합니다. 이 과정을 올려놓음, 못박음, 피흘림, 죽음, 장사함의 5대 프로세스로 저는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한 번 죽어서 끝날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끊임없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이 순간에도 나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만큼 어려운 일은 세상에 없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제자의 도'라고 알려진 이 말씀.. 어쩌면,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믿음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김재범 선수의 진한 간증처럼, 철저한 죽음은 '죽기 살기'가 아닌 '진짜 죽는 것'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부족한 저에게도 이 아름다운 죽음을 허락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죽음의 경험을 제 마음 깊은 곳을 따라 노래한 것이 아래 세 편의 자작시입니다. 이 3부작의 되새김으로, 주님 안에서 나의 죽음이 매순간 지속되기를 무릎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부- 마음의 죽음)

칠흑같이 어두운 삭망의 밤,
나는 그렇게 절망의 나락에서 나옵니다.
휘이적 휘이적
내 등 뒤 십자가는 왜 그리 무거운지
기나긴 언덕길 허덕이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빛 한점 없는 민둥산의 산정에서
나 홀로 낮아짐으로
가로 세로 놓여진 그 십자가에
내 마음을 얹습니다.
꽝, 꽝, 꽝..
세 개의 대못이
양 손목과 발목에 박힙니다.

누운 십자가는
내 마음을 안고
하늘을 향해 일어섭니다.
한 분 십자가의 죽음을 따라
내 마음도 같이 죽어갑니다.

그리 씨름했던 마음이
살려달라 떼쓰듯 애걸합니다.
절규의 피를 흘립니다.
한없이 부서져 갑니다.
아스라한 여명의 빛이 스밀 때까지..

고요함 가운데 한 소리 들립니다.
다 이루었다..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했던 성전 휘장이
한순간 갈라짐같이
유혹자의 텃밭이었던 내 마음이
죽음에의 해방으로 비상합니다.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
마음의 죽음으로
나는 그렇게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씁니다.

그토록 한스런
마음의 죽음으로
이제사
고운 님 하늘 님
한무리 빛 되어
내 속 깊은데로
함박 오십니다..



(2부- 십자가의 5대 프로세스)

주님은 십자가에 올려져서, 못 박히고, 피를 흘려,
죽음에 이르러 이후 장사를 치룬 바 되셨다.
주님은 나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내 십자가를 짐도 나의 의지요, 주님을 따름도 나의 의지이다.
나아가, 내 의지는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믿음으로 승화한다.

주체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의 십자가가 수동적 십자가라면
나의 십자가는 능동적 십자가여야 한다.
그러기에 내 십자가의 능동적 프로세스는
올려놓고, 못박고, 피흘리고, 죽고, 장사하는 것이다.
*

올려놓음은 내려놓음의 반대이다.
십자가에는 내려놓아 숨길 자리가 한 틈도 없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나를 어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나도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 한다.
내 부끄러운 모든 것을 그곳에 올려놓아 빛 가운데 드러내 놓아야 한다.
그래서 올려놓음은 내 십자가의 첫번째 프로세스이다.

못박음은 화합의 반대이다.
그 세 개의 대못을 내 양팔과 발목에 박아야 한단 말인가?
나를 거세게 정죄하는 율법에 대하여 나를 못박고,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죄에 대하여 나를 못박으며,
내 안에 도사린 육적 욕망에 대하여 나를 못박는다.
그래서 못박음은 내 십자가의 두번째 프로세스이다.

피흘림은 불순종의 반대이다.
일말의 저항감이라도 있다면 피흘림의 순종이 없다.
피는 생명이요, 피흘림은 내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과정이지 않은가?
이는 필연적 죽음을 향하여 치달리는 인내의 몸부림이요,
새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대장정이다.
그래서 피흘림은 내 십자가의 세번째 프로세스이다.

죽음은 두려움의 반대이다.
이 끈질긴 생명력을 어찌 죽음의 막다름에 맡긴단 말인가?
그러므로 죽음은 위대한 용기요, 영혼을 위한 육신의 과감한 포기이다.
미지의 어둠으로 가득한 블랙홀의 심연으로 뛰어듬같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육체적 인과와의 별리 선언이다.
그래서 죽음은 내 십자가의 네번째 프로세스이다.

장사함은 탄생의 반대이자, 탄생의 직전 과정이다.
희디 흰 세마포로 감싸안긴 나의 주검이
때를 기다리는 침묵의 바다에 고요히 누워있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에서 내 생명이 다했음을 확증해 주는 표징이 아닌가?
장사함이 없으면 이후 새 생명의 탄생도 없다.
그래서 장사함은 내 십자가의 마지막 프로세스이다.
**

‘나’는 마음이자 옛사람의 대표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요, 교만과 정욕이요, 자아로 뭉친 죄 덩어리들이다.
그것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5대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죽음으로 버려진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내 모질디 모진 옛사람을
올려놓고, 못박고, 피흘리고, 죽고, 장사하는 시은소이다.
주님이 옆에서 도우시지만, 이 프로세스는 내가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내가 이 땅에서 이룰 아름다운 소명이다.
옛사람의 죽음 이후에는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그 분이 나를 향해 해맑은 손짓을 주신다.
다시 태어난 자여, 어서 오라!
그렇게 함박웃음으로 한껏 팔을 벌리신다.



(3부- 죽은 자의 노래)

죽은 자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생명이 없기에 생각도 없지요.
생각이 없으니 또한 욕심도 없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는 생명이 없기에 말도 없지요.
말이 없으니 또한 관계도 없답니다.

죽은 자는 행동이 없습니다.
그는 생명이 없기에 행동도 없지요.
행동이 없으니 또한 범죄함도 없답니다.
*

내 옛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모순입니다.
거기에서 죽은 나는 옛사람이 없지요.
그 곳에서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랍니다.

나를 향한 정죄는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강력합니다.
거기에서 죽은 나는 정죄가 없지요.
그 곳이 정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랍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내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죽은 나는 심판이 없지요.
그 곳에서 죽음의 심판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답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육이 아닌 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지요.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은혜의 생명,
우리의 마음에 가득히 부은 바 된 사랑의 생명,
예수의 부활에 참여할 새 생명이지요.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에게는 예수가 있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위해 살 뿐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 가운데 살며,
예수를 대신하여 작은 예수의 삶을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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